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3. 먹고 캠핑하고 사랑하라, 유럽_아이슬란드
얼음의 땅 적응기
얼음의 땅과의 첫 만남은 모든 것이 충격이다. 충격적인 추위, 충격적인 물가, 충격적인 삭힌 상어의 맛.
여름 한가운데 칼바람에 놀라 일단 몸을 녹이자며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앉았는데 메뉴판 가격에 또 놀라고, 전통음식이라고 나온 삭힌 생선들의 시큼함에 다시 한 번 놀란 것이다. 10개월 만에 드디어 아메리카를 벗어나 유럽이라고 좋아했건만 오자마자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를 되뇌이다니. 유럽이라 말하기엔 낯선, 어딘가 홀로 동떨어진 외딴섬에 내린 기분이다. 단지 뉴욕에서 넘어오는 비행기표가 싸서, '8월의 여름날 어디든 텐트만 치면 잘 수 있겠지'라는 순진한 생각만으로 왔으니 당장의 이 추위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흐음, 이제 어디로 가지?
정신을 차리고 우리에게 전부인 지도 한 장을 펼쳐본다. 와이파이 빵빵 터지고 시간이 남아돌던 뉴욕에서는 아무것도 안 찾아보고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지. 목적지와 숙소만 찾아놓고 움직이던 남미, 캠핑을 시작하면서 숙소마저 찾아보지 않고 다니던 북미에서의 관성 그대로다. 가장 준비되지 않은 자세로 새로움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 장기여행자의 자세. 어쩌면 대책 없지만 덕분에 새로운 장소의 민낯을 만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작은 섬나라의 지도는 마을도 드문드문, 도로도 간결하기 그지없다. 아, 이거 하나 정말 마음에 든다. 이 충격적인 간결함!
가뜩이나 시차 적응까지 안 돼서 멍한 두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상황. 앞만 보고 쭉 달리면 되니 내비게이션도 필요하지 않다. 섬을 일주하기로 했으니 시계 방향이냐 반시계 방향이냐 어느 방향으로 돌지만 정하고 오늘은 적당한 캠핑장이 보이면 들어가 쉬기로 했다. 뭐 별 거 있나. 열흘 동안 이렇게 길 따라 달리다 들어가 자고 한 바퀴 돌아보면 되지! 지도 한 장에 마음이 훅 가벼워졌다.
캠핑 표지판만 보고 들어간 캠핑장 샤워장에서는 유황 냄새가 진하게 나는 온천수가 콸콸 쏟아진다. 밤이 되어 두 사람의 눈은 점점 감기는데, 우리의 그림자가 저만치 길어지는 시간이 와도 해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끈질긴 벌레들을 좇아내고 텐트 안에 눕고 나니 서로의 얼굴이 다 보일만큼 빛이 남아있는 밤.
말로만 듣던 백야다.
하얀 밤, 8월의 크리스마스 아니고 8월의 아이슬란드.
없다, 그래서 있다
시원한 폭포 소리와 함께 맞이하는 아침. 텐트 밖에는 푸른 언덕과 폭포, 그리고 소란스럽지 않은 사람들 몇몇이 있을 뿐이다.
아이슬란드에는 없는 것들이 참 많다.
우선 안과 밖을 나누는 담. 캠핑장이라고는 하나, 텐트 칠 곳을 나눠 놓은 경계도 없고 흔한 관리자 사무실조차 없다. 각자 알아서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으면 해가 질 때쯤 관리자가 나타나 캠핑 요금을 받고 다시 사라진다. 시설이라고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작은 화장실 하나. 최소한의 꼭 필요한 물만 떠다가 저녁을 해 먹고, 꼭 필요한 만큼의 물만으로 설거지를 마친다. 샤워실이 있지만 이용료가 만만치 않아서 꼭 필요한 사람만 요금을 내고 짧은 시간 내에 사용한다.
덕분에 드넓은 초원 위에서 인위적인 것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눈 앞을 가리는 것 없이 단지 푸름만 남아있다. 작은 먼지 하나 없고 귀를 피로하게 만드는 소음도 없다.
대신 이곳엔 다른 곳에 없는 것들이 있다.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모이고 모여 폭포가 되고 무지개 건너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그 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 지평선 끝, 하얀 세상은 바다도 구름도 아닌 거대한 빙하의 결을 보이는 엄청나게 멀고도 선명한 시야. 어딜 가나 우리를 따라오는 무지개.
넓고 푸른 평원을 유영하는 물줄기에서는 지구 어딘가 생명체들에 푸른 숨을 불어넣어주려는 듯 하얗게 빛이 난다. 말 그대로 대자연이다. 홀로 크고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여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품고 가는 대자연.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신이 바라는 것은 인간이 이 엄청난 자연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이 아닐까. 자연 속에서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 사람 또한 자연의 일부라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함께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대륙을 하나 건너니 어쩐지 끊임없이 떠나고 있는 이 긴 여행이 돌아가는 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여행 후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여행 전 삭막한 도시에서 나부터 주변을 살필 여유조차 없지 않았는지, 사람과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나는 계속 걷고 있는데 집이 가까워진다니 과연 지구는 둥글구나, 라는 엉뚱한 결론과 함께.
한눈에 들어오는 글씨로 큼직큼직하게 정리되어 있던 미국의 관광안내판과 달리, 아이슬란드의 안내지도들은 글씨도 작아 알아보기 힘들다. 지도는 흐리멍텅하고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처음에는 이런 게 무슨 안내판이냐고 웃었지만, 보면 볼수록 이곳 사람들이 자연을 대하는 자세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푸른 산 위로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은 한 줄의 트레일 뿐이니 사진이든 수채화든 길을 찾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은가. 날씨 운만 살짝 도와준다면 (비바람만 몰아치지 않는다면ㅠ) 정처 없이 걷고, 캠핑하며 여행하기 딱 좋은 곳이 바로 이곳, 아이슬란드다.
도시와 자연, 국립공원인 곳과 아닌 곳의 경계가 없는 것이 본래의 모습인데 담을 쌓고 선을 그어 놓은 경계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지금의 세상은 반대로 흘러가는 것이 너무나 많다.
나를 만나러 와요, 퍼핀 (Puffin)
아마존에서는 투칸을, 남쪽 끝에 가서는 펭귄을 만나고 싶다고 외치고 다녔는데 딱 그 둘을 섞어 놓은 듯한 얼굴의 주인공이 있으니 그 이름은 바로 퍼핀!
차가운 대서양, 그중에서도 아이슬란드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는 이 친구들. 얼굴 한번 보기 정말 힘들었던 투칸이나 쌩하니 미사일처럼 헤엄쳐가던 펭귄처럼 제대로나 볼 수 있을까 설렘 반 걱정 반 서식지를 찾았는데 너무나 쉽게 모습을 보여줘서 오히려 놀랐다. 원래 4월부터 9월까지가 섬에 와서 머무는 시기라고 하니, 이번만큼은 우리와 인연이 있나 보다.
안녕, 퍼핀!
주로 해안가 절벽에 서식한다는 퍼핀들은 햇볕을 쐬며 앉아있다가 바다로 날아가서 물고기를 물어오곤 한다. 앉아있을 때 도도한 모습과 달리 날개를 펴고 날아가면서 뒤뚱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우스꽝스러운지!
퍼핀들을 따라 시선을 옮겨 그제야 검은 바다의 매력을 알아차린다. 어쩐지 피리를 불고 싶어 지는, 사탕처럼 입 안에 넣고 요리조리 굴려보고 싶은 이곳의 이름은, 디르홀레이(Dyrhólaey).
하얀 것은 빙하요, 구름이요, 바다요
아이슬란드 하면 역시 빙하. 남미부터 빙하라면 지겨울 정도는 아니라도 놀라지 않을 만큼은 봐왔는데 이렇게 광활하고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빙하에는 입이 떡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산세는 또 어떠하며!
더구나 이렇게 많은 유빙을 가까이서 한눈에 보는 것은 처음이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던 아르헨티나의 모레노 빙하도 대단했지만 이렇게 맑은 하늘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눈부신 유빙 또한 특별하다. 비바람을 맞고 서 있던 모레노 빙하도, 밤 사이 텐트 안에서 추위에 덜덜 떨던 처량함은 잊고 마음까지 화창해지는 빙하의 추억을 새로 쓰는 순간이랄까.
8월의 여름날에도 새벽 온도는 영하로 뚝뚝 떨어진다. 해는 지지 않아 눈을 감아도 빛이 스미고 탁탁탁 텐트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뒤척이는 아이슬란드의 밤들. 언제나 기록으로 남는 밝고 따스한 순간들과 달리 정작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는 길고 어스름한 기억들이 있다. 비를 홀딱 맞으며 텐트를 치고 찬 바닥에 쪼그려 앉아 허겁지겁 밥 해 먹는 그런 기억들처럼.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줄까?
"응, 뭔데?"
"앞으로도 우린 캠핑을 3개월이나 더 해야 돼. 큭큭."
"음, 그래도 남쪽으로 가면 날씨는 훨씬 따뜻하지 않을까?"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그리며 현재의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짝꿍. 언제나 최선의 상황만을 가정하는 나.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걷는 과정은 서로를 닮아가기보다 서로의 차이를 더 뚜렷하게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인정해가는 과정. 오랜 시간을 함께 했어도 서로 다르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는 순간들이 있어 이 여행이 더 재미나고 겸손해진다. 덕분에 하루 종일을 함께 하고도 새롭게 이야기 나누고 싶은 것들이 샘솟으니까. 신이 우리에게 주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유머감각일 거라고 말하는 두 사람이지만 웃음 포인트만은 비슷해서 다행이다. 별 것 아닌 저런 농담에 웃고 웃길 수 있으니까. 어쩌면 이미 많은 점이 닮아있기에 가능한 걸까.
한적한 북쪽 마을에서 고래를 보고 나오니 고래를 닮은 산등성이 위로 꿈결 같은 구름과 무지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최대한의 먼 거리를 응시하며 자꾸만 서로에게 묻는다. 지평선 끝 저 하얀 것은 무엇이냐고. 구름인지, 파도인지, 얼음인지, 눈인지 분간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꾸 묻는 건 바람에 구름이 걷히고 나면 사라져 버리고 말 풍경에서 눈을 떼고 싶지 않은 이유일 게다.
푸른 초원과 검은 화산의 흔적과 빙하와 바다와 동물친구들까지, 마치 자연의 종합 선물세트 같은 이 섬. 아이슬란드, 너의 매력은 끝이 있기나 한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