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너그러움에 대하여
"절대 용서 안 해. 복수할 거야!"
"용서 못해, 죽을 때까지 안 잊어."
회사 다니며 내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그때는 특히나 매일매일 가슴과 입에 서슬 퍼런 칼을 품고 있었는데, 매일 아침잠에서 깨어 산발한 머리를 하고서는 상쾌한 기분으로 이런 말들을 읊조리며 칼춤을 춰댔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둥, 용서 못한다는 둥 하며.
뭐 그리 미워할 사람이, 분노할 일이 많았을까. 뭣이 그렇게도 구구절절한 사연과 천인공노할 잘못이 있었을까. 모르겠다. 지금은 거의 기억도 안 날 일이거나, 아직까지 생생해서 마음속 딱쟁이와 깊은 흉이 졌대도- 앞으로 펼쳐질 창창한 내 삶에 조금의 영향도 주지 못할 추억일 뿐인 것을. 하지만 한 때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옛 연인의 모진 말, 끝내 제대로 풀지 못한 친한 친구와의 오해, 그리고 어쩌면 평생 풀 수 없이 품고 가야 할 가족이 안긴 상처... 이런 건 또 어찌 그리 쉽게 용서가 되겠는가. 나는 아직도 이렇게나 아프고, 아직까지도 그 일들 때문에 삐걱대고 있는데 말이다.
"아, 다윈.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 저녁 산책 못 가겠다, 미안."
"아이고, 발 밟았어? 못 봤어, 미안해."
"다윈아. 우리 여름이가 물었어? 미안해~"
내 부탁을 까맣게 잊은 남편이 자기 고기를 구우며 다윈의 저녁을 빼먹었을 때도, 강아지 친구가 다윈의 간식을 우걱우걱 뺏어 먹었을 때도 다윈은 쉽게도 용서해 주었다. 손 내밀며 눈 맞추면, 금세 멈췄던 꼬리콥터를 풀가동하며 같이 눈을 맞춰 준다. 가끔은 속 좋게 웃기까지 하면서 인자한 눈망울로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하고 말해주는 것 같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양말을 물고 와서는 한바탕 화해의 터그 놀이나 하자니 말이다. 어떤 때는 상대가 용서를 구하지 않았어도- 다윈은 후드득 온몸을 한 번 털어내고는 바로 잊어버린다.
이렇게 바보처럼, 호구처럼- 무작정 너그럽기만 하다고 되는 걸까? 다윈은 왜 이렇게 속이 없을까.
"착하기만 하면 뭘 해? 바보처럼 당하기만 하잖아. 다른 개들도 다윈을 만만하게 봐. 장난감도 막 뺏어가고, 아무 짓 안 했어도 다윈한테만 막 짖고 으르렁거려."
"다윈은 그런 일 당해도 신경도 안 쓰는 거야. 너처럼 일일이 반응하면서 길길이 날뛰고 상처 받는 것보다는 낫지 뭘 그래? 다윈은 착한 게 아니라 강한 건데."
"강하다니 무슨 소리야. 다윈한테만 몸 박치기도 엄청 심하게 하고- 이 녀석은 놀 때도 꼭 발라당 드러누워서 항복하는 자세로 있다고!"
난 깨나 진지했다. 정말 이 험난한 세상에서, 이렇게 쉽게 져 주고 벨도 없이 용서해주고, 때로는 용서랄 것도 없이 허허 웃어넘기는 태도는 위험하다고. 결국 계속 상처만 받을 거 아냐! 그러다 나중에 나처럼 쌈닭이 되면 어떡해...
하지만 다윈이 커가는 걸 보며 난 알게 되었다. 다윈은 그저 스스로와 주변의 사람들, 강아지들이 즐거운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설령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화나게 하는 상황이 벌어져도, 다윈은 한 걸음 떨어져 있다가 다시 다가가 용서하고는_ 기꺼이 받아들인다. 너무 지나치다 싶어도, 그저 몸을 한 번 시원하게 털어버리면 그만이다. 복종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재미있게 놀자는 의미로 발라당 배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낮춘다. 무슨 일이 닥쳐도 다윈은 상처 받지 않는다. 앙금 없이 용서하고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리기에_ 다윈은 항상 행복하다.
다윈이 어릴 적, 산책만 나서면 길에 떨어진 온갖 쓰레기에 코를 킁킁대고 길에 난 풀은 모조리 다 뜯어먹었다. 뱉으라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와구와구 씹으며 안된다고 하는 순간 꿀떡, 삼켜버린다. 자기도 불편했는지 속을 게워내면 새파란 풀과 지푸라기들이 한가득, 응가를 해도 푸릇푸릇 이름 모를 풀들이 한 뭉텅이니- 나로서는 애가 타고 답답할 지경이었다. 어느 날은 참다 참다못해 풀을 꿀꺽하는 다윈에게 "안돼!" 하고 빽 소리를 지르고는 궁둥이를 퍼뜩 때렸다. 그러자 다윈은 겁에 질려 귀를 축 늘어뜨리고 꼬리를 감춰버렸다.
엇, 이게 아닌데? 엉덩이를 맞은 다윈도, 때린 나도 서로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했다. 그저 다윈이 깜짝 놀랐다가 '이걸 먹지 말라는 건가' 하고 인지할 수 있겠지 정도로만 생각했는데_ 이렇게나 무서워할 정도로 충격받을 줄은 몰랐다. 나 또한 순간적으로 얼어버렸고, 어떻게 해야 다윈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렇지만 두려움에 떠는 다윈 앞에서 가만히 쳐다보며 생각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난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 그렇게 좋은 일만 겪게 하겠다고, 나쁜 경험은 절대 안 줄 거라고 애지중지 해놓고는- 내가 다윈에게 가해자가 되어 제일 끔찍한 순간을 안겨줬다. 절대로, 어떤 변명으로라도, 아무리 살살이었다고 해도_ 다윈을 때렸다. 겁에 질려 덜덜 떠는 다윈을 보니 눈물이 터져버렸다. 차마 멀리 피하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나를 바라보는 그 슬픈 눈과 마주치자, 나는 다윈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다윈,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잘못했어. 너무너무 미안해."
다윈은 내 손을 잠시 가만히 쳐다보다가- 망설임도 없이 포옥. 나에게 안겼다. 경망한 개엄마의 참회의 눈물을, 뎅겅 뎅겅 마음을 벨 날카로운 소리를 내뱉고는 또 금세 염치도 없이 잘못을 비는 입을 씻어주듯 핥으며_ 다윈의 슬픈 눈은 어느새 온화하게 바뀌었다. 마치 "괜찮아. 울지 마." 하고 나에게 속삭이는 듯, 넓은 도량으로 나를 다독이고 있었다. 나 또한 소중한 누군가에게 간절히 용서를 구할 일이 생겼다. 차라리 아프고 슬펐다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용서는 생각해볼 테니 계속 반성하라고나 하지... 이토록 따뜻하고 자비로운 용서를 받고 나니- 내가 얼마나 작디작은 인간이었는가를 느끼며, 마치 다윈에게 참회하면서 새롭게 태어난 기분마저 든다.
이렇게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가. 내가 다윈처럼 연약했던 시절, 차마 멀리 도망치지도 못하고 몸과 마음을 웅크리고는 그저 상처 받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만 볼뿐이던 때- 나는 그때의 일들을 아직도 곱씹으며 원망하기도, 후회하기도 하는데, 다윈은 뭐가 이렇게 쉬울까. 벌써 용서하고 날 진정시키고는_ 내 기분을 살피고 있다. "난 아까 용서했어. 그러니까 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 하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 다윈은 이미 잊었다. 내 품에 안기기로 했을 때 이미 내 잘못도 품어 주었다. 내게 몸을 맡기는 순간, 다윈은 용서하고 다시 행복해졌다.
얽매이는 건 나뿐이다. 그들은 모두 잊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때에 살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그들을 괘씸해하며 순간순간 발끈하고 빠직빠직 뒷골이 당기도록 썽낸다. 부처의 말씀처럼 원한을 품으며 다른 사람에게 던지려고 뜨거운 석탄 덩어리를 손에 쥐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화상을 입는 것은 나다.
남편의 말대로 다윈은 강하다. 용서하고, 털어내며, 얽매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못하면_ 불편함은 표시하되, 담아두지 않는다. 못 견딜 정도면 거리를 두며 상황을 종료시킬 줄 알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다시 다가가 또 같이 뒤섞여 놀 줄 안다. 불쾌함을 다루는 방식도 이토록이나 우아한 녀석이다. 상대가 잘못을 빌든 말든_ 이미 너덜너덜하고 다 헤져 못쓰게 되 버린 터그 장난감처럼 상처받은 마음을 툭, 놓아 버리고는 뒤도 안돌아본다. 계속 상처만 쌓여서 결국 나를 지키겠다고, 아무도 용서하지 않겠다면서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가는 나보다_ 다윈이 훨씬 더 강하다.
톨스토이가 그랬다지. 그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그게 누구든 잊고 용서할 때_ 용서한다는 행복을 알 수 있다고. 다윈은 항상 행복하고 자유로운데, 나는 아직 멀었다. 노력은 해보겠지만 어쩌면 살면서 한 두명 쯤은, 평생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를 위해, 다윈처럼 놓는 연습을 하려한다. 그렇게 다윈처럼 강해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