개발도상국 이야기
국기 설명: 현대 우크라이나 국기는 우크라이나 대법원에 의해 1992년에 제정되었습니다. 노랑은 밀밭, 파랑은 하늘, 산, 계곡을 상징하며 전통적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이 깃발에 자주 쓰던 색입니다.
지도 설명: 우크라이나는 북쪽으로 러시아와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벨라루스와 폴란드, 서쪽으로는 슬로바키아, 헝가리, 몰도바, 루마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남쪽은 흑해와 아조프해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수도는 키에브 (Kiev)입니다. (출처: UN)
최근 러시아와 유럽연합(EU)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전을 겪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신문에 등장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2016년 기준 GDP 약 US$932억 (출처: 세계은행) 의 세계 62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동유럽 국가입니다. 1991년 독립한 구 소련 국가 중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나라이며, 유럽에서는 러시아 다음으로 영토가 가장 큰 나라로 총 인구는 약 4,430만명이며 이 중 78% 정도가 우크라이나인, 17% 이상이 러시아인, 그 외에는 벨라루스인, 몰도바인 등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라는 국가명은 러시아어로 ‘경계 안’ 혹은 ‘경계 지역’이라는 의미로 12세기부터 러시아에서 사용된 지명이 국명이 되었습니다.
사진설명: 우크라이나의 전통복장을 한 우크라이나 청년들 (출처: projectunify.net)
미인이 많기로도 잘 알려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브는 2012년 Travelers Digest가 발표한 미인이 많은 도시 1위에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사진은 영화 <블랙스완>에서 악역으로 열현한 우크라이나 출신 여배우 밀라 쿠니스 (Mila Kunis)입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기원은 5-6세기에 정착한 슬라브인들과 9세기에 정착한 스웨덴의 바이킹들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882년 올레그(Oleg)라고 하는 바이킹 왕이 키에브를 점령하여 키예프 공국(Kievan Rus)을 세운 후부터 동유럽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로 자리잡게 됩니다. 988년에는 블라드미르1세 (980-1015)의 통치 하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어 현재 동방 정교회가 우크라이나의 주된 종교입니다.
사진설명: 키예프 공국을 세운 올레그 왕 (Oleg Veshchy: 879–912재위) (출처: http://debello.ca/ussr/0862/012.html)
우크라이나 국가의 기틀을 형성시킨 키예프 공국은 칭기스칸의 손자인 바투 (Batu)가 이끄는 몽골의 침략으로 11-12세기 경에 분열을 맞이합니다. 이 후 우크라이나의 동쪽과 남쪽은 터키의 타타르와 몽골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고 14세기부터 북쪽과 서쪽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게됩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서서히 세력을 회복하여 외부 세력을 몰아냈지만 크림반도는 여전히 타타르족이 차지하고 15세기부터는 새롭게 부상한 오스만 터키 제국하의 보호국으로 전락합니다. 이후 17세기 말부터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가, 동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지만 1772년을 기점으로 폴란드의 세력이 서서히 약화되어 1795년 경에는 서부 우크라이나도 대부분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미 역사적으로 다른 세력의 지배를 받아온 우크라이나는 친러시아 성향인 동부와 친유럽 성향인 서부로 나뉘어져 각기 다른 아이덴티티(identity)를 지니게 되는데 이러한 이질적 성향이 결국 오늘날까지 크림반도 분쟁을 비롯한 여러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지도설명: 가운데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포함하여 붉은 색으로 표시된 지역들은 러시아와 인근국가 간의 영토 분쟁지역입니다. (출처: Washington Post)
1783년 러시아의 마지막 여제 예카테리나(캐서린) 대제가 이끄는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터키가 장악하던 크림반도를 점령하고 러시아의 주민들을 반도로 이주시킵니다. 크림반도는 1954년 우크라이나 출신인 소련 정치가 니키타 흐루쇼프가 시행한 소련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찬반논의가 붉어지자 우크라이나의 EU가입을 원하지 않는 동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크림반도의 주민투표를 실시합니다. 친러성향의 반도 주민들이 95%이상 합병에 찬성하자 러시아는 투표 결과를 이유로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병합합니다. 이에 대해 서부 우크라이나, 미국, EU 등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어 여전히 우크라이나는 논란의 중심이되고 있습니다.
사진 설명: 2014년 3월 우크라이나의 육군대장이 비무장한 군사들을 이끌고 크림 반도의 벨벡공군기지 (Belbek airbase)를 러시아 군사들로부터 재탈환하기 위해 전진하는 사진입니다. (출처: independent.co.uk)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었던 우크라이나 내에 민족주의가 확산된 것은 19세기 중반 무렵으로 1918년에 러시아의 적백내전 (러시아의 내전으로 볼셰비키당과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여러 연합 당파간의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시적으로 독립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赤)군 볼셰비키당이 내전에 승리한 후 1921년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강제합병됩니다. 스탈린이 사회주의 집단화 정책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의 모든 경작지를 국가소유로 제정하고 농부들을 집단농장의 노동자로서 일하게 하는 정책을 실시하자 우크라이나의 농부들은 자신들 소유의 가축까지 도살해가며 이를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결국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자영농들을 대거탄압하였고 이로 인해 곡물 생산량이 대규모로 감소되었습니다. 더욱이 스탈린은 각 집단농장에 높은 목표 생산량을 할당하고 농부들이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생산물을 가져가지 못하는 법을 제정해버립니다.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진 집단농장들은 목표량을 채울 수 없었고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되는 모든 곡식물을 전부 가져가 1932-33 년에 우크라이나 전역이 큰 기근에 처하게 되고 이 것이 수백 만 명의 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악명 높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1932-33년) 입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행정수도였던 하르키우에는 거리에 굶어죽은 시체들이 시내 곳곳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 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수는 최대 7백만명으로 전해집니다. 스탈린이 고의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발생시켜 많은 이들을 아사시켰는지 사회주의 정책의 실패로 간주해야 할지는 아직도 논의 중이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사건을 '홀로도모르' (Holodomor: “기아로 인한 말살”)로 규정하며 오늘날까지 특히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의 반(反) 러시아 성향과 강한 민족주의의 주된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사진 설명: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미국신문에 실린 관련 기사 (출처:http://ukraineholodomorck.weebly.com/)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농촌지방이 파괴되면서 전통적으로 농경문화인 우크라이나를 지탱해오던 순수 우크라이나인들이 대거 사라진 이후, 1937-39 경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을 굳건히 한다는 명목으로 당시 우크라이나를 이끌고 있던 공산당원 장관들 및 당원들 약 17만 명을 사형에 처하거나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냅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공포정책으로 인해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과 러시아 간의 제 2차 세계 전쟁 당시 독일에 협력하기도 했으나 1941년 나치 독일은 오히려 유태인들과 함께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인종청소의 명목으로 대량학살합니다. 이 후 1943년 독일이 패하자 소련은 1943년에 키에브를 다시 점령하고 이 때 독일에 동조했다고 의심되어지는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이루어집니다. (고난의 연속입니다..)
사진 설명: 2016년 9월 29일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페트로 포로센코가 75년 전 키에브의 바비야르 (Babi Yar)계곡에서 일어난 나치 독일의 유태인 대량학살의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약 3만4천명의 유태계 우크라이나인이 학살당한 이 사건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가장 규모가 큰 유태인 학살 중 하나로 알려져있습니다. (출처: Shahar Azran / WJC)
이러한 수난의 역사를 지닌 우크라이나에서 발생된 또 한 번의 가슴 아픈 사건이 바로 20세기 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라고 불려지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Chernobyl disaster)입니다. 1986년 폭발 사고 발생 초기 우크라이나 지역을 통치하던 소련 정부는 이 사고를 은폐하고자 했으나, 스웨덴까지 날아간 방사성 낙진으로 인해 사고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의 피해 규모는 국제원자력사건 등급(INES: International NuclearEvent Scale) 체계에서 등급 7의 ‘중대 사고 (Major Accident)’로 규정되며 이는 2011년에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와 동일한 등급입니다. 당시 소련 정부의 안일한 대응으로 피해가 더욱 확대되어 2011년 이 전까지 유일한 INES 등급7의 최악의 원자력 사고로 알려져있습니다.
사진 설명: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현장에서 방사선 오염 낙진들을 제거하고 있는 노동자들(출처:Reuters)
체르노빌 사건이 있은 1980년대 후반부터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지배에 반감을 품게 되고 1989년부터 독립 운동이 전개됩니다. 이는 소련 공산정권을 약화시키는 일부 계기가 되어 결국 1991년 소련의 해체와 동시에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후 자본주의 체제변환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해 높은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 등의 경제침체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2000년부터 금속, 화학품, 농산물 등의 수출이 약 50%이상 증가되면서 우크라이나의 GDP는 계속 성장추세를 보여 2005년에는 빈곤률이 8%로 떨어지는 등 전 국민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이후 자금 부족으로 인해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2010년에 금속 수출품의 가격 상승으로 일시적으로 경제가 회복되지만 이 후 가장 큰 무역상대국인 러시아와의 마찰로 다시 성장이 저하되면서 현재는 우크라이나 통화 흐브리냐(hryvnia)의 가치 폭락과 내전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경제원조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프 설명: 2000년부터 GDP가 대폭 상승하였지만 내전으로 인해 2015년 GDP 약 US$906억으로 감소되었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내전은 크게 친러시아 성향의 동부 우크라이나와 친유럽 성향의 서부 우크라이나간의 마찰이 극대화된 것으로, 이로 인해 러시아와 미국 및 EU 간의 갈등도 계속 고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동부와 서부 우크라이나는 오랜 기간 동안 각기 다른 지배세력으로 인해 문화와 주요 언어가 다르고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 라는 독립된 한 국가로서 지속되어 온 경험이 1991년 이전까지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동서간의 소통과 융합이 큰 난관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지도 설명: 친러시아 성향의 동부 우크라이나는 붉은 색으로, 친유럽 성향의 우크라이나는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출처: CNN)
동서간의 갈등이 정치적으로 그 표면에 나타난 사건이 2004년에 발생한 '오렌지혁명'입니다. 당시 친러 계통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많은 이들은 선거조작을 의심하여 반대파 후보 빅토르 유셴코의 지지자들은 10일간 데모를 하게 되고 결국 재선거를 통해 유셴코가 2005년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를 오렌지 혁명이라고 합니다.
사진설명: 2004년 오렌지 혁명 당시 데모시위를주도하였던 율리야 티모셴코가 대치하던 경찰에게 꽃을 건네주고 있습니다. 율리야 티모셴코는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된후 총리로 임명되었습니다. (출처: http://ambassadors.net/)
이 후 유셴코는 2010년에 치뤄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였으나 친EU와 친러 계통간의 마찰로 인한 불안한 국정에 대한 책임으로 2010년 선거에서는 야누코비치에게 패배합니다. 이 후 러시아와의 경제적 무역 이점과 친러 외교관계를 바탕으로 야누코비치가 2013년과 2014년 EU와의 조약을 거부하자 우크라이나 전역에 유럽통합(EU)에 지지하는 유로마이단 (Euromaidan) 데모가 일어납니다. 결국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의회는 야누코비치를 탄핵하기로 결정하는데 이를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친러 성향의 동부는 이를 반대하고 돈바스 지역은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며 곧바로 우크라이나 정부와 전쟁을 시작합니다.
지도 설명: 우크라이나 정부에 독립을 선언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 위치 (출처:suffragio.org)
사진 설명: 돈바스 전쟁에 투입된 우크라이나 군대 (출처:news.pn)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은 휴전상태에 있으나 아직까지 총격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뚜렷하게 그 해결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있는 상황입니다. 우크라이나의 페트로 포로셴코 현 대통령은 크림반도 반환과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대한 주권회복을 제창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배해 온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지리적, 군사적 관점에서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에 가입될 경우 러시아에 미칠 파급을 생각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배력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전망입니다. 키예프에 위치한 고르셰닌 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의 EU가입 찬성은 50%를 겨우 넘는 수준으로 우크라이나 국민들 또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경제에 미치는 실질적 영향력과 러시아의 군사력을 생각하여 EU가입에 대해 크게 찬성 쪽으로 기울이지 않는 조심스러운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유럽부흥개발은행 (EBRD)의 리포트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한 불안정한 경제 및 정치적 상황에 의해 2014-15년 2년 연속 각각 6.6%, 9.9%로 감소된 우크라이나의 GDP는 2016-17년에는 약 2% 정도의 증가율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국제통화기금 (IMF)의 $175억 달러의 지원 협약 하에 “Four Ds” 개혁 슬로건 (규제완화 (deregulation), 비관료주의 (de-bureaucratisation), 비과두정치 (de-oligarchisation) 권력 분권화 (decentralisation))을 내걸고 민영화, 외국인 투자 유치, 부정부패 척결, 사업 환경 개선 등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IMF는 2016년 9월 대외 채무 상환과 우크라이나의 통화 환율 유지를 목적으로 협약의 일부분인 지원금 1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IMF 이외에 EU와 미국 역시 앞으로 $225억 달러의 지원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경제 안정에 기여할 예정입니다. 또한 외국 기업 유치에 적극적인 우크라이나 정부는 올해 9월 한국에서 '한국기업의 미래-우크라이나 시장' 세미나를 주최하고 우크라이나와 한국의 경제협력이 가능한 유망 분야로 우주항공산업, 교통물류, 농업, 신재생에너지, IT 등이 논의되기도 하였습니다.
근대 역사에서 수많은 고난을 거듭해왔으나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가장 큰 영토와 다섯 번째로 많은 인구, 구 소련 국가 중에서 가장 큰 경제 규모를 보유하여 매력적인 시장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이 기대되는 우크라이나가 하루 빨리 안정을 되찾아 경제 및 사회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는 국가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저자 약력: 런던 소재 국제금융기구인 유럽개발부흥은행 (EBRD) 근무. 유럽,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등EBRD의 27개 개발도상국 관련 업무 담당. 해외 투자 은행, 사모 펀드, 임팩트 펀드, 프랑스 OECD 근무.
* 우크라이나 관광청에서 제작한 아름다운 우크라이나의 동영상을 감상해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qZMMJo7jOT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