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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췄어

영화 <룸 넥스트 도어>

by 여름

옥탑방이 있었어.

고동색 현관문을 열고 거실을 지나 원형 식탁이 놓인 부엌, 싱크대 옆으로 난 문을 열고 나와 슬리퍼를 신고 난간 없는 계단을 올라오면 거기, 노랗고 커다란 물탱크 옆에.


다섯 식구 단칸 셋방살이하던 어느 저녁, 밥상에 앉아 밥은 안 먹고 큰맘 먹고 사온 소고기 들어가는 삼 남매 입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부지를 가만 보던 막둥이가 질겅질겅 고기를 씹으면서 아부지한테 쏘아붙였어. 이딴 거 먹으면 언제 우리 집 사? 그 말이 목에 걸린 아부지는 이 악 물고 돈을 벌었대. 이듬해인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막둥이는 학교만 갔다 오면 멀다고 징징거리고. 국민학교 2학년 올라가던 해에 이사한 집은 까먹은 게 있으면 후딱 뛰어가서 가져올 정도로 국민학교랑 가까워서 아부지는 쫄랑쫄랑 책가방 메고 들락거리는 나만 봤다 하면 울 찡얼이 학교는 '엎어지면 코 닿겠다'며 커다란 배를 출렁거리며 너스레를 떨었어. 아부지 생일이면 겹벚꽃이랑 자목련 피던 그 집에서 대학 1학년까지 살았어. 지금도 길 잃은 꿈결이면 겹벚꽃 피고 지던 그 집 화단 앞에, 배 깔고 엎드려 우체통 바라보던 방바닥에, 어둔 밤 혼자 나와 헤드폰 끼고 음악 듣던 거실 한 귀퉁이에, 마당에서 빨래하던 엄마 등 바라보던 베란다 난간에, 비 맞은 몸 담그던 욕조에, 봄이면 쪼그려 앉아 노오란 바람 좇던 대문에, 엄마 뒤꽁무니 따라 올라와 빨랫줄 뒤에 숨어 속엣말 편지 쓰던 옥상에, 대문 활짝 열어놓고 뛰놀던 골목 어귀에… 있어. 거기서 냄새 맡고 소리 듣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빛을 보다, 와. 살아있는 것들이 허공으로 발산하는 냄새랑 찰랑대는 소리, 빛과 그림자가 침묵으로 거는 말을, 그저 봐. 그 모든 살아있음의 증명을 보다가 온 줄도 모르게, 와. 그 집을 떠나 새로 살 집을 지을 때만 해도 설마 하니 옥상에 누가 살겠나, 했나 봐. 그랬으니까 짠돌이 아부지가 전기보일러를 놨겠지. 근데 삶은 늘 예측을 빗나가잖아. 처음엔 언니가, 언니가 떠나고는 내가 살았어. 언니는 그 방에서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나는 안온했어. 한겨울이면 오리털 파카를 껴입고도 입김이 나오는, 벽지에 이국의 홍차향 밴 그 옥탑방은 자궁이었어. 온 세포가 감각, 전적으로 느낌인 날 낳은.


그 방의 BGM은 타닥타닥, 전동 타자기의 튕김과 울림이었고 밑그림은 커튼 대신 남쪽창에 물구나무로 서서 한낮의 태양을 끌고 세계의 반대쪽으로 말라가는 꽃다발 문양이었어. 끈끈한 밤거리를 걸어와 아침이면 허리께부터 반투명 유리창으로 밀물처럼 들이닥치던 아침해를 함께 듣던 목소리가 있던 여름과 밤이면 고막에 부딪치던 파도 소리를 숨긴 겨울이 있던 그 방엔 유령처럼 떠도는 부글거림과 불면의 충혈도 있었어. 빈 종이 위로 번지는 서툰 잉크짓과 땡볕에도 마르지 않는 기다림과 펼치다 만 꿈도. 그리고 젖은 케이크도. 옥탑방이 있던 옥상 한켠엔 고추장, 된장, 간장을 품은 크고 작은 항아리가 있었고, 제법 널따란 옥상 마당엔 낮은 담을 따라 울 엄마 눈물 받아먹고 자라는 색색의 꽃들이 화분에 심겨 있었어. 그 화분 옆으론 고추며 가지며 상추며 토마토가 심긴 사각 스티로폼이 열 맞춰 있었고. 정수리로 해가 뜨거운 입김을 토하는 한여름이면 그것들이 얼마나 무섭게 자라고 얼마나 성화를 해대는지.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는데도 시들어가는 그악스러움에 치가 떨렸어. 지금에서야 살아있음과 그 치 떨리던 생명력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 그리고 뒤늦게 또, 알았어. 밸런타인데이의 악몽이 그 옥탑방에서 시작됐다는 걸. 고백이 내 삶의 걸림돌이 된 건 그 방에서부터였단 걸. 모든 이에게 허락된 초콜릿이, 나에게만 설움으로 되돌아와, 모든 이가 반긴다는 그 검은 유혹을, 그 단맛을, 경계하고 밀쳐냈어.


어느 여름밤, 비가 쏟아졌어. 죽죽, 비의 선들이, 옥상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어. 창문 너머로 어둠의 목을 따는 비를… 비가 그리는 아름다운 선을 봤어. 보고 있었어. 옷을 벗었어. 하나, 하나, 또 하나. 브라랑 팬티만 남기고 방 스위치를 끄고 밖으로 나갔어. 정수리로, 이마로, 콧잔등으로, 어깻죽지로 떨어지는 비, 비, 비…. 이마에 떨어진 비는 목을 지나 가슴골을 따라 배꼽에 고이는가 싶더니 허벅지를 타고 종아리를 훑으며 발등으로 번들번들 미끄러졌어. 발가락 골짜기 사이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비의 가닥가닥들… 비의 혀는 먹잇감을 사냥하듯 사방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몰려들었어. 그 밤, 나는 어둠 속에서 비와 한 덩이로 떨어졌어. 온 우주가 흔들리며 발광(發光)했어.


다음 장면은 춘삼월에도 봄눈 피는, 기이한 계절로 겅중 튀어.

그 사이에 낀 페이지는 싹뚝, 편집이야. 그렇대도 서사엔 지장 없어.


밤은

비는

여름은

어떤 조짐이나 징후 없이 닥치는 것처럼 보여도 아니야.

언제나, 항시, 그 자리에, 있어. … 있었어.


나는 한껏 노래하고 춤췄어. 온 천지가 발광(發光)하게.

그때 그 여름밤이, 다시, 불붙었어.

나는 타올랐어. 다시, … 여름빛으로.


'내가 왜 이 나무를 좋아하는 줄 알아?

왜?

쓰러졌는데도 계속 자라서.

멋있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중에서


쓰러져도 계속 자라는 나무


있잖아

나는, 다시 자랄 거야.

파도처럼 노래하고 춤출 거야.

바람 살랑 불어오는 초록 들판에서.

거기, 아직, 있다면


너.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 류시화


밤늦게까지 시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그 이유인 것 같아요

고독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사랑을 만난 후의 그리움에 비하면

이전의 감정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도


시 아니면 당신에 대해 얘기할 곳이 없어

내 안에서 당신은 은유가 되고

한 번도 밑줄 긋지 않았던 문장이 되고

불면의 행바꿈이 됩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당신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점점 자그마해지는 여든 훌쩍 넘은 울 엄마. 얼마 전 전화했더니 그런다.


엄마가 돼서 해준 것도 없는데, 나한테 자꾸 전화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나 해.


그 전화를 끊고 오래 생각했다.


나, 하고 싶은 거?

………

미루고 미뤄둔 울 엄마 얘길 써야지.

울 엄마 더 자그마해지기 전에. 이 봄날 스러지기 전에.

내 자궁, 울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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