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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살갑게

영화 <바이러스>, 강이관 감독

by 여름

"마음 같은 소리!"


제 생일을 꼬박꼬박 챙기는 은사님이 있어요. 자주 만나진 않아도 제가 다니는 병원이랑 은사님 댁이 멀지 않아 매번은 아니어도 진료가 있는 날, 요깃거릴 사들고 가면 밥도 차려주고 커피도 내려주고 집에 올 때면 저 주려고 쟁여놓은 책이랑 굿즈 (이름하여, 이쁜 쓰레기들) 같은 걸 바리바리 싸주는. 애들 한창 키우던 어느 해인가, 애들 깨워 아침상 차리고 밥 먹이느라 정신없는데 은사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것도 같은데, 은사님이랑 저는 평소에 전화하고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어디에나 예외는 있겠지만, 저는 얼굴을 맞대는 것보단 목소리가, 목소리보단 글이 더 편한 사람이라 아주 친밀하거나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어야 할 때만 하는데, 물어본 적은 없어도 은사님도 그런 것 같더라고요. 언젠가 은사님이 그랬거든요. 너는 나니까.


그런데 그날은 아침댓바람부터 전화를 해서는 냅다 생일축하노래를 부르는데, 애들 아침 떠먹이던 숟가락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눈물이 왈칵 나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뻘쭘해서 은사님 노래가 끝나자마자 일단은 막 웃었어요. 하하하, 아하하하. 뭐예요, 선생님! 오늘 너, 생일이잖어. 귀 빠진 날, 축하한다. 하하하! 은사님도 막상 노래를 불러놓고는 쑥스러웠는지 축하한다고 말하고는 냉큼 전화를 끊었어요. 올해 제 생일엔 저 바쁘다고 (하나도 바쁘지 않은데…) 카톡으로 책을 보내놓고는 또 꽃을 보내고 싶은데 뭐가 문제인지 잘 안 된다길래 마음으로 이미 받았댔더니, 은사님이 대뜸 퉁박을 줘요. 마음 같은 소리 하고 있다고. 언제는 마음만은 늘 곁에 있다더니, 끄응. 제 변덕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만.


학창 시절 바람 부는 날이면 수업하다 말고 창밖 너머 재잘대는 은사시나무 잎사귀를 건너다보던 은사님의 단골 지청구는 '너 미친 거 아니니?'. 툭 까놓고 말해 곰살 맞은 구석이라고 없는 은사님은 늘 한자리에 우뚝 서 있는 그때 교정에 심겨져 있던 은사시를 닮았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20년 만에 전화했을 때도 그러셨거든요.


"내가 어디 가니? 난 늘, 여기 있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봤었어요. 흑과 백,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남과 여, 선과 악, 하늘과 땅, 물과 불,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빛과 어둠…. 그땐 썩어 문드러질 몸보다 마음을 떠받들었어요. 어쩐지 더 고상해 보이고, 영원할 것 같아서.


'이 나이에 이런 얘기 좀 뭣하지만, 사랑…… 그거 잘 모르겠어요. 사랑은 마음이라던 굳은 믿음. 몸이 모든 걸 통제한다는 걸 알고 나서 금 간 그 단단한 믿음. 마음은 어딨을까. … 통증처럼 몸에서 일어나는 마음. … 몸에서 발화하는 사랑. 저릿한 손끝, 붉어지는 뺨, 빨라지는 맥박, 통제 불능의 달뜸. 지금까지 내가 한 사랑, 머리로 한 그건 다 쭉정이.' (이연, <영화처럼 산다면야> 중)


네, 맞아요. 아프기 전엔 세상만사 마음만 먹으면 뭐든, 술술 풀릴 줄 알았어요. 한 마디로 철이 없었죠. (지금은 철이 들었냐? 그럴 리가요. 여전히 철이 없을 뿐더러 그럴 수만 있다면 영원히 철들고 싶지 않아요.) 결혼하고 애 낳아 키우다 보니 아니대요.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도 내 맘대로 안 되더라고요. 철딱서니였던 제가 그 뻔한 진리를 끄덕이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건, 암에 걸리고 나서예요. 암 투병이란 게 그래요. 멀리서 보면 의지만 있으면 내일이라도 뚝딱, 일어설 것 같아도 손발이 꽁꽁 묶인 것마냥 제가 끼어들 틈이라곤 없더라고요. 아픈 건 '나'고 '내 몸'인데도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내가 나를 통제할 수도 없거니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으니. 어떻게 보면 한심하고 또 어떻게 보면 짠한 제 꼴을 보고서야 몸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병원 갈 적마다 의사들이 물어보니까. 이 증상은 언제부터 그랬냐는 둥, 어디가, 얼마나 아프냐는 둥. 자꾸자꾸만. 그래서 거울 앞에 서서 맨날맨날 보면서 몸의 말에 귀 기울였어요. 그랬더니 보였어요. 제가 잃어버린 게.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잃은 것들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 세계와 맨몸으로 닿아있다는. 납작하게 눌린 이 세계의 면과 껍질 없는 살갗으로 닿아… 뻥 뚫린 감각의 더듬이로 뜨거운 숨을 나누고 있다는. 이 세계와 맞닿은, 전적으로 느낌인 한 마리 짐승.




영화 팟캐스트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에서 폴폴 작가님, 동선 작가님이랑 '세계 시(詩)의 날'을 맞아 시(詩)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어요. 그때 동선 작가님은 이창동 감독님이 영화 <시> 블루레이에서 한 말을 빌어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방식인데,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노래하는 것이 시'라고 했고, 폴폴 작가님은 시인답게 드로잉이 선과 면과 색으로 아름다움을 붙잡아두려는 시도라면 시는 언어로 아름다움을 붙잡아두려는 시도라고 했어요. 저는 로마 비노가 쓰고 마르크 마예프스키가 그린 책 <시, 그게 뭐야?>에 나온 '시는 온 마음을 다해 환영하는 것'이라는 문장으로 대신했고요. 팟캐스트 시즌 1을 마무리하면서 각자 영화 한 편을 보고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동선 작가님은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를, 폴폴 작가님은 <러스트 앤 본>을, 그리고 저는 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골랐어요. 제가 고른 영화는 존엄사를 하기로 한 말기 암 환자 마사와 그녀의 마지막을 동행한 친구 잉그리드의 이야기예요. 두 사람은 교외의 한적한 빌라를 빌려 한 달간 지내기로 하는데, 마침 근처에서 행사가 있던 두 사람의 오랜 친구이자 연인인 데미언이 잉그리드를 찾아와 이런저런 얘길 주고받다 이렇게 말해요.


"세상 모든 시인이 기후 위기에 대해 시(詩)를 쓴대도 나무 한 그루 못 살려."


네, 어떤 부분에서, 아니. 냉정하게 말하면, 맞아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잉그리드가 그에게 희망이 없다고 말하고 다니면 안 된다면서 자신은 매일 죽은 마사를 발견할까 걱정하면서도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냐면, 외려 반대인데 비극 속에서 사는 방법은 아주 많다고 말해요. 그리고 또, 마사가 느끼는 기쁨과 감사를 똑같이 느끼며 살려고 노력 중이라는 말도. 지난 글에도 썼지만, 신형철 평론가가 그랬다잖아요. 위로는 우산을 씌워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까 잉그리드는 함께 비를 맞는 사람이었던 거죠. 가파르게 죽음으로 미끄러지는 마사가 생(生)에서 감지하는 환희와 죽음의 공포와 빛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도를. 꺼져가는 생명이, 죽음이 두렵다던 잉그리드는 마사의 '건넌방'에 머물며, 그 모든 걸, 알알이, 부둥켜안았어요, 죽음의 제의를 미루며, 다소곳한 발랄함으로.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보고 나서, 그녀가 자꾸, 생각났어요. 모든 걸 접고 있던 자리를 벗어나 누군가의 세계로, 그것도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세계로 들어선 그때 그 마음을, 오래오래, 헤아리고, 펼쳐보고 싶어서 그랬는지. 다가올 친구의 죽음을 상상하다, 지레 겁먹기도 하고, 서늘한 그날을 맞이하고, 친구와 떨어져, 비척이며 돌아온 집에서, 친구를 쏙 빼닮은 딸을 반기고, 그 딸을 바라보며 떠난 친구한테 밤편지를 쓰고, 다시 솟은 쓸쓸한 아침….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영화를 보는 내내 흩날리는 분홍 눈발만큼이나 그녀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눈물조차 나지 않았어요. 저 만치서 거대한 물결이 넘실대며 몰려와 숨이 막힐 것만. 고통과 불안의 덤불을 헤치고 걷던 거친 숨소리 뒤로 따라오는 고른 발걸음. 숲을 가로지르던 흰 새벽안개를 감싸던 다정한 달무리처럼, 나란한 분홍빛 동행에.




영화 팟캐스트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 <우리 동네 문화센터 - 내 곁에 있어줘> 편에서 동선 작가님이 소개한 강이관 감독님의 영화 <바이러스>가 5월 7일 개봉했어요. 실은 동선 작가님이랑 영화책 <영화처럼 산다면야>를 함께 쓰면서 강이관 감독님의 영화 <사과>를 보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영화가 좀 있죠. 아깝고도 아까운.) 그때 참, 좋았어서 영화 <바이러스>를 보기 전에 한 번 더 봤어요. 그러다 강이관 감독님의 다른 영화, <범죄 소년>이랑 <이빨 두 개>도. 그런데 이번에 영화 <사과>를 보면서는 엔딩 크레딧에 눈이 갔어요. '도움을 주신 분들' 타이틀 밑으로 감독님이 인터뷰한 사람들 이름이 좌악, 올라가는데, 저는 그게 그렇게 뭉클하더라고요. 아, 저런 발품이 있어서 이런 영화가 나왔구나, 싶으면서. 영화 한 편을 찍으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얼마나 많이 애쓰는지 아마 극장에 앉아 두 시간 남짓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짐작도 못 할 거예요. (굳이 그런 걸 헤아릴 필요가 있나, 싶은 게 당연하고요.) 영화 <사과>엔 뭐라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얽히고설킨 감정의 가닥가닥들, 이렇게 저렇게 쪼개진 마음의 실금들.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간 잎맥처럼, 어두컴컴한 땅속 저 깊숙이 파고 들어간 감정의 잔뿌리. 그런 감정을 아주 샅샅이, 훑고 핥아놨더라고요. 팟캐스트에서 말하고 싶었지만, 시간상 말하지 못했던 강이관 감독님의 또 다른 영화 <범죄 소년>. 그 영화는 부모 없이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보호관찰 중인 열일곱 살 소년 지구에 대한 이야기인데, 소년원을 다루고 있어서 그랬는지 영화를 보는 내내 소년원에서 1년 여 동안 국어를 가르친 서현숙 작가의 <소년을 읽다>가 생각났어요. 그 순하디 순한 마음이. 무슨 말이냐면, 소년원에 머무는 시간이 제각각이라 짧게 만나고 헤어지는 아이들이었음에도 서현숙 작가가 온 마음으로 아이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려는 애씀이 그 책을 읽는 내내 저를 끌어당겼거든요. 그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아이들의 작은 눈짓과 몸짓, 표정을 살피고 반응하는 그녀한테, 그러한 마음씀씀이에.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잠깐 만나 인사만 나누는 나를 위해 도운이는 방에서 펜을 들고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는 소년의 시간을 떠올렸다.'

(서현숙, <소년을 읽다> 중)


그러니까 편지를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편지를 쓰고 있는 소년의 시간까지, 그 보이지 않는 면까지 더듬어 읽어내는 마음… 말이에요. 그런 마음은 삶이 아무리 흔들어대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 같아요. 빛처럼요. 용기나 다짐, 그런 거랑은 무관하게. 시시한 존재나 대상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길섶의 풀떼기에 쪼그려 앉고, 떠가는 구름에 올려다보는, 부는 바람에 떨리고, 감은 눈 위로 어른대는 햇살에 젖는… 그런 마음들은 어디까지 빛나나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읽어내는 감각은 어디까지 투명하나요? 더 흔들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의 삶은 어디까지 단단하나요? 제가 보기엔 더없이 빛나고 투명하고 단단한데도 한 사람으로, 한 어른으로 소년의 삶을 통감하고 아파한 그녀는 이렇게 읊조려요.


'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더 흔들려야 하리.'

(서현숙, <소년을 읽다> 중)


빛나고 투명하고 단단한 그 마음이, 강이관 감독님의 영화 <범죄소년>이랑 <이빨 두 개>에도 있었어요. 길섶의 작은 생명도 홀대하지 않는 눈길과 두근대는 말 걸기가. 어, 너도 여기 있었어? 너 참 이쁘다. 고새 폈네?


강이관 감독님이 13년 만에 만들어 놓고도 코로나로 5년 만에 개봉한 영화 <바이러스>는 이지민 작가의 소설 <청춘극한기>가 원작이긴 하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사랑에 빠진 증상을 보이다 사망에 이른다는 설정을 빼면 원작과 사뭇 달라요. 강이관 감독님은 한 방송에서 사랑에 빠지려면 그전에 '긍정'이 되어야 한다며, 이 영화는 '긍정'을 얘기한다는 말을 했어요. '긍정'을 말하려면 상상력이 많이 필요한데, 지금까진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할 수밖에 없지 않았냐고. 그게 쉬우니까. 그러면서 '긍정'을 얘기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 이 영화가 단초가 됐으면 좋겠다고도 했어요. 강이관 감독님의 그 말은 제가 좋아라하는 박민규 작가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속 문장과 닮았어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


꽝꽝 언 땅에선 그 어떤 마음의 싹도 틔울 수 없어요. 상상은 봄볕에 이제 막 물렁해지는 해토머리에서 아지랑이일 듯 기지개를 펴고 날아올라요. 그런 토양에서 움튼 사랑이라서 모든 걸 녹이고 온 천지 불 밝히는 힘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런 사랑이 통제불능이기도 하죠. 제가 겪은 암처럼. 암에 걸리고 제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고 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사는 것도 그렇지 않나요? 이 영화에서처럼, 사랑은 어느 날 불쑥 바이러스처럼 내 몸에 침투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끓어오르다, 푸시식… 식어버려요. 뭘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이.


이 영화 주인공인 옥택선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초등학교 동창인 김연우를 만나서 그래요. 연우야, 기억은 사람을 살리게도 하고 죽이게도 한대. 네, 맞아요. 그런데 태생이 변덕쟁이인 기억은 '사실'을 고대로 전달하거나 저장하면 좋으련만 뒤틀고 부수고 흩뿌리고 부풀리거나 아예 싹 지워버리기도 하면서 제멋대로 갖고 놀아요. 고약하게스리.


'이를 위해 이 두 사람이 택한 전략은 기억입니다. 망각이 편할 텐데, 기억의 편에 서기로 했습니다. 이 우주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책임감마저 느껴집니다. 놓치지 않으려는 기억, 곱씹어 단물이 배어나는 기억, 삶의 실마리. 그 기억은 그저 낭만적인 추억이거나 넋두리가 아닙니다. 글 속에 소리가 들리고 냄새가 나고 입에 씹히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맡은 냄새, 감촉, 맛, 그리고 타인과의 인연이 어떻게 삶과 닿아 있고 삶을 밀고 나가는 힘이자 변곡점이 되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줍니다.'

(김진해, <영화처럼 산다면야> 추천사 '어떻게든, 넘어가겠죠' 중)


누구는 지우고 싶어 기를 쓰고 또 누구는 마음에 새겼다 또박또박 기록하면서 살아가는 기억. 저는요? 왜인지, 왜 그렇게나 들쑤시고 집착하고, 부들부들 기억하려고 애를 쓰는지… 모르겠어요. 똑 부러질만한 이유도, 의무나 다짐 혹은 결단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제가 하는 모든 일이 그렇듯, 저도 모르게, 그저, 어쩌다 보니. 다만, 이런 생각은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은 흐르지도 않고, 한 자리에 있지도 않는다는 생각.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다발적으로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 저한테 과거는 흘러간 시간이 아니고 현재이자 미래였어요. 남들이 보기엔 들쑤시고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저한텐 모든 시제가 현재진행형이라 들쑤시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어요. 저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었달까. 쓰면서 알았어요. 기억은 마음이 아니라 몸에 저장된다는 걸. 펄떡이는 감각으로.


겨울밤 찬 벽에 댄 손등 위로 지나던 초록별빛, 기차역 승강장에 서서 벌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계절을 가르던 바람, 잎사귀를 듣는 빗방울, 고막으로 부서지는 흰 파도, 입술을 누르던 입술도장, 방충망에 출렁이는 새울음, 바람 끝에 매달려 노래하는 잎새들, 귓불을 스치는 천둥 같은 심박동, 천장을 긋는 헤드라이트 불빛, 방안에 차오르던 꿈의 문양, 콧잔등 위로 고이는 꽃그늘, 카페 2층 창가에서 내려다본 한낮의 거리, 신호등 뒤쪽에서 달려온 더운 아까시향, 어깨너머로 부서지는 햇살, 바람에 쓸리는 물무늬, 팔뚝에 내리던 꽃비, 훈색으로 넘어지던 저녁 하늘, 그리고 니가 내 몸에 남긴 선연한 자국들….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사랑에 빠진 느낌을 알아버린 옥택선은 바람처럼 말해요. 기억은 사라질지 몰라도 그 느낌은 몸에 남을 거라고. 몸은 기억할 거라고. 사랑은 뭘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우울증 치료를 연구하다 옥택선을 돕게 된 이균 박사는 자꾸만 들이대는 옥택선한테 지금 당신이 이러는 건 감염 증상일 뿐이라며 독감 바이러스는 장미 꽃잎처럼 이쁘다고 말해요. 사랑에 빠진 표정으로. 그 말에 지적 생명체를 찾아 우주로 떠난 아버지를 만나러 우주로 날아간 아들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애드 아스트라>가 생각났어요.


'이건 지금 설치할 새로운 별빛 차단막이야. 활짝 펼쳐지는 모습이 꼭 봄의 들꽃 같지?'

(영화 <애드 아스트라> 중)


이균 박사가 장미 꽃잎처럼 이쁜 바이러스는 보면서 동생의 그늘진 낯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 영화에서도 우주로 날아간 아빠는 봄의 들꽃 같은 별빛 차단막은 보면서 지구에서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눈동자는 보지 못하거든요. 아들은 우주인이 되어 사랑하고 그리운 아빠가 있는 우주로 날아갔다가 다시, 혼자가 되어 돌아온 지구에서 깨달아요. 자신이 잃은 게 뭔지.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소중한 게 뭔지도.


어둠을 향해 등불을 비추는 이들이 있어요. 그런 손길이. 대부분은 어둠에 적응하고 그게 순리라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그런 순리가 도통 먹히질 않는 무리가 있는데 그들은 끝끝내 어둠에 길들여지지 않고 깨지고 녹슬고 부서지면서 어둠을 향해 불빛을 들이대고 비추며 나아가요. 그 힘이 미약하든 세든, 혐오와 분노와 억압과 폭력을 거스르며.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예술? 문학? 철학? 그런 무리는 또 뭐라고 부르나요? 객기나 광기? 누구는 말할 수 없는 걸 말하는 게 예술이고 상상할 수 없는 걸 상상하는 게 철학이라고 하던데, 솔직히 그런 것까진 모르겠어요. 그런 건 몰라도 인류가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극히 소수였을 망정 그런 힘을 발산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 동력으로 쭉쭉 뻗어나가진 않았어도 더디게라도 포물선을 그리며 여기까지 흘러오지 않았을, 그런 생각은 해요. 어디 먼 데 갔다 돌아오는 길, 눈에 들어오기만 해도 벌써부터 마음이 노곤해지는 동네 어귀 단골 슈퍼마켓 같은 이들이 있어서. 잉그리드처럼, 서현숙 작가처럼, 그리고 강이관 감독님처럼.


'누군가한테 사랑받고 있는 느낌'


완치되어 갈 즈음, 옥택선이 장밋빛 하늘가에 눈길을 주며 젤루 아쉬워한 건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그거. 온몸, 온 세상 점령한 그 환함을 잃어버릴까, 혹여라도 그 느낌을 기억하지 못할까.


'노래를 더 이상 못하게 된다면요?

살 이유가 없죠.

죽음이 두려우세요?

고독이 더 두려워요.

기도하세요?

네, 사랑을 믿으니까요.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요?

매번 무대에 막이 오를 때요.

여자로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요?

첫 키스.

밤을 좋아하세요?

네. 별빛이 빛나는 밤이요.

새벽은요?

피아노와 친구들이 있다면.

저녁은요?

우리한텐 새벽이죠.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사랑하세요.

젊은 여자들에게는요?

사랑하세요.

아이들에게는요?

사랑하세요.

누구 옷을 뜨고 계세요?

누구든 입어 줄 사람요.'

(영화 <라 비앙 로즈> 중)


'살갑다'는 말을 좋아해요.

'살'은 '살갗'으로 부드러움과 포근함을, '갑다'는 나아간다는 걸 의미한다고 하니, '살갑다'는 부드럽고 포근하게 쭈욱, 이어진다는 말이겠네요. 요즘에 저는 마음보다 몸을 떠받들어요. 높이, 노오옵이.


사랑해요.

이 생(生)을 다 바쳐, 살갑게.

(마음 같은 소린 집어치웟!)


'숨 쉬며 느끼는 나무가 되고 싶어.'

(영화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중)



걸어가는 나무

- 정지윤


그들의 발소리는 너무 조용하여

먼 훗날 겨우 발견될 뿐,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태양을 찾아가는 나무의 뿌리는

아마존의 고대 지도를 기억한다

끝과 시작이 맞닿은 유랑

기억을 더듬는 긴 촉수의 뿌리들은

수십 개월 느리게 이동한다

걷는 나무에게 숲은 한낮 궤도일 뿐

달과 달 사이로 시간이 흐른 뒤

숲은 파헤쳐졌다

나무들은 뿌리 앞에서 뒤틀림을 멈춘다

태양을 훔치는 뿌리들은

제 뿌리를 등 뒤에 남기며 다시 앞을 향해 걷는다

숲을 향해 숲이 되기 위해 걷는 일

아마존을 느린 걸음으로 가는 아마존의 나무들

언젠가 숲이 초원에 이르는 날

절룩거리며 걸어 나와

제 그림자와 뒤꿈치에 박힌 상처들을 전할 것이다

나는 잠시 멈춰 선 채

먼지 같은 시간을 바라다본다

고통은 크기만큼 가벼워지는 것이어서 깔깔거리며

저마다 제 이름을 깊은 곳으로 불러들인다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그동안 영화 팟캐스트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와 함께해 주신 영우 님들, 감사합니다.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를 함께 만들어온 동선 작가님과 폴폴 작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또 맘나요.

오늘도 좋은 날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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