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극의 쉐프>
폴폴 작가님, 동선 작가님이랑 하고 있는 영화 팟캐스트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 지난 방송에서 함께 이야기한 영화는 폴폴 작가님이 추천한 이명세 감독의 영화 <첫사랑>이었어요. 아기자기한 소품과 이명세 감독 특유의 연출을 따라가다 보니 간질간질 풋내 나는 감정에 퐁당 빠져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다 삼키지 못해 그다음 영화로 뭘 고를까, 한참을 고민했어요. 그러다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어요. 식욕과 성욕, 수면욕에 대해. 그중에서도 식욕과 성욕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너무 진지하거나 무거운 건 싫어서 '음식'으로 가볍게 접근하려고 했어요. 저희 단톡방만해도 먹는 얘기가 7할 이상이고 사람들을 만나도, 여행을 가도, SNS나 각종 미디어를 도배하는 것도 음식이 주 소재이기도 해서. 물론 그런 현상이 좋다거나 옳다거나 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지만, 어쨌든. (실은 오래전부터) 궁금했어요. 왜 어떤 욕망은 환하게 드러내도 괜찮고 어떤 욕망은 숨기는 것도 모자라 드러내면 점잖지 못하단 푸대접에 걸핏하면 '변태'라는 누명 아닌 누명을 쓰는지. 그런 면에서 비교적 편견 없이 다가가고 표현하려고 한 감독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라고 생각해서 영화 <아이 엠 러브>를 보고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하고 있던 참에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를 하고 싶다니까 폴폴 작가님이 영화 <남극의 쉐프>를 추천했어요. 그 영화가 원래 하려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아이 엠 러브>만큼 좋기도 했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길 부담스럽지 않게 녹여내서 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기로 했어요.
어느 날인가, 유튜브에 올라온 몽골 탐사를 다녀온 이의 이야길 들은 적이 있어요.
너른 들판엔 게르 밖에 없어 오줌이고 똥이고 사람 눈을 피해 아무 데서나 해결할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엔 굉장히 어색하고 어쩔 줄 몰랐는데 여정이 계속되면서 어느 순간 뻥 뚫린 하늘을 바라보면서 들판에서 오줌을 누는데 일종의 해방감 같은 게 느껴지면서 비로소 자연과 하나란 생각이 들더래요. 아,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구나. 그 뒷말이 더 인상적이었는데요, 여기선 이렇게 자연스러운 배설 행위를 만약 도시 한복판에서 했다면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았겠냐는. …… 그 말이 오래 남았어요.
꽤 오래, 능소화를 보고도 능소화인 줄 모르고 지나쳤을 거예요. 그러다 젤 첨으로 능소화를 인지한 건 비가 쏟아지던 올림픽 도로 방음벽에 매달려 난폭하게 뭉개지던 주황빛을 본 날이었어요. 저 꽃, 저기… 저 주황꽃, 뭐야? 한 번 눈에 들어오니 그 해 여름은 온 데 다 주황빛이었어요. 짓이겨지고 뭉크러져 흥건한….
그러다 어느 여름, 신호등 앞에서 호박잎 팔던 노파 곁에 쪼그려 앉아 호박잎 두 봉다리를 사서 신나게 횡단보도를 건너 김밥집엘 갔어요. 막 말아준 김밥을 받아 들고는 마땅히 먹을 곳이 없어 길을 따라 걷다 능소화 늘어진 담벼락 앞 벤치를 발견하고 함박 웃음을 마주 보며 포장지를 뜯었어요. 그날 눈앞으로 차가 씽씽 지나고, 신호등 불빛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이 건너오고 건너가는 횡단보도 앞 벤치, 등 뒤로 능소화가 늘어진 담벼락을 병풍처럼 두르고서, 세상 젤 맛있는 김밥을 먹었어요. 그 날 능소화는 다시, 피어났어요. 그때 그 여름하고 같고도 다른 주황빛으로. 같고도 다른 물기로.
엄마는 손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어릴 적 집에 있는 전자 제품이며 가구 위에 엄마가 손뜨게로 만든 덮개가 생각나요. 저는 철마다 바뀌며 먼지가 쌓이는 것도 막고 가구에 생기를 불어넣던 전자레인지 덮개, 소파 덮개, 피아노 덮개, 식탁 덮개를 사랑했어요. 거기, 덮개 속에 엄마가 코바늘로 숨겨 놓은 공주랑 왕자 이야기를. 서울 상경해서 분식집을 했던 엄마는 밀가루 한 봉다리만 있으면 국수도, 만두도, 수제비도 뚝딱, 만들었어요. 여름이면 엄마가 만들어준 콩국수랑 냉면을 자주 먹었어요. 잔치국수를 삶는 날이면 대야보다 큰 양푼에 삶아낸 기다랗고 하얀 국수 가닥을 보고 이걸 누가 다 먹냐고 놀랐다가 순식간에 그 많은 국수가 사라져서 더 놀라곤 했어요. 여름이면 부러 친구를 불러다 엄마 냉면을 자랑했어요. 어때, 맛있지? 엄마, 봐봐. 얘네들도 맛있다잖아. 냉면집 해라. 선뜩선뜩, 찬바람 불어올라치면 둥그렇게 치댄 반죽을 척척 접어 서걱서걱, 썰어 된장 풀어 해주던 장칼국수. 찬바람 씽씽 부는 겨울이면 시도 때도 없이 해 먹던 우리 집 별미, 엄마표 김치만두. 저한테 국수랑 냉면, 만두는 배가 불러도, 배가 터지도록, 꾹꾹 다지면서 먹는 음식이에요. 항암약 때문에 입맛이 싹 달아난 지금도 절대 남기지 않는. 더는 외할머니 만두를 먹을 수 없어 어쩐지 서운한 설날, 우리 집 애들은 제 입맛에 꼭 맞는 만두를 만나면 이렇게 외쳐요. 이 만두, 할머니 만두랑 똑같다! 수제비가, 만두가, 국수가… 엄마가 만들어줬던 그 모든 밀가루 음식이, 울 엄마 손목을 비틀고 속을 쓰리게 한, 눈물이었단 건 한참 후에나 알았어요.
어릴 적 오후나절이 생각나요.
학교가 파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는데, 햇살 비켜 들어오는 거실 바닥에 신문지가 좌악 깔려있고 그 위로 밀가루 봉다리랑 큼지막한 도마, 반들반들한 홍두깨가 보이면서 허공을 떠다니는 하얀 분가루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던. 엄마, 뭐 하게?
한 떨기 능소화에, 한 알의 만두에 이렇게나 많은 정경과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새순 돋는 노오란 봄날입니다. 연둣빛 사이로 그때 그 주황빛이, 흰 분가루가 일렁이는 아지랑이 사이로 나리는….
능소화
- 김선우
꽃 피우기 좋은 계절 앙다물어 보내놓고 당신이나 나나 참 왜 이리 더디 늙는지 독하기로는 당신이 나보다 더한 셈 꽃시절 지날 동안 당신은 깊이깊이 대궁 속으로만 찾아들어 나팔관 지나고 자궁을 거슬러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운명을 찾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죽이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다 그러다 염천을 딱! 만난 것인데 이글거리는 밀납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처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능소(凌霄)야 능소야, 모루에 올려진 시뻘건 쇳덩어리 찌챙찌챙 두드려 소리를 깨우고 갓 깨워놓은 소리가 하늘을 태울라 찌챙찌챙 담그고 두드려 울음을 잡는 장이처럼이야 쇠의 호흡 따라 뭉친 소리 풀어주고 성근 소리 묶어주며 깨워놓은 소리 다듬어내는 장이처럼이야 아니되어도 능소야 능소야, 염천을 능멸하며 제 몸의 소리 스스로 깨뜨려 고수레-- 던져올리는 사잣밥처럼 뭉텅뭉텅 햇살 베어 선연한 주홍빛 속내로만 오는 꽃대궁 속 나팔관을 지나고 자궁을 가로질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는 당신 타는 울음 들어낼 귀가 딱 한순간은 어두운 내게도 오는 법, 덩굴 마디마다 못을 치며 당신이 염천 아래 자꾸만 아기 울음소리로 번져갈 때 나는 듣고 있었던 거라 향기마저 봉인하여 끌어안고 꽃받침째 툭, 툭, 떨어져내리는 붉디붉은 징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