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사람과 감동과 성장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다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문어 얘기가 등장할 때 몇 번 언급되는 걸 들은 적이 있던 이 영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크레이그 포스터가 1년간 문어와 함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독은 어릴 때도 이곳 케이프타운의 희망봉이 있는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폭풍의 곶’이라는 이름이 있을 정도로 파도가 거센 이곳에서 자연의 경이를 느끼며 자랐다고 한다. 그러다 바쁜 생활에 지쳐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진 것을 깨닫고 아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촬영할 때 보았던 칼라하리 사막의 원주민 부족의 사냥 본능을 떠올리며 바다로 들어가서 헤엄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조개를 뒤집어쓰고 있는 문어를 만난 것이다.
문어는 몸을 둥그렇게 말고 위장술을 펼치듯 조개들을 붙이고 있었다. 감독은 문어가 사는 동굴 앞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매일 그 차가운 바다에 스노클링 기구를 끼고 들어가서 다시마가 빽빽한 바닷속 숲을 헤치고 다니며 문어를 만났다. 신기하게도 문어는 며칠이 지나자 감독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다리 하나를 뻗어 감독의 몸을 만져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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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매일 바다에 나가는 걸 원칙으로 삼고 집에 있을 때는 문어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다. 문어 앞에서 실수로 카메라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놀란 문어가 거리를 둘 때도 있었지만 다시 정성을 쏟자 그를 편하게 대해주었다.
우선 나는 문어가 당연히 수족관에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야생에서 만난, 그것도 바닷가는 온통 바위투성이이고 바닷속은 다시마숲이 흔들리는 이런 진짜 바다 깊은 곳에서 만난 문어 이야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어는 그곳에 터를 잡고 밤에는 조개나 게 등을 잡아먹으면서 혼자 살고 있었다. 이 부분부터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상어가 문어를 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문어는 상어를 열심히 따돌리다가 바위틈에 숨었지만 상어는 기어이 문어의 다리 하나를 입에 물고 몸을 빙빙 돌리면서 다리를 끊어냈다. 문어는 지쳤고 그걸 보는 감독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자신이 상어를 불러온 게 아닌가, 중간에 개입해야 했나, 죄책감과 후회를 느꼈다고 했다. 일주일 정도 기운을 못 차리던 문어에게 놀랍게도 다리가 새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문어 다리 끝부분처럼 자그맣게 돌돌 말린 다리는 점점 자라서 얼마 지나가 다른 다리와 똑같이 생겼다. 정말 신기했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어느 날 문어가 이리저리 떼 지어 헤엄치는 물고기 떼 밑에서 노는 모습이었다. 감독은 처음에는 문어가 뭘 하는지 몰라 자세히 봤는데 아무리 봐도 사냥이 아니라 물고기들과 노는 것 같았다고. 물고기 떼의 경이로움을 감상하는 문어의 시선에 공감했고 욕심없는 순수한 놀이가 이런 감동을 줄 일인가, 의아하기도 했다. 이런 문어에게 어느날 짝이 생겼다. 감독은 문어의 생태를 공부했기 때문에 이 만남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 예감대로 문어는 새끼를 낳았고 기력을 소진한 후 죽었다. 그 시체를 상어가 와서 먹었다.
감독은 문어가 죽었을 때 슬펐지만 동시에 1년 동안의 고단한 문어 추적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했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리고 어엿하게 한 생을 살다 간 문어가 자랑스러웠다고도 했다. 감독이 문어를 보고 느낀 지극한 감동과 경이가 전폭적인 사랑으로 이어졌고 이 사랑은 문어가 한 생을 잘 살아가는 걸 보고자 하는 마음이 됐다. 나도 그 말에 감동이 느껴졌다. 이렇게 바라보고 응원하고 함께 마음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게 사랑이구나, 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깊은 사랑을 경험한 감독은 문어가 떠난 후 ‘시 체인지 프로젝트’라는 단체를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 헤엄치고 해양 보호 활동을 펼친다. 그리고 바다에 관심이 많은 아들과 자주 함께 헤엄친다. 아들은 많이 자랐고 밝아졌다.
이런 지극한 애정을 체험한 사람이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볼 수 있는 영화였다. 흔히들 곁에 있는 사람은 궁금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또 사랑하면 통제하고 간섭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이 사람도 문어를 몇 번 본 후 지나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상어를 막아주고 먹이를 찾아주고 새끼를 낳고도 죽지 않도록 간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훈련했기 때문일 것 같기도 하고, 문어를 아끼는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에 함부로 손대지 않으려고 했을 수도 있겠다.
문어가 혼자 사는 건 그런 성질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문어는 곁에 동족을 전혀 두지 않고 물고기, 말미잘, 해파리, 조개 등과 함께 제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 나는 동물이 사람이랑 친해지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사람이 가져다주는 문화를 맛볼 수 있는 행운을 다른 동물들은 모른다는 게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문어를 보자 부질없는 그게 생각임을 느꼈다. 문어는 어느 날 찾아온 사람이 친근하고 재미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자기 삶을 살다 갔다. 그럼 감독이 문어를 향해 퍼부은 사랑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 사랑은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 양분이 됐다. 세상에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하듯 내가 주는 사랑이 바꾸는 사람도 나 자신인 것 같아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