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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15. 2024

나 그댈 위해 시 한 편을 쓰겠어
- 영화 <패터슨>

책 <영화처럼 산다면야> 동상이몽 제작일지 #16

동선 작가님이 얘기하자고  영화 중에 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 <시(詩)>가 있었어요. 아려서… 너무 저려 힘에 부칠 걸 알면서도 얘기하고팠는데 맘이 바뀐 동선 작가님이 저 바다 깊숙이. 서운했어요. 마음 자국 깊이 팬 영화라. 그렇다고 동선 작가님이 버린 걸 꺼내 와 얘기하자구 떼쓰기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좋아하는 맘이 너무 커다래서 쩔쩔매는. 비밀까진 아닌데, 쉽게 입에 올리기 싫은. 그런데 토해내지 않으면 가슴이 콱 막혀 숨이 쉬어지지 않을 것 같은. 어떻게든, 뭐라도, 뱉어야겠기에 고른 짐 자무쉬 감독이 만든 영화 <패터슨>. (그런데 저 바다 깊숙이 던진 영화 <시(詩)>를 건져와 다시, 얘길 하자던 동선 작가님. 그때 정말 기뻐서 깡총깡총!)


패터슨 시(市)에 사는 버스 운전기사 패터슨 씨의 일주일을 담아낸 영화 <패터슨>. 쌍둥이처럼 다르고도 같은, 같고도 다른 아침빛에 눈 뜬 패터슨 씨의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땡땡이 무늬를 사랑한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출근해 종일 버스를 몰면서 도시 구석구석 흩뿌려진 소리와 풍경, 그 틈새를 파고들어 다르고도 같음을 낚아채 시(詩)를 짓는 가느다랗고 더운 마음빛을 지닌 그가 젤 좋아한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지은 시(詩) <사과>….


오늘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의 별 볼 일 없는 이들

그 끔찍한 얼굴의

아름다움이

나를 흔들어 그리하라 하네


까무잡잡한 여인들,

일당 노동자들-

나이 들어 경험 많은-

푸르딩딩 늙은 떡갈나무  같은

얼굴을 하고선

옷을 벗어던지며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은우 선배 뒤꽁무니 쫄쫄 따라다니던 대학 신입생 시절, 어느 늦은 밤 주점.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인 선배가 보낸 눈짓. 툭툭, 무릎에 와닿던 딱딱함. 어? 촉촉한 선배 눈빛. 테이블 밑을 보니, 선배 손에 시집이. 냉큼. 이성복 시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왁자지껄한 주점에 확 끼얹어진 고요. 시집 한 권 들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어떤 세계로 훅 빨려 들어간 그때 그 밤. 아, 세상엔 이런 시(詩)도 있구나. 그때부터 황지우를 읽고 최승자를 읽고 복거일을 읽고 김수영을 읽고 허수경을 읽고. 로트레아몽을, 말라르메를, 발레리를, 바흐만을, 휠덜린을, 보들레를를. 기형도에 앓고 장정일에 앓고 백석에 앓고 보르헤르트에 앓고 베케트에 앓고. 속에서 밖으로 피는 것이 '유한화서(有限花序)'라면 성장 제한 없이 아래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시(詩)는 '무한화서'가 아니겠냐며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에서 거룩으로 나가는 게 시(詩)라던 이성복 시인이 한 말. 시인은 알몸으로 언어와 접촉하는 사람이에요. 시(詩)는 빗나가고 거스르는 데 있어요. 이를테면 '서재'와 '책' 대신 '서재'와 '팬티'를 연결하는 식이지요. 저는 썼어요. 영혼에 살갗이 없어요. 무엇… 어떤… 있어요, 늘 있어왔어요. 여기, 가슴, 그 언저리에. 안개 같기도, 달무리 같기도 한. 터지지 못한 화산 같은, 꽝꽝 언 얼음 같은 저만 아는, 온전히 느껴도 완벽히 설명할 수 없는*, 무수히 쌓아 올렸다 부순 세계가. 살갗 없는 영혼 그 어떤 보호막도 없이 부딪치고 쓸리고 까이고 두들겨 맞아 생긴 찡그림과 응어리와 피멍과 고름과 진물과 오르가슴과 펄쩍임과 까무라침의 마음밭. 그 땅에 피고 지고 피고 진 봉오리, 봉오리들.


얼마 전 선배한테 한 말. 선배, 난 여태 내가 미친 줄 알았는데, … 아니었나 봐! 이제 알이 좀 깨지려나 본데? 좋아! 계속 써. 세상 나오기 전부터아주아주 먼, 먼 옛날부터 시(詩)와 스치고 시(詩)와 손잡고 시(詩)와 뒹굴고 시(詩)와 얼싸안고 시(詩)와 딱 달라붙어 사랑하고 시(詩)와 바람나고 시(詩)와 다투고 시(詩)와 찔찔 짜고… 시(詩)를 읽지도 짓지도 않았는데, 온통 시(詩). 비도 하늘도 구름도 달빛도 햇살도 이끼도 잎새도 꽃잎도 바람도 노을도 싹 다, 온 데 다, 시(詩). 시로 화(化)한, 시(詩)에 담근 모든 숨 모든 몸짓. 모든 섦과 꿇음.

알고 보니, 여름의 아이였던. 유월의.


별일 있겠냐며 혼자 병원 간 날, 벌겋게 달아오른 수술 부위를 본 주치의가 한 말. 재발인데? 그러곤 간호사한테 화난 목소리로. 응급 초음파 잡아. 얼마 뒤, 더는 해줄 없다며 짐짝처럼 종양내과에 버린. 그때 생긴 트라우마. 혼자 가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겨. 절대 혼자선 안 갈 거야. 여름이었어요. 돌아보니, 삶의 마디가 꺾이고 휜 계절은 죄 여름. 좋고 나쁨은 없어요. 사랑은 배신이고 고통은 환희, 낯빛 하나 안 변하는 말바꿈은 살아있음의 증거. 안주는 탈주의 시작. 끝과 시작의 입맞춤, 그 맞물림. 저주이자 경배, 환대이자 홀대인 삶의 마디, 마디들. 그 꺾임과 휨. 중요한 건 울림. … 울림이었어요. 어떻게 해도 그치지 않던 종소리, 막무가내로 뻗어나가던 빛무리.



"내 얘기 써도 돼." 밥 먹다 말고 누구한테랄 것도 없는 언니 말. 밑도 끝도 없이. 기억엔 없어도 그전에 오갔을 말을 유추해 보자면, 고3이 얼마 안 남은 내 진로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나. 꼭 뭐가 돼야지, 하진 않았어도 막연하게 쓰고 싶어 하는 걸 눈치챘을 언니. 언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언니를 흘겨보면서 고개 돌리는 엄마. 배꼽 언저리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온 덩어리가 목구멍을, 콱. 밥그릇에 눈을 고정하고 센 밥알. 한 알, 두 알, 세 알…. "글 써선 밥 못 먹어." 엄마 입에서 기어이 나온 그 말. 넷, 다섯, 여섯…. 글로는 저 밥알을 살 수도 먹을 수도 없구나. 셀 수도. (이연, <영화처럼 산다면야>)


재작년 가을, 주말이면 자기 집 앞에 산을 두고 지하철을 타고 울 동네까지 와서 나랑 산에 다닌 울 언니. 단풍 물든 가을산, 햇살 내려앉은 알록달록 잎새 흔들던 그때 우리 웃음소리. 난 너랑 노는 게 젤 재밌어. 어릴 적 내 인형놀이 유일한 관객, 울 언니. 그 가을 산길을 걸으면서 언니가 한 말. 어릴 적 살던 동네 가보고 싶어. 왜? 거기 두고 온 나랑 만나고 싶어. 가자, 언니. 처마밑에 쪼그려 앉은 그때 그 지지배 만나러. 가서 안아주고 오자, 어? 미친 듯 써재끼는 날 보고 언젠가 은사님이 한 말. 널 보면 사람은 결국 돌아가는 거 같어. 자기가 난 데로. 그 말에 떠오른 팔딱이는 거스름. 그 찬 몸짓에 부르르.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흔히 '이발소 달력'이라고 불리는 캘린더 종이를 뜯어서 어떨 때는 트레이싱 페이퍼로 어떨 때는 먹지로 사용하며 그림을 그렸었죠. 그러다 어느 순간 달력 종이가 필요 없게 되었고, 교과서 여백에 선생님들 얼굴을 만화처럼 그려서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기도 했었죠. 저도 제 그림을 좋아했고 말이죠. 그런데 이런 손재주가 있으면 아주 어릴 적엔 부모님들께 칭찬을 듣기도 하지만 좀 크고 나서는 걱정거리가 되고는 해요. 제가 자란 동네에서는 자식의 재능을 서포트해 주지 못할 게 뻔한 가정 형편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눈치만 빼꼼했던 전 애초에 미술 공부하는 걸 포기했지만요. (동선, <영화처럼 산다면야> 중에서)


언젠가 동선 작가님이랑 주고받은 말. 동선 작가님은 탐험가, 저는 관찰자라는. 쓰고 쓰고 또 쓰다 어릴 적 '나'를 발굴한 우리 두 사람. 요즘 드는 생각. 사람은 저마다의 고고학자가 돼야 하지 않을까. 자신을 들이파고 들이파고 들이파는. 뭐가 나올지는 몰라도 뭐라도, 뭐든 나올 때까지. 잃어버리고 놓친 '나'를 만나고 나서 관찰자가 되고 탐험가가 되어야. 타인과 세상을 향해 뻗은 손 그러쥐고 팔짱 끼고 팔 두르는.


요즘 저는… 편파적이고 싶어요. 어떤 무리엔 무조건적으로 편들고 싶어요. 그러니까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볼 수 없는 이들의 눈이 되어주고 만질 수 없는 이들이 손이 되어주고…. 나한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는 몰라도, 자꾸만 기울어요. 한쪽으로 쏟아지는 마음. (이연, <영화처럼 산다면야> 중에서)


(詩)는 뭘까요? 맨날 천 날 시(詩)에 폭 젖어 뛰놀았는데… 그런 것 같은데두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거라곤 편듦과 역성듦. 세상이 거들떠보지 않는 어떤 내리막과 막다름, 저묾과 스러짐, 밀침과 내동댕이침에 대한. 어둔 데를 비추임. 보잘것없고 희미할지언정.


이성복 시인이 한 말. 영화 <롱쉽(The Long Ships)>에 나오는 얘기예요. 황금종을 찾으려고 섬을 파헤치던 사람들이 마침내 포기하고 곡괭이를 내던지자 종소리가 울려 퍼져요. 섬 전체가 종이었던 거지요. 곡괭이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 곡괭이의 전혀 다른 기능이 살아나는 거예요. 언어의 시적 사용도 그런 것 아닐까 해요.



동선 작가님 그림을 보고도 책에 실으려고 한 배짱이라. 글쎄요. 이성복 시인이 한 말. 시(詩)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철학자 박구용이 한 말. 이쁜 건 예술이 아니에요. 장식이죠. 현대는 심미화되었어요. 이쁜 게 널리고 널린 세상이에요. 현대 예술의 특징은 불편함이에요. 시인은커녕 작가도 뭣도 아닌 제가 쓰는 글나부랭이가 적어도 장식은 아니었으면 동선 작가님 그림처럼. 누가 봐도 이쁘지 않은, 불편하게 보였을 동선 작가님 그림이 제 눈엔 그 어떤 그림보다 아름다웠어서. 그림을 보자마자 제 안에 울리던 종소리가… 지금도 들려와요. 동선 작가님 그림 볼 적마다 우는 건 그래서.


'일어서서 걸으라! 그대의 뼈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으니'

(잉게보르크 바흐만, <삼십 세> 중에서)

'날개야 다시 돋아라, …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이상, <날개> 중에서)


부러진 두 다리에 힘 실어주고 꺾인 날개 다시, 펴게… 그럴 엄두 나게 해 준 봄날의 김진해 교수님 글. 

(거듭 감사합니다, 가슴 깊이.) 

더 높이 더 먼 데로 날아가고픈… 바람등에 올라탄 검은 새 한 마리.


<영화처럼 산다면야>… 

우리 메아리가 오래, 깊게, 울리기를.


이 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이 여름이.


'내 얘기 써도 돼"...라고 한, 언니랑 나 어릴 적. 언젠가 언니만의 고고학자가 되어 그때 그 '아이' 만나, 언니.




글 제목은 케이시의 노래 '나 그댈 위해 시 한 편을 쓰겠어'에서 인용했어요. '*'는 나탈리 레제의 <말 없는 삶>에서 인용 변주한 문장이고, 그림은 동선 작가님이 저 어릴 적 사진 보고 그려준 거예요. 보고 있으면 곰방 조 지지배가 되어 뚝뚝, 눈물 듣는. 보고만 있어도. 보고만.




알림.

2024년 8월 24일 아침 열한 시, 서울 시민청 동그리미방에서 영화책 <영화처럼 산다면야>의 출판기념회가 조촐하게 열릴 예정이에요. 진행은 폴폴 작가님이 흔쾌히 맡아주시기로 했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저는 현장에서, 캐나다에 계시는 동선 작가님은 줌으로 참석해요. 


짱짱한 낮엔 매미가, 이슥한 밤이면 귀뚜라미 울어대는 여름 끝자락.

계절의 문지방 잘 넘어가시길요. 오늘도 좋은 날이요!

(아래 초대장은 정식 초대장은 아니고 이달을 끝으로 꼬박 6년 함께한 북큐레이션 떠나면서 마지막 포스터랑 현수막 만들다 괜히, 그냥, 만들어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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