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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일 Jul 24. 2023

설거지하면서 발견하는 사용자 경험

친환경 주방세제와 낭비를 만드는 UX

저는 설거지를 좋아합니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생각도 정리되고, 마음도 안정됩니다. 나름대로의 법칙도 있어서 식기들을 이해하고 설거지하는 과정을 꾸준히 고도화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싫어하게 된 주방세제가 생겼습니다. 무색, 무취의 친환경 주방세제..


반응이 없는 주방세제

"이거 정말 세제가 다 씻겨진 건가?"

설거지 중인 찡찡이

아이가 있는 집이라 한동안 주방 세제에 신경을 썼습니다. 물론, 설거지도 더욱 신경 써서 하게 됐습니다.

안전하다는 말에 무색, 무취의 친환경 유아 식기 전용 주방세제를 쓰기 시작했고 당연히 조금 더 비싼 가격에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죠.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무색, 무취.. 이게 스트레스를 주게 될지 몰랐습니다.

우선 거품이 나지 않으니 제대로 설거지가 되고 있나?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수세미에 반응이 나지 않아 세제를 한 번 더 펌프하게 되었고 몇 번을 문지르며 확인 또 확인, 처음에는 조금 더 꼼꼼하게 씻으면 되겠지 싶었지만 씻겼는지 확신이 없으니 한참을 씻고 또 씻고.. 설거지를 할 때마다 반복하니 짜증이 났습니다.

거품의 역할이 이렇게 크다니... 활성, 비활성화가 왜 중요한가 떠올랐습니다. 평소 설거지를 하며 거품이 나면 그러려니 하며 지나쳤지만, 설거지라는 작업의 시작과 끝을 알려주는 정말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결국 친환경 세제는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소모해 버렸고, 다시 거품이 나는 보통의 주방 세제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잠깐의 낭비

"'아님 말고'에서 시작되는 낭비"

심슨가족, 호머 심슨 짤

사실 활성, 비활성화를 누락했을 때 서비스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한 번 눌러보고 말고 안되면 금방 다른 액션을 취하고. 엄청나게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용인할 수 있다고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정말 맞나요? 적당히 낭비를 용인하는 나이브함이 사용자에게 얼마나 해로운가 기억해야만 합니다. 거품이 나지 않는 친환경 주방세제처럼 프랜차이즈의 키오스크를 사용해 보면 정신력이 꽤 낭비되는 모호한 UX를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부서진 해외 M사 키오스크
주문할 메뉴를 골랐는데, 내가 맞게 골라진 건지.
할인 쿠폰이 제대로 적용이 된 건지.
결제를 했는데, 결제가 되고 있는 건지.

이런 문제에 대표 격인 키오스트는 활성, 비활성화는 커녕, 정보 위계 자체가 깨진 특유의 UI로 시니어들에게 키오스크 공포증을 안기기도 합니다. 뒷사람 눈치 보며 사용자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키오스크. 디지털 문해력으로 인한 문제라고 하기에는 UX라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엉망진창인 키오스크들로 인해 낭비되는 시간과 노력이 결국 다크패턴에 버금가는 해로움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밖에도 사용자의 시간과 노력을 '낭비'시키고 있는 서비스는 많이 있습니다. 특히 리모컨을 통해 조작하는 IPTV들의 서비스도 UX도 하나하나 따져보면 정말 심각하죠.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요. 최근 플랫폼 서비스를 지향하는 스마트홈 앱들과 멤버십 앱 등 단순히 환경을 디지털로 전환한 수준에서 머무는 서비스들이 이런 문제를 자주 보여줍니다.


활성, 비활성화 그리고 예측

"지금 제가 어떤 상태인가요?"

무한도전의 정총무 짤

이렇게 낭비를 유도하는 서비스의 UX를 살펴보면 다음 액션을 위한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사용자가 학습하면 충분히 쓸 수 있겠지만, 학습도 노동입니다. 익숙해지기까지 사용자가 서비스를 통해 목적을 해소하기 위해 노동이 반복적으로 추가된다면 그건 결코 좋은 서비스가 아닙니다. 많은 UX 법칙이 존재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사용자입니다. 다음으로 취해야 할 액션을 예측할 수 있도록 사용자의 현재 상태를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려한 디자인을 위해 UX를 무시하면 사용자의 시간을 낭비하는 서비스가 되어버리는 거죠. 오브제의 활성, 비활성화를 통해 전/후 상태에 대해 확실히 인지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제가 경험한 주방세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식기를 깨끗하게 씻기 위한 도구가 노동을 반복시키는 불편함을 안겨준다면 잘못된 도구인 것처럼, 본래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각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단순히 더 나은 기술이라고 해서 그것을 쓰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용자는 몇 번이고 실수를 반복해 피로감이 늘어버립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용자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무엇을 제공하려고 했는가. 제1원칙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뒤 나머지 부가적인 요소를 더해야만 합니다. 대부분 여러 가지 이유로 여기서 사용자를 고려하지 않는 터라 문제가 발생하죠.


낭비를 줄이는 어포던스

"목적을 생각합시다"


저는 '어포던스(Affordance)'라는 개념을 정말 좋아합니다. 물체가 갖는 특징에 따라 사용자가 어떤 행동을 가능하도록 유도해 목표를 달성하게 돕는 개념으로 '넛지'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주방세제의 '거품'처럼 불필요해 보이지만 사용자에게 필요한 경험을 제공하는 매개로 스스로의 현황을 확인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소해 보이고 정보가 많다고 생략하기보다는 요약해서 제공하면 사용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상황을 인지해 행동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가지고 놀던 호O 마이크 장난감

저는 이런 명확성이 아이들 장난감에서 특히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당한 넛지로 시작과 끝, 태스크 단위로 이전과 다음을 명확히 구분하고 인지시켜주고, 아이가 지루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면 작별 인사를 하며 서비스를 스스로 종료합니다. 멋지지 않나요?

사소해 보이지만 사용흐름에 따라 명확한 어포던스를 제공하는 것이 디테일에 차이라고 느껴지기도 해요.


중언부언, 말이 길었네요. 제공자에게 좋은 게 모두 사용자에게 좋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근 서비스에 사용자를 가두려고 작정한 듯 설계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지금 이 서비스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선택하면 틀린 듯 사용자를 몰아세우죠.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광고와 마케팅으로 사용자를 괴롭힙니다. 지속가능한 수익 추구보다는 실적을 위한 단발적인 수익 추구가 무엇을 망치는지도 모른 체 말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사용자도 언제든 선택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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