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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17. 2024

당신은 있었습니까

시(詩) <나는 좋아요…>, 마리나 쯔베따예바

말줄임표였어요.

똑똑똑, 공중부양하듯 허공에 찍힌 동그랗고 나란한 검은 점 세 개.

그 어떤 문장보다 많은 말을 응축하고 있어 폭발력이 어마어마해 뵈는 그 문장 기호가 저를 화악, 잡아챘어요. 또 다른 하나는, 이름. 말줄임표를 즐겨 쓰는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씩씩하고도 은밀한 목소릴 들었어요. 황량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고 긴 메아리를 타고 하늘로 떠오르는 어떤 이름.


제 글엔 문제가 많았어요.

처음 시작은 '조사'였어요. 말과 말을 잇거나 뜻을 덧대준다는 '조사'의 감쪽같은 증발. 뭘 몰라서 그러기도 했을 테지만, 부러 그랬나 싶기도 해요. 그때 저는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았고 제 삶에 무엇도 보태고 싶지 않았거든요. 뚝, 뚝, 끊기고 훌훌 헐거워져 죽자, 흩어져버리고 말자. 원고를 넘기고 조사를 어떡할 거냔 말에 냅두랬어요. 부서진 채로 옮겨갔으믄 해. 읽는 이한테 내 속이 고대로 들어앉길 바랐달까. 지금보다 더 천둥벌거숭이였던 그땐 여기말고, 다른 모르는 세계에 속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나 이율배반적이었어요, 그때 저는.


지난봄엔 '말줄임표'가 말썽이었어요. 아, '도치'를 깜빡했네요. 내내 지적당하던. 그러고 보면 저는, 제 삶은 '끊기'와 '잃기', '앓기'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바탕에 비극을 깔고. 설익고 쉰내나는 말은 똘똘 뭉치더니 '말줄임표'로 또르르, 도망갔어요. 한 번도 본 적 없고, 골백 번도 더 본, 있고도 없는, 탄생하자마자 멸망한 세계로. 거기선 모든 게 뒤죽박죽, 제멋대로였어요. 시간도, 장소도, 인연도, 앎도, 당신도, 나도. 온통 '도치'투성이. 그 누구와도 이어지지 못하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저는 텅 비고 뚝뚝 끊겨, 외따로, 대롱대롱, 오래, 자주, 떨었어요. 더 게워낼 게 없어, 덜덜, 떨기만.


오래 잠겨있던 것들이 있어요.

차마 부를 수 없는 이름이라든가,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든가, 부질없는 그리움이든가.

그러니까 황정은 소설 <대니 드비토> 속 이름 같은. 유도. …. 유라. …. 부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누군가의 이름, 입을 벙긋거려도 공기를 흔들지 못하고 어쩌다 운이 좋아 고막을 떨리게 한들 텅 빈. 그런 이름 하나 꼬옥 쥐고서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거리를 걷다 돌아와 주방에 나란히 서서 음식을 만들고 식탁에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을 보며 밥을 먹고 서로의 몸 위로 솟구쳤다 포개지는 걸 보고도 떠나지 못하는 그 마음에 잠겨있었어요. 천장에 달라붙어 있거나 벽지 위를 흐르면서 목구멍 안으로 이름을 밀어 넣는 그 마음은 어떤 걸까. 그리고 영화 <고스트 스토리> 속 C의 기다림, 혹은 그리움. 죽은 연인과 살던 집을 떠나며 문틀 사이에 쪽지를 끼워 넣고 떠난 여자. 그녀가 남긴 쪽지를 읽으려고 연인의 전생과 미래를 샅샅이 뒤지고 탈탈 털고 돌아와 창가에 선 꼬질꼬질한 마음에도 오래 잠겨있었어요. 다시, 온다는 약속은커녕 그럴 기미조차 없는 걸 뻔히 알면서, 아니, 도리질하면서 한사코 연인이 남긴 문장을 읽으려는 그 마음은 뭘까. 저쪽에선 듣지도 못할 그깟 이름 하나 부르려고, 정작 쓴 사람은 기억도 못할 꼴랑 쪽지 한 장 읽겠다고, 대체 왜들 이러나.


며칠 전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날. 저는 봤어요. 아니, 들었어요.

말줄임표 속으로 꼬깃꼬깃 말을 숨기는 어떤 이가 속삭인 또박또박한 마음을.


아흐마또바에게.


목이 잠기게, 침이 마를 때까지,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를 수밖에 없는. 가닿을 데가 없어, 메아리로 돌아온대도, 불러야 하는. 어떤 보상이나 대가 없이도, 그런 거랑은 머언, 찬양과 경배, 은총 가까이에.


어떤 것들은 규칙과 질서, 윤리와 상식을 거스르고 태어나 피어요. 세상과 닿으려고 더듬이를 뻗쳐요. 잇고자, 연결되고파, 오직 그러려고. 그 마음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당신은 알까요.


그저께 밤엔 꿈을 꿨어요.

비가 내리는 강가를 우산을 받쳐 들고 걷고 있는데, 저 앞에 대추나무가 보였어요.

붉은 대추알이, 주렁주렁 매달린 가지가, 척척, 검은 강물에, 닿을락 말락.

젖은 팔뚝을 들어 뚝뚝, 듣는 가지를 들어 올리고는 빗속을 내처 걸었어요.

서로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의 허리에 가지를 두르고서.


꿈에서 깨니 붉은 빗소리가….



나는 좋아요

- 마리나 쯔베따예바


나는 좋아요

당신이 나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기에

나는 좋아요

내가 당신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기에

단단한 대지가 결코

우리의 발아래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좋아요

웃기는 여자가 될 수 있고

방탕한 여자가 될 수 있고

말장난도 하지 않고

소맷부리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숨 막히는 파도처럼 얼굴 붉히지 않을 수 있어서.


나는 더욱 좋아요

내가 보는 앞에서

당신이 평화롭게 다른 여인을 포옹하고

내가 입맞춤을 거부해도

지옥의 화염으로 나를 저주하지 않고

나의 부드러운 이름을 밤이고 낮이고

다정한 당신이 헛되이 부르지 않기에

사람들은 성당의 정적 속에서

우리를 위한 할렐루야를 절대로 노래하지 않을 것이기에.


몸과 마음으로

당신께 감사드려요

이유도 모르는 채 그토록 나를 사랑함에

밤이면 찾아드는 내 마음의 평화에

점차 사라져 가는 석양의 만남에

우리가 달밤에 산책하지 않음에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빛나지 않는

태양에-

당신이 - 안타깝게도! - 나도 인해 괴로워하지 않음에

내가 - 안타깝게도! - 당신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음에



글 제목은 이규리 시인의 시(詩) <얼음>에서 인용했어요. 사진은 지난여름, 한낮 뙤약볕 속을 걷다 인사동 어느 골목에서 만난.


알림.


슬슬, 오래 알아가자는 수필버거 작가님과의 인연은 좀, 됐어요.

그분이 말하는 인연은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거기, 있는 거래요.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거기에.


오늘도 좋은 날이요, 여기 당신, 당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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