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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BFirefly Sep 16. 2020

추억의 조건 1

내가 선우정희(鮮于精希)라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달, 곧 올8월 어느날이었다. 강유(姜幼) 형님과 바닷가의 한 찻집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해서 이미 형과 친구인 그가 합류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 있는 곳에 아직 오기 전에 유 형은 이 사람에 대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유 형이 목성에서 온 간첩인 것처럼 선우정희씨는 금성에서 온 간첩이라고 했다. 그리고 유 형에게 'Jacob Being Firefly'라는 영어 이름이 있듯이 이 사람에게는 'Deborah Phoebe Drake'라는 영어 이름이 있다고 했다. 때로 인터넷에서 이 이름을 마주치면 이것이 선우정희씨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 이름은 'the diluted philosophical discourse'(희석된 철학적 담론)와 머릿자가 같도록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이윽고 선우정희씨가 도착했다. 그는 보통 키에 좀 마르고 유 형님보다 대여섯 살 어려보였다.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옷을 잘 입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정말로 평범하게 생긴 얼굴을 꾸미려는 욕심도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대화할 때 그는 좀 활기있고 좀 산만했다. 자주 시선을 옮겼고 자세를 바꾸었다.


우리의 대화는 어떻게 하다가 추억이라는 주제에 이르게 되었다. 유 형이 이렇게 말했다.

     “추억은 현재로부터 멀어진 기억이에요. 시간적인 거리가 있는 과거의 기억이 추억이 될 수 있어요. 어제 있었던 일을 추억이라고는 잘 안 하지요.”

     “아! 오빠다운 개념 분석!” 정희씨는 말했다. 유 형은 소리 없이 웃고서는 말을 이어갔다.

     “또 추억은 내가 경험한 것의 기억이에요. 예를 들어, 경포 호수에서 본 노을 자체는 기억은 되어도 추억이라고 하기는 힘든 것 같아요. 내가 노을을 본 경험은 추억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말을 들었다고 할 때, 그 말 자체는 기억이지 추억은 아닌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경험은 추억이 될 수 있지만.”

     “그러니까 추억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서사의 일부.”

     “그렇지요.” 그리고 잠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분명 유 형은 더 할 말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주저하는 듯 했다. 정희씨는 유 형이 다음 말을 하길 기다리면서도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유 형은 자기 커피 컵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우리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 . . 과거의 경험을 추억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대개 이 경험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 . .” 유 형은 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정희씨는 슬쩍 웃으면서, 하지만 문득 눈을 크게 뜨고 유 형을 강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유 형은 이 시선을 온전히 느끼면서 뭔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머뭇거렸다. 그리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추억의 네 번째 특성을 이야기했다.

     “추억을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은 격한 감정 없이 차분합니다. . . .” 이어서 정희씨가 조용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차분한 응시. 초연하는 관조. 이것이 아까 오빠가 말한 긍정적인 평가와 합쳐져서 추억에 아름다움을 부여한다고 할 수도 있지요.”

     유 형은 가만히 있었다.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정희씨는 또 이렇게 말했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시간적인 거리는 본질적으로 심리적인 거리라고 생각해요. 심리적인 거리가 생긴 기억이 추억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원리적으로는 일 분 전 일이라도 심리적 거리가 있다면 추억이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 상 시간이 지나야만 심리적 거리가 생기는 거지요. 달리 말해 아무리 오래 된 일이라도 심리적 거리가 생기지 않으면 추억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나는 나중에 유 형과 단둘이 있을 때 형이 왜 추억의 세 번째와 네 번째 특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렇게 말하는 데 의욕을 잃은 듯 했는지 물어보았다. 형은 이렇게 대답했다.

     “두 번째 특성까지 이야기했을 때 나는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어. 정희씨가 앞으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 . . 그러니까 정희씨는 내가 추억의 특성을 두 가지를 더 얘기할 것이고 그것이 각각 무엇인지를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그 때문에 지금 이 사람은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지도 않는다는 것도 . . .”

     “정말 그랬을까요? 그런 일이 예전에도 있었던 건가요?”

     “그렇지. 여러 번 있었지. . . .” 형은 이렇게 말을 맺으면서 슬몃 웃었다. 그 순간 이 웃음에 자격지심이 담겨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게 이해한다. 이 웃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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