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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색머리 Nov 15. 2016

별 헤던 밤

밤하늘 아래에서 시작된 이야기




1.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어렸을 적 종종 별이 보고 싶어서 동네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워두고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 시절 바람소리, 물소리, 벌레소리에 취하고 내 위로 쏟아지는 별빛에 취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열심히 따라갔더랬다. 스스로가 어른 같지만 아직 아이이던 나이에 그런 밤들은 가끔 새로운 생각도 하게 하고, 마음을 다잡게도 하고, 포기를 가르쳐도 주고, 나 자신을 사랑하게도 만들어주었다. 쏟아지는 별들 아래, 나는 한없이 작았지만 별빛만큼 빛났고 그만큼 특별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공부에, 일에, 사람들에 둘러싸여 별 헤던 밤과 멀어졌다. 평소 잊고 지내던 내 안의 낭만과 사색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때 가끔 찾아와 시간이 지나고 새로움이 사라지면 사그라들곤 했다. 새로운 관계가 주는 설렘과 고민과 갈등이 나를 내가 속한 현실로부터 잠시 멀어지게 할 때에도 나는 어릴 적의 별 헤던 밤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같은 종교 단체에서 처음 만났다. 피부가 희고 얼굴이 동그랬다. 모임에 새로운 사람이 왔다는 걸 알았지만 특별히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같이 새로 나온 사람 중에 키도 크고 잘생긴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 모임 후에 모두 같이 커피숍으로 가서 대화를 나누었다. 몇 마디 섞지는 않았지만, 느낌이 잘 통하던 사람이었다. 


이후, 어쩌다 그 사람과 사석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소신이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나누지는 않았지만 내 이야기를 듣는 모습에서 본인의 주장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시간과 노력을 소중히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그런 말들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 사람이 내 삶에 들어오고 우리는 굉장히 빠르고 깊게 친해졌다. 가벼운 장난부터 서로가 관심 있는 사회 문제에 대한 토론까지, 우리는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주제의 범위 또한 엄청나게 넓었다. 내가 가진 편협하고 얄팍한 생각에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끌어당기고 자극시켜주었다. 한쪽만 생각하던 나에게 다른 부분을 보여주기도 하고 의견을 내기도 했다. 


또 그는, 태어나서 처음 만난 나와 같은 음악 플레이 리스트를 가진 사람이었다. 내가 즐겨 듣는 노래들은 대부분 슬프고 우울하고 잔잔해서 내가 디제이를 맡으면 친구들에게 욕을 얻어먹기 일쑤였다. 어쩌다가 그 사람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연달아 나왔다. 너무 반갑고 놀라웠다. 그런 플레이 리스트를 듣는 사람이 또 있었다니! 




어느 날 저녁을 함께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렸을 적 이렇게 깜깜한 밤이면 강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 올라가 몇 시간이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더라고 이야기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며칠 후 연락이 와서, '오늘 별 보러 갈래?', 라며 그 사람이 물었다. 예전 생각도 나고 그 날 따라 밤 날씨가 선선하고 좋아서 너무 신나 하며 그러자고 했다. 


해가 지고 깜깜한 밤에 그 사람을 만나 어렸을 적 자주 가던 절벽엘 갔다. 절벽 밑 길가에 차를 주차시켜 두고 깜깜한 오르막 길을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여 올라갔다. 정상에 도착해서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이 내려다 보이고 드문드문 다리를 건너는 차의 소음과 그와 함께 지나쳐가는 붉고 따뜻한 불빛과 선선하게 머리를 넘기는 강바람과 공기 중 실려 다니는 풀 내음과 풀 벌레들의 찌르르하는 울음이 모두 어우러진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모든 것이 그대로인 그곳에, 내 옆 사람만 바뀌어 있었다. 


고개를 들면 반짝이는 별들이 박혀있고 흐릿한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서 강바람을 맞았다. 가만히 별을 바라보다 눈을 감고 주위 소음을 들었다. 내가 좋아하고 그 사람도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옛 생각을 하나 둘 꺼내기도 하고 그 사람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조용히 듣기도 했다. 


내가 데려간 곳의 경치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별을 보러 다른 곳에도 간 적이 있느냐고 묻길래, 차로 반시 간 정도 떨어진 곳에 더 어둡고 조용한 호수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때가 밤 11시 정도였는데 그 사람이 별이 더 잘 보이는 곳에 가보고 싶다고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다녀오면 밤이 늦을 것도 같고 조금은 피곤도 했지만 얼마 만에 별을 보러 나온 자리인데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더 어둡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오래되어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따라 나무가 우거지고 굽이진 길을 들어갔다. 혹여 산짐승이 있을까 조심조심 한참을 들어가니 공원 입구가 나왔다. 밤이 늦어 공원 주차장 앞을 막아놨지만, 이 시간에 누가 올 것도 아닌데 뭐 어떨까, 싶어 그 앞에 대충 차를 세워두고 바리케이드를 넘어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옛 생각이 나서 조금은 마음이 들뜨고 조금은 급해져서 발걸음을 빨리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핸드폰 불빛을 비추며 주차장을 지나 호수 한가운데로 길게 뻗어있는 보트 선착장을 따라 걷다, 이쯤이면 괜찮겠다 싶어 아스팔트 바닥에 차에서 꺼내온 얇은 무릎담요를 깔고 나란히 누웠다. 담요가 작아 엉덩이는 맨바닥에 대고 등허리부터 머리만 담요 위에 간신히 뉘이니 그 사람과 한쪽 팔이며 어깨가 딱 붙어있게 되었다. 잠시 맣닿은 팔뚝이 신경 쓰였지만 어둡게 짙푸른 하늘과 수없이 반짝거리는 별들에 금방 말과 생각을 잃었다. 왠지 먹먹한 마음은 내가 바라보는 풍경 탓 인지, 그 아래에 누워있는 나의 열심히 살아낸 지난 날들 때문인지. 무언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내가 그동안 잊고 살던 것들 때문인지, 지금 다시 이곳에 찾아온 나에 대한 기특함인지. 나도, 그 사람도 한참 말이 없었다.




그날 우리는 눈 시리도록 아름다운 여름 밤하늘 아래에서 정말 깊은 대화를 오래도록 나누었다.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고, 서로의 지난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 날 그곳에서 잊었던 나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그 자리가 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사람과 함께였고 그 사람 때문에 완성됐다는 걸, 나는 그와 사랑에 빠지고 난 다음에야 인정했다.




-스물넷, 여름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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