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강아지는 철학자였다.
"하. 이건 도대체 무슨 헛소리냐고! 완전 사이비 종교잖아!"
대학 시절, 시험 기간에만 반짝 되도 않는 머리로 급한 마음에 책을 펼치니_ 첫 장부터 무슨 요술 같고 허깨비 같은 말만 쓰여 있었다.
上善若水
지극히 착한 것은 물과 같다.
道常無爲而無不爲
도는 항상 무위 하지만, 그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노자 <도덕경>
세상에, 사기꾼이 따로 없구만. 사람들은 노자를 뭐가 위대한 철학자라고 떠받들었던 걸까, 차라리 위대한 문학가라고 하지.
나는 철학도였다. 당시 나는 동서양 철학을 모두 공부했어야 했는데, 언행불일치는 기본이고, 실존이 어떻고 인식이 어떻고 하는 겉 멋든 서양 철학자들보다는_ '너 이번 생은 어떻게 살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듯한 동양 철학이 훨씬 더 실용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유교사상만큼 우리를 가슴 치는 답답이로 만드는 것은 또 없지만, 아는 대로 행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과 삶의 자세만큼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 복병은 도가철학이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둥, 비워야 채워진다는 둥_ 이건 뭐 한 편의 시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신비주의 종교 교의라 해야 할지... 이런 말장난들을 놓고 A3 답안지 앞뒤를 빼곡히 채워 답을 내야 하는데- 한숨만 나왔다. 그래, 도(道)라는 이 현묘함이 내 성적도 A+로 만들어 준다면! 어떻게든 정석적인 답을 써서 달달 외워버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먼지만 그득한 책장에서_ 책 곰팡이를 후후 불어내고 노자의 <도덕경>을 꺼내 든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최근의 일이다. 철학 공부는 역시나 나에게 밥을 먹여주지 않았고, 그동안 밥벌이와 앞도 답도 안 보이는 인생살이에 치여 까맣게 잊고 묻어두고 있었다. 다시 읽어보려고 꺼냈냐고? 그럴 리가. 살면서 노자와 마주치기 어디 그리 쉬운 시대인가. 다윈의 뒷다리 근육 운동을 위해 두꺼운 책을 고르다 이거다 싶었다. 하드 커버이면서 미끄럽지 않은 종이로 된_ 알맞게 두꺼운 책. 이제야 이 책에 딱 알맞은 용도를 찾았다.
정리정돈과 담을 쌓은 나는 다윈이 낮잠을 자는 방석 옆에 그 책을 그대로 두었다. 킁킁대며 책 냄새를 맡던 다윈은, 퀴퀴한 종이 냄새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앞발로 벅벅 긁고 입을 갖다 대려 한다. 그 바람에 오랜만에 활짝 펼쳐진 책. 10여 년 간 잠들어 있었던 노자 할아버지를 다시 불러낸 것이 한 마리의 개라는 사실을 알면- 노자는 어떤 기분일까? 공자와는 달리, 그는 별로 개의치 않고 '어, 나 불렀냐?' 하고 무덤덤하게 반가워할 것도 같다.
"다윈, 안 돼! 그거 내일 운동할 때 써야 돼. 근데 멋지다, 너?! 책도 좋아하고!"
다윈이 책을 찢어버리기 전에 덮으려니_ '무위자연 - 작위하지 않는 유유자적함'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규범, '성인(聖人)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침을 행한다.'니. 철 없이 방황하던 20대 시절과는 달리, 예전처럼 헛소리 같지는 않다. 이런 멋진 사람이 되는 게 얼마나 현실적으로 어려운지를 탄식하게 되는 나이가 되었달까.
펼쳐 든 김에 읽어 내려가는 노자의 수더분한 잔소리.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무심한 듯 툭, 툭_ 다독이며 일러주는 시골 할아버지 같다. 진작에 이 할아버지와 친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유유자적하는 나그네와도 같았던_ 내 대학 시절 학점도 조금 봐줄 만했을 테니 말이다.
오늘도 다윈과 운동장에 나가 공놀이를 한다. 이 작은 공 하나만 있으면 다윈은 몇 시간이고 행복하게 논다. 몇 번이고 물어오고, 또 날쌘돌이처럼 내달리며 공을 쫓는 녀석을 보니, 어쩜 저리도 소박하고 단순할까 싶다. 가끔 공이 이상한 구석으로 떨어져 공을 구출해야 할 때면 얼마나 열심인지 모른다. 높은 펜스를 차마 점프하지는 못하니 앞발로 열심히 땅을 파보기도 하고, 혹여 다른 길은 없는지 여기저기 어지간히도 바삐 움직인다. 펜스에 그물이 쳐져 있기라도 하면 그물이 느슨해서 몸이 통과할 수 있을만한 구멍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그러다 정 빼낼 수 없을 것 같은 철망 안 구석에 공이 박히기라도 하면- 다윈은 아무런 부끄러움과 괴로움 없이_ 나를 쳐다보고는 도움을 청한다. 처음에는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그러다 깨달았다. 다윈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안다. 못하고 부족한 자신의 모습에 욕심내고 괴로워하기는 커녕, 차라리 감사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할 줄 안다. 노는 것뿐인데도 목숨을 건 승부라도 하는 듯 내달려 공을 쫓고, 놓치면 놓치는 대로 더 빠른 친구에게 뺏기면 뺏기는 대로- 그저 열심히 달렸으니 그만이라는 듯, 공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_ 다윈이 참 멋지게 느껴진다.
다윈이 내게 펼쳐 준 노자의 이야기는 꽤 재밌었다. 아직 인생의 반도 달리지 못했지만 내 옆의 누군가들은 벌써 꿈꾸던 무언가를 이루고 성취해낸 나이, 삼십 대. 아직도 나는 그대로인 것 같지만 어른스러워야만 하고, 더 이상 실패하면 안 되고 이제는 무언가를 해내서 보여줘야 하는 인생의 이 시점에- 나는 다시 노자를 찾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집 개, 다윈이 찾아 주었다.
마치 그만 좀 애쓰고 그저 온전히 살아보라는 듯이.
그토록 사이비 같고 신비로웠던 말들은 내 가슴속에 꽂혀 뭉근한 위로가 되어준다. 억지로 하지 말고, 겸허히 놔두라는 말, 물 흐르 듯 그저 자유로이 흘러가며 살라는 말, 그리고 아름다움과 추함, 옳음과 그름, 죽음과 삶은 그저 변화일 뿐_ 모두 하나이니 분별로 괴로워할 것 없다는 말까지. '그러니까 열심히 아등바등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 하는 할아버지의 담백한 말씀. 이게 삶의 정답이지 무언가! 저 공이 가는 대로 열심히 뛰며 즐길 줄도 알고_ 공이 막다른 쪽으로 빠지는 대로 놓을 줄도 아는 다윈처럼 말이다.
내게 노자를 건네었듯, 다윈은 일상에서 나에게 삶을 일러주었다. 내가 서른이 넘어서도 행해보지 못한 이상적인 인간의 길을_ 한 살밖에 안된 다윈은 벌써 이루었다.
'성인(聖人)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침을 행한다.'
다윈은 내게 꾸지람 한 번 하지 않고 따뜻한 눈으로 웃으며 일러준다. 물처럼 소박하게_ 안 되는 것, 못 가질 것에 집착하며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한 살밖에 안됐지만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고, 도전하고 싶은 일은 즐겁게 노력한다. 아무리 점프해도 끝내 못 넘을 것 같으면_ 웃으며 포기할 줄 안다. 나는 왜 다윈이 하는 대로 하지 못할까.
"안 돼. 너무 커서 너랑 같이 못 놀아."
"안 돼. 너무 작은 친구라 네가 격하게 놀면 쟤는 다칠 수도 있어."
길을 가며 만나는 모든 강아지 친구들과 친구가 될 수는 없기에_ 나는 걱정과 조바심으로 다윈에게 인사조차 시키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몇 번, 정말 연약 하디 약해 보이는 치와와나 다윈과는 체력적으로 상대조차 안될 거구의 진돗개, 리트리버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다윈은 작으면 작은대로 소중하게, 크면 큰대로 실컷 달리며 그 누구와도 즐겁게 잘 놀아주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조마조마 불안해했던 상대편 보호자들까지 웃으며 지켜봐 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친구 아니야~' 하면서 강제로 지나치게 했던 나의 몽매함을, 다윈이 일깨워주었다. 눈으로 보이는 차이와 다름을 초연해야 진정한 도(道)를 알게 된다는 듯이. 종에 상관없이, 체고에 상관없이_ 그저 신나게 서로를 쫓으며 달리고, 몸을 부대끼는 개들을 보면 <도덕경>에서 말하는 조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개판'이지만_ 사실 그 너머에는 현묘한 도의 원리가 펼쳐져 있다. 차별하지 않고 구별함 없이, 그러면서도 서로 다름을 존중해줄 줄 아는 조화로운 삶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