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푸른 대지와 붉은 사막을 건너는 법, 북미 로드트립_미국
아름다움에 무뎌진다는 것. 어쩌면 이게 장기여행의 가장 큰 단점이자 슬픈 지점이 아닐까 싶다. 인터넷에 올린 사진에 친구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보고 짝꿍에게 물었다.
“이게 그렇게나 아름다워?”
미국의 자연은 모든 것이 큼직큼직하다. 너무도 거대해서 정작 그 앞에 서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눈 앞에 두고는 시큰둥하다가 차 안에 누워 그날 찍은 사진을 다시 넘겨보면서 어마어마한 길 위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바람도, 소리도 없고 빛과 그 모든 느낌의 반의 반도 담겨 있지 않은 사진을 보면서 말이다.
아름다운 것들을 너무 많이 봐버려서 무뎌진 거라고, 남미에서 너무 좋은 걸 많이 보고 와서 감동이 없는 거라고 우리끼리 말은 하지만, 어딘가 가고자 하면 버스 타고 한참을 달리고 또 한참을 걸으며 고생 아닌 고생을 감수해야 했던 남미에서는 그 후에 찾아오는 감동이 더 컸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디든 차로 쉽게 닿을 수 있는 미국의 국립공원들에서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차로 뷰포인트까지 가서 쓰윽 내려 쓰윽 보고 사진 찍고 다시 차로 이동해서 쓰윽 보면 끝. 남미였다면 어느 한 곳을 보기 위해 오며 가며 보내야 했을 며칠의 시간 동안 벌써 몇 개의 국립공원을 돌아보고 있는 건지.
결국 아름다움은 크고 화려한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에게 보이는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날들이다.
Grand Canyon
짝꿍이 가장 궁금해하던 그랜드 캐년은 "우와, 정말 크다!"만 몇 번 외치다 끝나버렸다. 오랜만에 사람들이 시끌벅적 만들어내는 소음 - 정확히 말하자면 60%의 중국어와 40%의 한국어 - 에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호젓한 자연을 느껴볼 새도 없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망치듯 인파를 뚫고 차로 돌아와 버리기 일쑤. 이렇게 차로 뷰포인트만 찍어가며 금방 돌아볼 줄 알았다면 2박 3일이 걸린다는 협곡 아래 트레킹이라도 해볼 걸. 언젠가 미국에 다시 돌아오면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자연 속 트레일 위주의 걷기 여행을 하자고 얘기를 하면서도 지금은 조금 더 따뜻한 캠핑장을 찾아 옮겨 다니기 바쁜 하루살이 신세를 벗어날 의지는 또 없다.
Horseshoe Bend
미리 예약해 둔 안텔롭 캐년 투어를 위해 거점도시 페이지(Page)에서 하루 쉬어가기로 한다. 분명히 쉬어가자고 캠핑장을 알아보러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어갔는데, 벽에 걸려 있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왓! 여긴 어떻게 가야 해?"
그 길로 바로 달려 간 홀스슈 밴드(Horseshoe Bend). 말발굽 모양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어제의 그랜드 캐년에 비하면 훨씬 작은 협곡인데 그 웅장함은 배로 다가오는 아이러니함.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풍경에 모처럼 마음이 설렌다.
홀스슈 밴드 덕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는데 캠핑장에 도착하니 이번엔 쌍무지개가 우릴 반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80달러짜리 미국 국립공원 연간 이용권 하나로 이 많은 국립공원과 캠핑장을 누비고 다닐 수 있다니 좋기는 좋다. 아직 캠핑을 하기에 쌀쌀한 날씨가 흠이라면 흠이지만 덕분에 캠핑장은 언제나 텅텅 비어 있다. 이 넓은 호수에 사람이라곤 우리 둘 뿐!
매일 추워서 밥 하자마자 후딱 차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먹어치우기 급급했는데 모처럼 밖에 앉아 여유로운 저녁 식사시간을 누려본다. 무지개가 사라진 자리에 은은한 일몰이 내려앉을 때까지 맥주를 홀짝이며.
Antelope Canyon
원주민 나바호족 가이드와 함께 1시간 반 정도의 투어로 돌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안텔롭의 upper canyon으로 향한다. 사진 찍기 좋은, 그러니까 빛이 잘 드는 시간대는 미리 예약을 해두는 것이 좋다. 가이드 말로는 2시는 개인적으로 빛이 너무 세고 사람이 너무 많아 12시가 더 좋다고 하는데, 12시를 택한 우리 좋으라고 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2시가 되니 좁은 협곡 안에 사람이 꽉 들어차서 앞으로 나아가기 버거울 정도가 되어버렸다.
이곳의 모래는 다른 곳과 달라서 물이 닿으면 쉽게 뭉쳐진다고 한다. 덕분에 그 모래들이 오랜 세월 바람과 비를 맞으며 지금과 같은 신비한 모래 미로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래와 물과 빛과 바람이 만들어낸 자연.
나는 예전부터 '자연'이라는 말과 그 의미가 참 좋았다. 스스로 자, 그럴 연. 스스로 그러한 것, 있는 그대로의 무엇. 봐도 봐도 새롭고 신기하고 나의 기대와 상상력을 뛰어넘는 자연들은 아직 만나지 못한 우리 안의 자연을 꿈꾸고 궁금하게 만든다.
Bryce Canyon
Zion Canyon
물어 물어 다니다 보니 미국의 3대 캐년이라는 그랜드 캐년, 브라이스 캐년, 그리고 자이언 캐년을 다 보고 있다. '몇 대 관광지' 이런 타이틀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몇 시간만 달려가면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혀 다른 모습의 협곡들이 나타나버리니 '과연!' 하며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는 하늘이 꾸물거리더니 우박이 쏟아졌는데 오늘은 다시 쨍하니 맑다. 하루에도 여름에서 다시 겨울, 또다시 여름을 오가는 이 변덕스럽고 모진 날씨를 견뎌온 이곳의 바위와 나무들은 오랜 시간 얼마나 고단했을까. 감자칩 하나 들고 자이언 캐년의 산책길을 걷다가, 문득 우릴 둘러싼 자연에 묻어나는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이런 엄청난 풍광을 앞에 두고 매번 남미와 비교나 해가며 이토록 무덤덤하게 지나가다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랄까. 기나긴 시간을 거쳐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어 고맙다고 토닥거리는단 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막과 협곡이 기뻐하려나.
익숙해진 아름다움을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리지는 않았는지. 미소 짓는 얼굴에 파인 주름처럼, 늘 곁에 있거나 오래된 크고 작은 아름다운 것들을. 언제나 나를 감싸 위로하던 거대한 자연을 왠지 안아주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