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푸른 대지와 붉은 사막을 건너는 법, 북미 로드트립_캐나다
과일 수확이 한창인 여름 시즌에는 일손이 부족한 농장에서 단기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캐나다의 체리농장지역으로 향했다. 예정에 없던 북미에서 여름을 기다린 이유. 경비를 조금 더 모아 여행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해보자는 생각 하나 때문이었다.
픽킹이 제일 먼저 시작된다는 마을에 도착했다. 농장을 돌며 무작정 다가가 일이 있는지 알아보는 무대포 정신이 필요하다. 둘 다 이런 것엔 소질이 없는 데다 아직은 본격적인 수확이 시작되기 전이라 쉽지 않은데, 가뜩이나 올해는 봄철 냉해로 과일 상태가 좋지 않아 수확량이 적다는 슬픈 소식을 여기까지 와서야 접하고 만다. 수확량이 적고 체리의 상태가 좋지 않아 초보 픽커를 고용하지 않으려 할 테니 우리 같은 초, 초, 초보픽커에게는 기회가 많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농장주인 인도 사람들은 일거리가 생길 테니 며칠 후에 와보라고 해놓고 정작 다시 찾아가면 자꾸만 말을 바꿨다. 어쩌다 하루 이틀 일할 곳을 찾아도 나무에 체리가 없으니 박스는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픽킹의 생명은 속도이거늘.
여행을 시작한 이래 가장 지루하고 힘든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미래가 기대된다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즐겁고 행복한 핑크빛 미래만 꿈꾸고 있었나 보다.
살면서 불확실한 경험을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이런 기다림에 익숙지도 않다. 남미를 여행하고 북미에 와서 배부른 나라 사람들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고 있다고 말하곤 했는데 남말 할 처지가 아니었구나. 생각해보면 삼십 년 남짓한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한다고 앉아서 보냈으니 무언가 간절히 바라며 노력하고 기다려본 적이나 있었나 싶다.
스스로를 돌아본다고 현실의 처참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노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되니 물가는 더욱 살벌하게 다가온다. 아껴보려고 공원 주차장에서 노숙도 해보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버틸 수만은 없는 노릇.
일하면서 밥은 제대로 해 먹자고 오는 길에 한인마트에서 먹을 걸 잔뜩 사 왔는데, 냉장고가 없으니 빨리 처리해야 하는 식재료들로 요리만 열심히 해댄다.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진수성찬이 웬 말이냐며 김밥을 말아먹는데, 오늘따라 호수 풍경은 왜 이리 야속하게 아름답기만 한지.
원치 않으면 언제든 계획을 바꿔 떠날 수 있지만 체리 픽킹을 위해 유럽행 비행기표도 바꾸고 그동안 여름을 기다리며 미국에서 보낸 시간과 들인 경비를 생각하니 쉽사리 포기할 수도 없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울고 싶다가도, 이런 경험 언제 또 해보겠냐며 여행자의 신분으로 애써 스스로 위로해보다가, 대체 우린 어떻게 이런 상황들을 생각도 안 해보고 그렇게 쉽게 낙관하고 결정하고 여기까지 온 건지 어이가 없어서 너털너털 웃어버린다.
You will benefit by being patient.
Good things will come to you soon.
포츈쿠키에서 나온 문구. 신기하다, 내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딱 맞추다니.
“참고 기다리면 좋은 일이 생길까?”
“좋은 일이 뭔데?”
“좋은 일이 돈밖에 더 있겠어?”
스스로 말해놓고도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놀라 소름이 돋았다. 저 멀리 밀어 놓았던 생각들이 기어코 드러나고야 만 것이다.
여기에서 여행비를 벌지 못하면 유럽부터 일정을 마구 줄여야 할지도 몰라. 유럽을 놓치면 기다리며 보낸 북미의 시간이 아까워지지 않을까? 이렇게 여행이 끝나버리면 억울해서 어쩌지?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좋은 일이 돈이라는, 내 입에서 나온 그 말.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돈을 벌러 오긴 했지만 나는 분명 여행 중이고 돈에 일희일비하며 이 시간을 보낼 순 없는데.
마음에 환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장기간 일할 농장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날씨가 우리 편이 아니다. 하루 건너 비가 내려 일을 할 수가 없다.
“슬로우 라이프를 즐기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야. 같은 농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심지어 뮤지션이니 얼마나 좋아.”
기타 치며 노래하는 이스라엘 친구 마가렛, 드럼도 치다가 밤이면 불쇼까지 보여주던 일본 친구 준타. 뮤지션은 아니지만 이 친구들을 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만나 농장까지 함께 와버렸다는 몬트리올 출신 프란시스와 그의 누나 마리. 픽커가 여섯 명뿐인 작은 농장. 생각해보면 언젠가 그와 함께 한 번쯤 꼭 해보고 싶었던 농장 생활이다. 혼자 유럽의 시골마을들을 여행하면서부터 품어온 꿈. 여름을 여기가 아니라 유럽에서 보내게 되었다면 스위스의 농장에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즐거움, 자연이 주는 수확의 달콤함. 모두 내가 원하던 것들 아닌가. 돈에서 자유로워지니(포기하고 나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농장 생활은 돈보다 시간을 버는 법을 가르쳐준다. 하늘이 뻥 뚫린 판자 더미 간이 샤워부스에서 쨍한 햇살을 맞으며 재빨리 땀과 선크림과 모기약을 씻어낼 시간, 산과 호수와 과일나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스르륵 낮잠에 빠져들 시간, 지금의 우리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시간, 그날 오후 가장 신선한 재료를 사와 가장 만족스러운 한 끼를 요리하고 나눠 먹는 저녁시간. 새벽부터 시작되고 태양이 과일을 뜨겁게 달구는 정오에 마무리지어야 하는 하루 일과 덕분에 오후는 모두 자유시간이다. 일을 마쳤는데 하루가 통째로 남아있다니! 해가 지고 나면 모닥불을 피우고 친구들 노랫소리를 듣는다. 밤이 되면 고요한 농장에 간간히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우리의 목소리만 남는다.
텅 빈 공간과 시간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 그동안 누구보다 자유로운 여행자라고 생각해왔지만 때론 여행자의 삶과 시야가 평소 추구하던 가치들을 가려버리기도 했다는 걸, 이곳에 와서 느낀다. 돈에 눈이 멀어 여기까지 왔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하지만 언제부턴가 여행하는 바로 이 순간보다 여행을 더 길게 지속하고 싶다는 욕심에 더 집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보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바로 앞 풍경과 옆사람의 눈빛보다 인터넷에 빠져있는 순간들이 더 많지는 않았던가. 아끼기 위해 캠핑을 한다면서 캠핑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한다는 핑계로 어쩌면 꼭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물건들로 차 안을 가득 채우고 있지는 않았는가.
“기존의 사회에서 벗어나 떠돌고 있는 우리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시스템에서 얼마나 자유롭다고 볼 수 있을까?”
누군가 말을 꺼냈다. 전처럼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다시 그 돈으로 소비하는 생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건 사실이지만, 결국 도시에서 벗어나 이렇게 집 없이 농장에서 텐트 치고 살아가더라도 마트에 나가서 먹을 것을 사와야 하고 잠깐이라도 카페에 가서 전자기기를 충전하고 인터넷을 하고 오는 우리는 기존의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여행자라는 이름 아래 마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냥 자유로움을 우쭐대진 않았는지, 부조리한 사회의 일들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어디까지 그래도 되는 것인지, 우리의 여행은 기존의 사회와 우리가 발 디딘 현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고민은 모닥불 앞에서 오래도록 이어졌다.
미국에 온 후부터는 참 많은 것들을 쉽게 채우고 또 쉽게 비워버렸다. 어딜 가나 대형마트가 종류별로 있고, 모든 것이 큼직하니 구경하기도 좋고, 한국보다 싸다는 생각에 물건을 손에 넣기도 수월했다. 얼마 전, 의류매장에서 3달러짜리 티셔츠를 발견하고 몇 개월만에 새 옷이냐며 기뻐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여기서 파는 이런 저가 옷들은 대부분 '메이드 인 동남아'. 3달러에 옷을 팔면 대체 저 멀리 캄보디아나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손에는 얼마가 쥐어지게 될까. 여행자의 작고 쉬운 3달러짜리 소비도 지구 어딘가 누군가의 희생을 거칠 수밖에 없다.
많은 것이 발달했고 세상은 서로 연결되었고 여행은 더욱 쉬워졌다. 덕분에 우리는 원한다면 훌쩍 떠나버리는 여행자의 신분을 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것 같은 여행자도 또 다른 세상, 어쩌면 자신이 떠나온 세상과 결국에는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나는 자유롭지만 나의 작은 행동이 만드는 물결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내가 먹는 음식, 내가 타는 자동차, 내가 타는 비행기, 그 모든 것에 어떤 책임이 있다는 것. 슬프지만 무거운,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이다.
미국보다 비싸면서도 모든지 더 작다고 불평했던 캐나다의 상점들이 달리 보인다. 이제 와서 보니 모든 것이 딱 필요한 만큼이었다. 필요한 크기, 필요한 만큼의 편의, 어쩌면 더 정당한 가격.
계절이 바뀌고 각자 지구 다른 곳으로 향한 뒤에도 우리는 이만큼 느리고 적게 쓰고 조금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준타와 마가렛은 아름다운 음악으로 세상을 빛내면서 새로운 음악을 배우러 떠나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까. 모두들 나이가 더 들어도 세상이 바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갈 수 있을까. 그러려면 세상의 틀과 거리를 둬야 할까, 틀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할까. 오래된 고민의 연장일 뿐, 새로운 답을 당장 얻을 순 없지만 손에서 이 멍들과 굳은살들이 사라지더라도 지금의 고민들을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멀리 볼 필요도 없이, 당장 농장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도 넘쳐나는 상품들 속에서도 필요한 만큼만 먹고 건강하게 소비하는 생활부터 실천해 나가자고.
그나저나 우리, 손만 뻗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딴 체리를 매일 디저트로 먹고 있으니, 이제 체리는 돈 주고는 못 사 먹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