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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Apr 26. 2018

여름 안의 겨울

손에 쥐지 않은 것들에 대한 향수

Working Holiday Diary // Broome WA 6725, Australia // 04. 2018



브룸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실외에 위치한 카페 특성상 일을 할 때마다 땀에 젖어 몸이 끈적거렸는데, 오늘은 시원한 바람 덕에 보송보송 산뜻했다. 열심히 오렌지를 자르고 있는데 두툼한 바람 한 무더기가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참 뜬금없이, 바람이 많이 불던 광화문의 겨울이 떠올랐다.


그 겨울, 나는 시간을 쪼개 몇 번 광화문에 들렀었다. 복잡한 열몇 가지 서류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그렇게 확인하고도 빠진 게 있어 주변 인쇄소를 찾아다니면서 체코 대사관을 들락날락거렸다. 프라하로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 비자를 준비하면 서였다. 까다로운 체코 비자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 번거로운 걸음을 몇 번이나 해야 했다. 추운 겨울이었다. 학기 중 수업시간을 피해, 춘천에서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하며 바삐 걸었다. 편의점에서 급히 밥을 해결하면서도 의미 없는 기다림과 불친절한 지시를 받았다. 그 당시 나는 귀가 아린 추위에 몸을 움츠리며 귀찮아 죽겠다고 불평을 했었다. 불평을 했지만, 사실 나는, 그 시간들을 좋아했었다. 서둘러 전철을 타고 오가는 일, 서울의 평일에 살짝 합류해보는 일이 나를 들뜨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첫 외국살이를 하게 될 도시의 시간을 준비한다는 사실이 참 설렜다. 골목의 오르막길에 위치한 대사관부터 큰 대로변의 오피스룩을 입은 사람들, 코를 자극하던 붕어빵 포장마차들이 거센 바람과 함께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을 만큼, 그 시간들이 좋았다.


문득 생각난 그 겨울 덕분에 괜히 기분이 들떴다. 바삐 일을 하면서도 신이 났고 자꾸 마음이 두근거렸다. 바람은 하루 종일 불었다. 일을 마치고도 답지 않게 몸이 쌩쌩했다.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가던 순간에도 프라하를 생각했다. 광화문의 겨울은 어느새 프라하의 겨울로 넘어가 있었다. 꽁꽁 싸매 입고 걷던 눈비가 내리던 거리, 그 쓸쓸해 보이던 풍경들이, 눈 앞의 푸른 나무와 새파란 바다를 가르고 펼쳐졌다.


한 번 떠오른 겨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눈 덮인 설산에서 스키를 타고, 목도리를 코까지 칭칭 감아매고 거리를 걷고, 집에서 스웨터를 입고 따뜻한 스프를 먹는 모습들이 오후 내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어느새 나는 겨울에 가고 싶어 져 버린 거다. 놀랍게도 나는 추운 날씨에 질려버렸던 프라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순간적인 장면으로가 아닌 겨울의 날씨 자체를 말이다. 게다가 호주 말고 캐나다나 아일랜드 같은 곳은 어떨까 자꾸 궁금해져 포털사이트에 검색을 몇 번 해보게 되었다.


참 웃긴 일이다. 프라하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추위가 싫어 멕시코로 떠났고, 남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의 삼월에 벌벌 떨며 여름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나다. 여행하면 여름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여름 시기의 나라들을 여행하는 걸 아주 좋아했다. 삼 개월 전 인도 여행을 하면서도 리시케시의 추위를 못 이겨 따뜻한 곳으로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리고 태국, 인도네시아를 거쳐 호주 브룸에 자리를 잡으면서 내내 여름을 보냈다. 여름을 보낸지 이제 막 삼 개월이 지났다. 피부는 그 어느 때보다 그을었고, 머리는 더위를 피해 짧아졌다. 누가 봐도 여름을 사는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그런데 브룸의 너무나 혹독한 더위를 맛봐서 일까, 여름을 사랑해 마지않았던 내가, 지금 겨울을 그리고 있다. 브룸의 삼월은 살인적으로 덥긴 했다. 그러나 여름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더위에 쉽게 꺾일 정도밖에 안됐던 걸까. 푸른 하늘 맑은 풍경을 보면서도 추운 바람이 불던 겨울을 생각했다. 어쩌면 여름에 질려가고 있는 걸까?


확실한 건 나는 지금 여름의 한가운데를 살고 있고, 겨울이 그리워졌다는 거다. 인간은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고 있지 않은 곳을 그리워한다.   





브룸의 여름과


프라하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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