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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윈이야기 May 23. 2021

망원 어벤져스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현장에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이 있었다. 

멀찍이 지켜보며 수군대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다윈과 나는 그곳으로 달렸다. 

아수라장이었다. 경찰관들마저 언성을 높여가며 격앙되어 있었고, 남자는 지나가던 사람들을 인질처럼 잡아두고는 난동을 부렸다. 온 가족이 단란하게 뛰고 노니는 평범한 저녁, 공원의 평화는 산산조각 났다.  

그 곁에 대치하고 섰는 망원동 개엄마 세 명과 아랑곳 않고 해맑게 장난치며 노는 개 네 마리. 

이제 나까지 합세했으니 개엄마 넷에 털북숭이 친구들 다섯이 뭉쳤다.  


잘 됐다, 오늘은 끝까지 간다!    




여섯 마리 시츄를 키우시는 견주님이 종종 언급했던 그 문제의 남자. 

개만 보면 공원 전체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견주에게 나가라고 시비를 건다는 빌런. 

게다가 혼자 산책시키는 여성과 어린아이만 노린다는 강약약강의 악질에, 이미 구청과 경찰서에서까지 신고 마일리지를 두둑이 쌓아두어 신상까지 다 알려진_ 구청 공무원들과 경찰관들이 제발 어떻게든 처치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딱한 종자란다.

     

공교롭게도 나는 바로 전 날, 그를 처음 보았다. 

한여름처럼 작열하는 해 때문에 평소와 다른 시간 산책을 나간 게 화근이었다. 

      

"여기 개 데리고 오면 안 돼요. 경범죄로 신고하기 전에 나가세요." 


이건 무슨, 누구신지?! 다윈을 보자마자 "야! 나가!"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만, 나에게는 무턱대고 나가란다. 

아저씨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무서워 얼어붙어버린 다윈을 보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선생님, 여기 공원이구요, 개랑 산책해도 되는 곳이에요!" 


"안돼요, 경찰서에 신고하기 전에 빨리 개 데리고 나가요!" 


무슨 동네 체육공원에서 개 산책이 경범죄야? 펫티켓을 지키자는 현수막까지 있는데. 

아! 이 사람이구나, 시츄 엄마가 말씀하셨던 유명인사!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구먼! 아저씨, 아주 잘 만났네요. 오늘은 나였군요! 

     

그 남자는 아랑곳없었다. 계속 개는 안된다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나는 신고하시라 응수하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상인이 아니야. 대응하지 마, 절대 안 돼!!" 


남편은 나를 잘 안다. 

위험하니 아무 말 말고 피하라고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는 것을. 

남편이 피하라는 건 내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서가 아니라_ 다윈이 스트레스 받을까 걱정 되서다.     

나는 내가 지킨다.

그리고 이제, 다윈도 내가 지킨다!



그 남자는 슈나우저와 함께 육상 트랙을 걷고 있는 어린아이에게도 소리를 쳐댔다. 열 살쯤 된 아이한테 신고란 소리를 하다니_ 정말 듣던 대로였다. 약자들만 골라 시비를 걸고, 마치 자신이 정의와 질서의 수호자라도 되는 듯 공원이 자신의 영역이나 되는 듯- 뜻대로 통제하려 한다. 약자보다도 더 약한 대상인 '개'를 타도할 타겟으로 삼고는, 악당을 물리치고 공원의 평화를 지켰다는 자긍심에 뿌듯해한다. 고분고분 납죽 엎드리며 일단 말을 들어주면, 다음부터 개와 함께 산책해도 프리패스고, 상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까지 선동하며 '이 사람들도 다 불편해한다'는 식의 거짓된 군중 심리를 이용해서 약자를 곤경에 빠뜨리고 몰아붙인다. 공원 관리자라는 사칭과 '이 개 때문에 공원이 더러워졌다'는 황당무계한 모욕은 덤이다. 


이처럼 올드하고 격 떨어지는 전략이라니. 같은 호모 사피엔스 종(種)으로서 딱하기 짝이 없다. 자기의 존재를 저런 식으로 증명받고 싶은 걸까. 자신이 공원의 히어로라는 사명감은 누가 심어주었을까. 


아랑곳 없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산책을 계속하는데, 반대쪽 끝 멀리까지 가서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다른 사람은 정중히 다 나갔는데 저 여자만 안 나간다'면서_ 옆에 계시던 아주머니를 붙잡고 호소하는 빌런.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왜 신고 안 하세요? 제가 대신 신고해드릴게요. 경범죄가 뭔지나 알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기 CCTV에 내가 증거로 제출하려니까 계속 오라구요! 왜 개를 데리고 오면 안 되는지 내가 보여줄게!" 


그는 비장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내가 모르는 공문서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체육공원 출입 조항이 바뀌었나? 잠자코 핸드폰을 같이 보던 나는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세상에. 똥이잖아. 

어떤 합법적 증명이나 논리를 기대한 나에게_ 그가 보여준 것은 앨범을 가득 채운 개똥 컬렉션이었다.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오랫동안 성실하게 쌓아두었던 그의 개똥 일지.  

다채로운 종류의 개똥 사진을 하나하나 열심히 찍어 모으고 있었다. 


"개 똥 사진을 엄청나게 모아놨어요! 보호자 개가 똥을 안 싸도, 어떤 사람은 치웠다고 똥 봉투까지 보여줘도- 안 듣고 무조건 나가라는 거예요."


시츄 엄마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아, 이게 그런 말이었구나.  

웃음이 터져 버렸다. 이 정도의 열정과 지구력이라면 뭐라도 됐을 텐데, 똥 탐정이라니... 

이 사람이랑 얘기해봤자 뭘 해, 아무리 내가 개엄마로서 내 새끼 때문에 이성을 잃었대도, '똥똥' 거리면서까지 싸울 생각은 없다.

이렇게나 날씨도 예쁘고 공기마저 행복한 날에 개똥을 찾아다니며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을 그를 생각하니 불쌍하기까지 하다. 개똥을 찾은 날도, 못 찾은 날도 이 사람의 머릿속은 똥 같은 똥 생각으로 가득 찼을 테니까. 어떤 아이에게는 버럭 역정을 내며 그들과 상관 없는 쓰레기를 줍고 치우라 명령하고, 어떤 보호자에게는 개똥 DNA를 분석하겠다고 듣기도 창피한 협박을 했단다. 어쩌다 그는 이렇게 너절한 환경 운동가가 되었나. 사람이 얼마나 망가지면 개똥을 빌미 삼아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할까.   


그날의 산책은 허탈함과 함께 끝이 났고,

나는 전화를 받고 달려온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혼자 산책을 나와 있었던 '여름'이와 엄마가 빌런의 타겟이었다. 

참는 것도 정도가 있다 싶어 경찰서에 신고를 하셨고_ 때마침 나온 '구름'이와 엄마도 거들어주셨다. 구름이 엄마의 비상 연락에 6둥이 시츄 엄마와 나까지 달려나오니 그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항상 모두가 혼자여서 꼼짝없이 당해왔으니 말이다. 


우리 넷은 당당히 개들을 놀게 놔두었다. 경찰관도 계속해서 경고를 했지만, 그는 이미 정상적인 대화나 논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눈빛이었다. 독립 열사처럼 결의에 차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개똥철학에 대해 열변을 토하니- 내가 민망할 지경이다. 순하고 착한 보니마저 헛소리인 걸 아는지 빌런이 말할 때마다 함께 짖어 준다. 여름이가 짖어주니 구름이도 몇 번 거들어 주고_ 개만도 못한 소리를 개소리가 덮어주니 훨씬 더 듣기 좋다. 안그래도 바쁘고 힘든데 도저히 답이 없는 이 아저씨 때문에 화가 잔뜩 난 경찰관들. 아무리 경고를 해도 소용이 없으니 이판사판, 싸움으로 번질 뻔 했다.             


"요즘들어 부쩍 저 분 신고가 많이 들어와요. 그래도 저희가 물리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는 없으니까_ 그냥 계속 신고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억지를 쓰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협박한다고 해도 할 수 없지. 위험하고 폭력적인 언행은 항상 아슬아슬해서 손 쓸 수가 없는데, 공원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신고하니 경찰들도 차라리 하나만 걸려라 하는 속내인 것 같았다. 


우리에게 열심히 신고하라는 뼈 있는 말을 하고 돌아서는 경찰관을 뒤로 하고, 개엄마 넷만 남았다. 그 빌런은 여기 저기 옮겨다니며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 같았는데, 그걸 보니 더 속이 뒤집어졌다. 

경찰들도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버렸고... 이 약자들이 어떻게 저 악당을 물리친담. 

 

아저씨, 딱 걸렸어.

오늘만 살 듯 설치는 악당은, 내일도 내 새끼 지킬 엄마한테 쨉도 안된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다윈, 가서 물어! 그냥 콱 물어 버려." 


"저기요! 선생님한테는 저 '할아버지'가 뭐라고 안했어요? 선생님처럼 남자한테는 안그러는데, 여자랑 아이들만 나가라고 공격해요. 너무 무서워요!" 


"아저씨가 나가요! 나가라고!! 어?! 어딜 만져요?! 어머나, 지금 제 가슴 만지신 거예요?" 


"정말 미쳤나 봐! 어딜 만져요!! 성추행으로 고소할 거예요!" 


손자병법에서는 애초에 싸우지 말고 적을 굴복시키라 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함무라비 전략을 써야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치졸한 방법에는 더 유치하게.  


빌런이 깜짝 놀라서 허공에 던지는 헛소리들을 해댄다. 

옆에 있던 학생들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하다가, 우리 음성을 다 녹음했다고 했다가, 이 넓은 공원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똥 컬렉션을 보여주기도 하고_ 참 바쁘시다.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 외면하고 피하는 게 멀리서도 보인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따로 없다.    

듣다듣다 기가 찬 어떤 아저씨는 찌질한 짓 하지 말라고, 다같이 이용하는 공원에서 왜 당신이 된다 안된다 하는 거냐고 합세해 열심히 싸워주신다. 한바탕 또 난동을 부리더니 지친 빌런은 어느 새 사라지고 없다.    


그 후로_ 우리는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혼자 있다가 악당을 만나면 서로에게 연락해서 바로 한 팀이 되어 주고, 그리고 혹여 혼자라면 무조건 신고하기로 했다. 행여 다른 견주들이 있으면 또 함께 해야지.  

약자들이 뭉치면 얼마나 강해지는지 제대로 보여주겠어!      



"오늘도 안 나왔네요." 


망원동 어벤저스 개엄마들이 며칠 째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치명타를 입기는 했나보다, 갖은 전투에도 포기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이 공원 명물 역할을 톡톡히 해왔는데.      

요 며칠 특히 뜨거워진 날씨로 컨디션에 문제가 생기신 걸까, 아니면 다른 공원을 찾아 개 똥 사진 출사라도 간 걸까. 하지만 방심하지 않겠다. 또 우리 개딸, 개아들의 평화로운 산책을 방해하는 어떤 악당이 등장할지 모르니까. 빌런들아, 평화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망원 어벤저스 개엄마들이 게임을 끝내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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