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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girl Oct 27. 2016

D168. 생애 최고의 산, 피츠로이

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아르헨티나












페루 산타크루즈 트렉킹을 함께 했던 이반을 다시 만났다. 트렉킹 이후 페루 쿠스코와 푸노에서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한 뒤 우리는 볼리비아와 칠레를 거쳐, 이반은 브라질을 여행하고 왔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남미대륙을 여행하고 바로 이곳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찰텐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근데, 남미에서 국경을 넘거나 이런 국립공원을 입장할 때마다 항상 직업을 묻는 거  이상하지 않아? 어차피 읽어보지도 않잖아. 그래서 나는 매번 다른 직업을 적는다? 실업자, 노숙자, 양봉업자  이렇게. 큭큭.”


오늘도 재치 넘치는 이반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홀로 여행하며 사무치게 외로웠던 순간, 브라질 현금인출기에서 카드를 복제당한 일, 그보다 더 많이 신나고 재미있었던 사건들까지. 여기는 페루처럼 고산도 아닌데, 고산에서보다 더 숨이 차오르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도 산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가득하다. 파타고니아를 여행하는 사람들, 더구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빠뜨릴 수 없는 피츠로이이기에 토레스 델 파이네부터 오며 가며 만난 사람들과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건넨다.


 칼라파테 호스텔에서 만났던 폴카도 자연스레 합류한다. 늦은 밤 소란스럽게 짐을 질질 끌며 호스텔 방 안에 나타났던 첫 만남은 생각만 해도 피식 웃음이 난다. 자려고 누웠다가 ‘왜 이렇게 시끄럽지?’하고 고개를 내밀었는데 어두컴컴한 방에 키가 천장에 닿을 듯 거대한 여행자 한 명이 자기 몸짓만 한 장비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헉, 저건 뭐지? 저렇게 크고 무거운 짐을 가지고 어떻게 여행하는 거야?’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 클라이밍 장비. 트렉킹과 클라이밍이 여행의 전부인 친구였다.


"잘 만났다, 폴카! 안 그래도 어제 호스텔에서 클라이밍을 하러 왔다는 다른 여행자를 만났거든!"


마침 바로 전날 호스텔 주방에서 밥을 하다가 클라이밍을 한다는 브랫을 만나 폴카가 떠올랐던 참이었다. 클라이밍은 동행이 있으면 하기 더 수월해서, 혼자 여행 중인 폴카는 만나는 사람마다 클라이밍에 관심이 없는지 묻고 다녔다. 따로 연락처를 나눈 것도 아니고 엘 찰텐에 언제 올지 알 수도 없었는데 피츠로이 가는 길에 이렇게 딱 마주치다니.


직업이 해안경비대인 이반은 운동선수 같은 체격의 폴카를 만나자 엄청난 속도로 걷기 시작한다. 산타크루즈에서는 나보다 느렸던 이반인데 해수면 레벨에 오니 이렇게 날아다니는 걸 보면 역시 고산 앞에서는 장사가 없나 보다. 정신없이 두 친구를 따라 숨을 헐떡거리며 돌산을 하나 넘고 나니 엄청난 산이 우리를 맞이한다.







아름다운 산과 호수와 빙하와 구름과 빛과 그림자. 몇 배속 촬영 영상처럼 구름이 자석에 이끌리듯 봉우리 주변을 맴돈다. 나 또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엄청난 흡입력. 우주의 다른 공간에 와있는 듯하다. 한시도 눈을 떼고 싶지 않은 피츠로이를 눈에 꾹꾹 담는다.







"우와... 평생 본 산 중에 가장 아름다워. 생애 최고의 산이야, 피츠로이."


여행지를 두고 '가장', '제일' 이런 말들로 순위를 매기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생애 최고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 풍경을 만나기 위해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래, 나는 여기에 오기 위해, 지구를 여행하기 위해 태어났을지도 몰라.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다니며 맘껏 즐겨주는 게 예의지. 온 우주가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고 있다는 아늑함에 휩싸여 표류하던 내 존재의 의미가 채워지고 있는 기분을 멋대로 만끽한다.







"정말 완벽한 하루야! 그렇지 않아?”


옆에서 이반이 외친다.


그치, 그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말. 인위적으로 절대 그려낼 수 없을 저 아름다운 실루엣 하며, 호수의 빛깔, 하얀 빙하와 구름의 그림자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 공기까지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때 호숫가 앞에 서 있는 브랫을 발견한다. 산행을 마치고 호스텔로 돌아가 브랫을 찾아 폴카에게 소개해주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브랫도 오늘 피츠로이에 와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인연이다, 인연. 폴카와 브랫은 서로 인사를 나누자마자 아이스 클라이밍 계획을 세우는데, 평소 클라이밍을 즐겨했다는 이반도 함께 하겠다고 한다.


다들 클라이밍을 하는구나. 우리도 진작 배워 놓을 걸! 새로운 세상을 만날수록 새롭게 배우고 싶은 것들이 늘어난다. 덕분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의 아쉬움이 덜할 것 같다. 배우고 싶은 것들을 천천히 익히고 다시 떠날 날을 기다리면 될 테니까. 또 다른 여행을 꿈꾸면서.










어쩌면 정말 모두에게 완벽했을지 모를 하루. 인생의 결정적인 타이밍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에 다가오고, 언제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른 뒤에 완성되는 법이다. 산이 준 선물 같은 친구들의 인연은 이후 북아메리카, 유럽, 아시아까지 이어지고, 3년의 시간이 흘러 이반과 브랫은 부부가 된다. 진짜 인연은 폴카와 브랫이 아니라 이반과 브랫이었던 것.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살고 있다.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 모두 어떻게 완성될지 알 수 없는 이야기의 여행자들이다.







“무지개 너머에는 보물이 있대. 무지개 너머에 어떤 보물이 있으면 좋겠어?”


형형색색 무지갯빛 가을로 뒤덮인 산길을 걸으며 그가 동화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음... 탕수육?”


정말이지 생각나는 거라곤 탕수육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사랑하는 이와 이토록 싱그러운 산내음 속에서 함께 걷고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나. 마음껏 웃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는 매 순간 살아있음을 느끼는 지금. ‘지금’이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흘러가는 이 순간을 붙잡고 싶을 만큼 가슴이 벅찬 것을.







바로 지금, 너와 함께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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