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가 시작된다>
3년 전 여름. 아니, 새순 돋는 봄날이었나. 어쩌면 문지방 넘던 계절이 먼 산자락에 흰 눈, 그리움으로 쌓아놓고 떠난 이른 봄이었을지도. 언제, 어떤 길로 들어섰는지, 다음날 다시 오라면 헤맬 게 분명한 길 따라 걷다 첨 들어선 방에서 첨 보는 얼굴이었어. 첫인상은? … 디따 어렵네.
'그게 시작인 줄은 몰랐어요.
그게 우리의 시작인 줄은 몰랐습니다.' (<콩트가 시작된다> 중)
'이 세계에 있는 모든 도시들과 마을들은 꿈이 아닐까요. 그곳에는 그곳만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있어요. 모르는 장소와 모르는 사람들은 일종의 꿈이라는 생각, 그래서 이렇게 느슨하게 이 도시의 위치를 꿈길처럼 설명합니다. (허수경, <너 없이 걸었다> 중)
지독한 길치라 길만 나섰다 하면 헤매기 일쑤지만, 기꺼이 헤맬 각오로 덤비는 게 딱 하나 있어.
호기심 대장인 날 끌어들이는 블랙홀은 '이야기'. 극한의 낯가림에도 '이야기'라면, 냉큼 일어나 따라나서.
어디든, 뭐든, 누구든….
영화 팟캐스트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에서 콩이가(폴폴 작가님의 애칭) 폴폴, 다녀온 책방을 사랑스런 목소리로 소개할 때마다 콩이 목소리 따라 책방 정경을 그리고, 길게 늘어진 콩이 그림자 따라 걸으며 언제고 한 번은 가야지, 했던 건 그 먼 데에 덩그마니, 있는 것 같아서. 콩이와 책방지기와 그 책방이. 거기에 내 발걸음과 체취와 푸른 잠눈 밴 콩이 '오프닝 멘트'를 덧대어 오직 우리만의 '이야기'를 지으면 어떨까, 했어. 우리만의 '윤슬서림', 우리만의 '이스트씨네', 우리만의 '베란다', 우리만의 '파이키', 우리만의 '능내책방'.
그렇게 찍은 점이 모여 선이 되고 면이 되어…
아직 꾸지 않은, 모르는 장소와 모르는 사람들이 꿈으로….
이따금씩 들르곤 하는 하남에 있는 책방을 소개한 적 있어. '콩트'라고.
책방 담당(?)은 콩이인데, 이 책방만큼은 꼭 소개하고 싶어서.
아파트 상가 2층에 있는 데다 간판도 잘 눈에 띄지 않아 찾느라 애먹은 그 책방은 공간이 그리 크지 않아. 그래서였을까. 요즘 책방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굿즈나 음료를 팔아 수익을 내는데, 이 책방은 오직 책과 책방 자체 프로그램만으로 운영을 하는 듯했어. 그래서인지 책방 문을 열고 들어서서 은근 뚝심 있어 뵈는 책방지기랑 눈인사를 나누고 나면 정말 책만 봐야 해. 책만. 첨 책방에 들어선 날, 젤 먼저 눈에 띈 건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면서도 세련된 인테리어였어. 자그마한 공간을 꽉 채운 꽤나 감각적인. 그렇게 책방을 둘러보고는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찬찬히 훑어보는데 어찌나 놀라고 신기하고 좋던지! 정말 딱, 내 취향의 책으로만 채워져 있어서. 뭐니 뭐니 해도 그날 젤루 좋았던 건, 다가와 말 건네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던 책방지기의 고객응대 방식. 그러는 바람에 충동구매를 했지만. 그 책방에 갈 때면 책을 사고 나오면서 잠깐 서서 얘길 나누곤 했는데, 얼마 전 갔을 땐 처음으로 책방지기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면서 마주 앉아 얘길 했어. 그날 물었어. 어떻게 책방을 하게 됐냐고. 그때 돌아온 대답을 잊을 수 없어.
"사람마다 구원받은 장르는 저마다 다를 텐데요, 저는 책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데, 그걸 돌려주고 싶었어요."
무언가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래.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겠지. 구원을 받았다는 걸 알아차리는 사람도, 그랬단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도, 그리고 사는 내내 그 무엇으로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구원을 받는 대상이나 시기는 저마다 다를 테고. 책방지기는 책에서,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데, 내가 그의 대답에서 놀란 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나 그 대상이 책이라서가 아니었어. 내가 그의 대답을 잊지 못한 건, 받은 구원을 '돌려주겠다'는 마음 때문이야. 자신이 받은 구원을 꿀꺽, 삼키지 않고 다시, (모르는 누군가에게) 돌려주겠다는 그 마음. 그러한 행위나 삶의 태도가 설령 자신에게 부귀와 영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해도, 어마어마한 보상이나 휘황찬란한 대가 없이도 기꺼이 돌려주려는 그 마음이 너무 귀해서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싶었어. 나는 또 물었어. 이 책방이 어떤 책방으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냐고. 그 대답도 잊을 수 없어.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날리던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키티호크의 '풀밭'이 되고 싶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책방 '콩트'가 꿈을 말하는 공간이길 바란대. 모두가 불가능을 말할 때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꿈꾸던 키티호크의 '풀밭'처럼 책방 '콩트'도 꿈을 이야기해도 부끄럽지 않은, 꿈을 꿔도 민망하지 않은 공간이었으면 한다고. 꿈을 가진 이들이 와서 맘껏 꿈을 이야기하고 그런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응원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고. 그 대답을 듣고 온 지 꽤 됐는데도, 아직도 가슴이 이렇게나 화안해.
책방 '콩트'의 이름이 된 일본 드라마 <콩트가 시작된다>는 10년 동안 무명생활을 한 '맥베스'라는 콩트 팀 이야기야. 리호코는 카페에서 일하다 알게 된 '맥베스'를 남몰래 응원만 하다 처음으로 공연을 보러 간 날, 두 달 뒤 팀이 해체한다는 걸 알게 돼. 그날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맥베스 팀원 중 한 명인 하루토를 만난 그녀가 말해.
"1년 반 전에 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 좌절에 빠져서 폐인처럼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맥베스 세 분을 만나고 그 존재를 안 이후로 어느새 맥베스는 제 인생의 버팀목이 되었어요. 아직 얼마 안 된 신생팬이지만 남은 두 달 동안 최선을 다해 응원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콩트가 시작된다> 중)
그 말을 들으면서 알았어. 누군가를 남몰래 응원하는 마음이 상대를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 자신을 버티게도 하는구나. 그러니까 누군가를 응원하는 건 두 배로 두터운 마음일지도 몰라. 상대를 일으키고 나를 버티게 할 만큼. '기와처럼 단단한'.어쩌면 우리가 누군가를 응원하고 지지할 때 우린 버티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도 모르게? 그날 그녀는 맥베스를 하자고 한 자신 때문에 두 친구의 인생을 망쳤다고 말하는 하루토한테 이렇게 말해.
"오히려 질투가 날 정도로 빛이 나고 즐거워 보였어요!" (<콩트가 시작된다> 중)
내가 두 번이나 가고도 입장하지 못한 강릉 '이스트씨네'엔 우리의 찐 영우 님인 '인정 씨'가 새벽길을 달려 입장하고, 2년 동안 눈도장만 찍으며 흠모한 '능내책방'엔 우리의 찐 영우 님인 '이강순' 작가님이 단골이 되고. 몇 년간 서로를 응원한 씀벗, 수필버거 님의 환대로 눈 나리던 지난 동짓날 대구에서 만난 '대책회의' 몇 분은 브런치에서 씀벗이 되고. 얼마 전 책방 '콩트' 인스타엔 우리만의 '윤슬서림'이…. 아, 그리고 지난봄엔 광주 기역책방의 찐 영우 님인 송기역 시인과 그 제자인 우주 님과 노오란 햇살 퍼지던 하루를 보내기도.
바닷가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사랑하는 목소리에 잠겼던 지난 몇 개월,
초록 풀밭을 한껏 달리느라 계절이 지나는 줄도 몰랐어.
깨고 보니, 꿈결에 풀처럼 무성한 마음… 그게 또, 이 봄날 풀빛으로 차올라
계속계속, 자고만 싶어져….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 줄래?"
고양이가 대답했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려 있어."
"난 어디든 상관없어."
고양이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 길로나 가도 돼."
앨리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디든 도착만 한다면."
고양이가 말했다.
"아, 넌 틀림없이 도착하게 되어 있어. 계속 걷다 보면 어디든 닿게 되거든!"
-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나는, 또, 흘러 가.
어디든 닿고, 어디엔가 도착하려고. 계속계속해서.
모르는 방, 모르는 얼굴이 있는 풀밭 쪽으로.
'적어도 스스로 완성이 되기 위한 고민을 하는 동안만큼은 소년소녀로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동선)
막판이 된다는 것
- 문보영
후박나무 가지의 이파리는 막판까지 매달린다. 그늘을 막다른 골목까지 끌고 갔다. 막판 직전까지. 그 직전의 직전까지. 밑천이 다 드러난 그늘을 보고서야 기어이.
후박나무는 그늘을 털어놓는다. 막판의 세계에는 짬만 나면 밤이 나타나고 짬만 나면 낭떠러지가 다가와서. 막판까지 추억하다 잎사귀를 떨어뜨렸다. 추억하느라 파산한 모든 것
붙잡을 무언가가 필요해 손이 생겼다. 손아귀의 힘을 기르다가 이파리가 되었다. 가지 끝에서 종일 손아귀의 힘을 기르고 있다. 그러나 양손이 모두 익숙지 않은 것들은 양손잡이일까 무손잡이일까. 그늘을 탈탈 털어도 가벼워지지 않는
애면글면 매달려 있는. 한 잎의 막판이 떨어지면 한 잎의 막판이 자라고.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어서 손이 손바닥을 말아 쥐었다. 손을 꽉 쥐면 막판까지 끌고 갔던 것들이 떠오른다. 막판들이 닥지닥지 매달려 있다. 막판 뒤에 막판을 숨긴다.
덧
우리가 함께 이야기한,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 시 쓰기라던 문보영 시인의 '시작'은 <막판이 된다는 것>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