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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girl Oct 29. 2016

D173. 세상의 끝

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아르헨티나



세상의 끝
Fin del Mundo







여기가 세상의 끝이다, 아니다 말이 많지만 어쨌든 남미 대륙의 남쪽 끝에서 가장 큰 마을 우슈아이아에 와있다. 누군가 우슈아이아에는 토레스 델 파이네나 피츠로이 같은 엄청난 산도 없고 특별히 볼 것도 없는데 왜 가느냐고 했다.


그냥.

세상의 끝이니까.


애써 외면해온 남미와의 이별이 마냥 모른 척을 하기엔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다른 어느 곳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파타고니아가 무척이나 그리워질 것이라는 걸 알기에 가볼 수 있는 남쪽 끝까지, 파타고니아를 조금이라도 더 만나고 싶었다. 바다 앞에서 남극을 상상하며 남극에서 불어왔을지 모를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슬픔을 버리고 오는 등대




'남쪽으로!'를 외치며 6개월을 내려왔는데 이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남미 일정은 아직 남아있지만 나에겐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여기가 세상의 끝이 맞다.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세상의 끝.









상상과 달리 이곳의 바다는 남쪽을 향해 있지 않다. 한쪽은 동쪽, 다른 한쪽은 칠레를 향하고 있다. 그래도 남극을 오가는 배들이 좁은 동쪽 해협을 따라 항해한다고 하니 남극의 바람이라도 묻어 있으려나.











공기는 그 어느 곳보다도 차갑지만 여전히 푸른 산이 어울리는 풍경은 지금껏 지나온 파타고니아와 다르지 않다. 여행자들은 세상의 끝이라고 한껏 감상에 젖어있지만, 일상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평범한 바다 마을의 모습은 지구 여느 곳과 다를 바 없다. 언제나 하얀 겨울일 것만 같은 이곳도 가을. 그리고 다시 새로운 계절이 찾아올 테다. 내가 아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내가 모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살아간다는 건 이토록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나는 가장 먼 곳까지 날아와서야 인정하고 만다. 어쩌면 여행은 언제나 특별한 것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순간을 찾아내기 위해 떠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짝꿍에게 말했다. 때로는 당연한 것들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당연하다 느끼기 위해 하는 것이 여행인 것 같다고. 책과 화면으로 만나는 이야기로 만족하지 못하는 나는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직접 내 발로 그 자리에 서기 전까지는 그 당연한 것들을 깨닫지 못한다고.







평범한 마을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바람. 파타고니아에서 트렉킹 할 때 기다리던 바람은 여기 다 모여 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바람. 저가항공 비행기가 바람 때문에 날아오르지 못하고 거금을 들여 비행기를 탄 보람도 없이 결국 버스에 찌그러져 여기까지 오던 날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가볍게 동네 뒷산을 산책하다가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보고 나서야 아주 깜짝 놀란다. 누가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대로 땅에 바짝 엎드려 손에 닿는 대로 돌멩이와 풀을 부여잡는다. 그 와중에 짝꿍은 침을 뱉으면 바람을 따라 얼마나 멀리 날아가는지 보라며 참신한 광경을 안겨주시고.











바다사자는 갈라파고스에서 질리게 봐서 더 이상 신기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동네 바다사자는 진짜 사자처럼 머리도 크고 털도 많다. 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같은 얼굴로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니 어찌나 신기하던지. 짝꿍이 찍어놓은 사진들 덕분에 배꼽이 빠져라 웃는다. 남극은 다음 기회로 남겨두기로 했지만 막상 여기까지 오고 보니 남극의 펭귄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꽤나 아쉬운지 밤마다 꿈속에서 펭귄 친구들을 잔뜩 만나고 있다.







조금이라도 이곳의 공기를 더 담아가자며 밤바다에 산책을 나선다. 하루 종일 함께 하고도 자연스레 손을 잡고 나서는 밤마실이 지겹지 않으니, 우리 서로 꽤나 괜찮은 동행인가 보다. 서로 다르단 걸 새삼 느끼는 순간들이 계속되지만 그래서 재미나고 겸손해지는 이 여행. 파타고니아의 마지막 밤은 시리지만 그가 있어 따뜻하다.


떠나온 지 6개월. 문득 두려워지는 것들이 있다.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당연한 것들, 맑은 공기와 사람들의 여유로운 눈빛과 발걸음처럼 익숙해진 것들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 이후에도 여전히 내 삶 속에서 자연스러운 것들로 지켜질 수 있을까.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낯설게 받아들여질 세상, 그리고 모두가 당연하다고 하는 것들을 낯설어할 내 모습이 두렵다. 분명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니었는데 길 위의 시간이 쌓여갈수록 돌아가는 것이 점점 더 두려워지는 걸 보면,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애를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다 위에 커다란 보름달은 수년 전 이집트 밤바다에서 본 달을 닮아 있다. 언젠가 또 우리는 다른 장소에서 우슈아이아의 달빛을 함께 떠올리는 순간이 올까. 언젠가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었음을 함께 기억해줄 이가 있어서, 모든 감동과 두려움을 알아줄 이가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된다. 때로 기억보다 기억 너머의 감정이 더 정확하게 통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움을 공유할 수 있어 다행이다. 


오늘은 혼자가 아닌 둘이라 정말 다행이다.







안녕, 파타고니아.

안녕, 바람.

안녕,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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