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자다. 내 생물학적 성(biological sex)도 여성이고, 내 성적 정체성(sexual identity)도 여성이다.
자라면서 나는, 스스로를 굉장히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주변의 독립적이고 지적이며 섹시하고 능력 있고 에너지 넘치는 언니들을 보며 '나도 저런 멋진 여성으로 자라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조두순 사건'이 일어나 한국이 떠들썩했다. 미국에서 살던 나는 사건의 전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고, 그 이후 크고 작은 성폭행 사건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의 국립 성폭행 자료 센터(National Sexual Violence Resource Center)에 따르면, '여자 다섯 명 중 한 명, 그리고 남자 일흔 한명중 한 명꼴로 생에 언젠가 성폭행을 당한다'는 통계가 있다. (본문 첫 번째 항목) 나는 여성 전체 인구의 20%라는 높은 성폭행 피해자의 비율에 경악했고,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강한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 교양수업으로 심리학을 선택했다. 나는 이야기를 너무 재밌고 이해하기 쉽게 강의하시는 심리학 선생님이 너무 좋았고, 때문에 심리학 수업을 정말 열심히 들었다. 고등학교 수업이고, 한 학기짜리 교양수업이라 기본적인 철학과 심리학의 역사에 대해 배웠을 뿐이지만,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 상태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하였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다양한 심리학 수업과 인간의 성생활 (Human Sexuality) 수업을 수강했고, 육체적인 성폭행 말고도 정신적인 성폭행과 2차 성폭행 등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알고 지내던 한국인 언니가 과거에 자신이 성폭행당했던 경험을 힘들게 털어놓았다. 사건의 가해자는 나도 알고 있는 학교 선배였고, 나는 그 선배가 굉장히 독실한 신자이며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선배의 모습으로 학부를 졸업하고 의대에 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지인들 사이에서는 그 선배가 술에 취해 성추행 한 여자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 했지만, 그 누구도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으며 그 일을 따지고 나서지 않았다. 나는 '만약 내가 성폭행 피해자가 된다면 결코 그 가해자가 내 주변을 떳떳하게 고개 들고 돌아다니지 않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에서 나는 동성애자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미국의 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동성애자 비율이 미국인 열 명 중 한 명꼴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대학교 심리학 수업과 인간의 성생활 수업에서 '전체 인구 네 명 중 한 명 꼴로 동성애를 할 수 있다'고 배웠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동성애를 할 수 있다'는 '동성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확률이 있다' 혹은 '동성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 '날 때부터 동성애자이다'라거나 '동성 성교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동성애자 친구들과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가진 경험에 대해 간접적으로 많이 배우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이 겪는 수많은 차별과 편견과 유형무형한 폭력에 마음이 아팠다. 내 가장 친한 친구는 레즈비언인데, 어렸을 때 친아빠에게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하며 자랐다. 그 친구가 초등학교에 입학도 하기 전부터, 그녀의 아빠는 샤워실에 그녀를 데리고 들어가서 강간을 했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는 성인이 되고 나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남동생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와서 나와 같이 살게 되었다. 가족과 떨어져 자취를 하다가 오랜만에 동생과 한 집에서 단 둘이 생활을 하니까 싸움이 잦았다. 동생은 떨어져 살던 2년 새에 사춘기가 와 있었고, 체격이 커졌으며, 힘이 세져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동생이 이제는 더 이상 내 주먹 한방에 울음을 터뜨리던 꼬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고, 동생도 오랜만에 만난 내가 자신이 휘두른 손찌검에 날아가 벽에 부딪힐 만큼 약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같이 살기 시작해서 초반 몇 개월을 우리는 정말 박 터지게 싸웠고 모든 싸움은 둘 다 만신창이가 되어 아무런 승자 없이 끝이 났다. 내가 동생이 성인 남자라는 걸 받아들이고, 동생이 내가 자기보다 한참 약한 여자라는 걸 받아들이고 난 후, 우리는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냈다.
대학교 3학년 때, 나는 성폭행 사건을 조사하며 사건의 피해자에 감정 이입하여 힘들어했다. 내게는 '남성'에 대한 기본적인 반감과 근원적인 혐오가 자라고 있었고, 동생과 남자 친구는 내 가장 가까운 주변 남자로 있으면서 내 부정적인 시선과 생각을 고스란히 받았다. 동생은 내가 자신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긴다며 화를 냈고, 남자 친구는 혹시 내가 자기가 모르는 새 어딘가에서 안 좋은 일을 겪은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나는 성폭행당한 적이 없었다. 내 반감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여자로서 '남자보다 약한 존재'라는 것과,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과, 언제 어디에서 크고 작은 위험에 노출될지 모르니 '몸을 사리고 조심해야 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자라났다. 나는 내가 나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힘이 센 주위 남자에게 내 안위를 맡겨야 한다는 개념이 역겨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내 남자 친구의 두껍고 단단한 팔뚝이 듬직하다고 느꼈다. 나를 향할 수 있는 '혹시 모르는 폭력'의 가해자의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남성이었고, 그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힘도 남성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크고 작은 위험에 노출될지 모르는 건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는 '남자보다 약한 여성'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의 차이에 화가 나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친구가 집에서 파티를 자주 열었는데, 그 파티에 갔다가 밤이 늦어 모두 그 집에서 자게 되었다. 대여섯 명이 침대며 소파며 바닥이며 자리 잡고 잠깐 눈을 붙였는데, 자다가 기척을 느껴 깨보니 나를 짝사랑하던 한 남자가 잠든 내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 나는 놀랐고, 당황했고, 무엇보다 어이가 없었으며, 짜증이 났지만, 내가 잠에서 깼다는 티도 내지 못하고 그냥 잠결에 뒤척이는 척 몸을 돌려버렸다. 그냥 기분이 나빴고 화는 나지 않았다. 그 남자가 한심하고 불쌍했다. 그 후로도 그 남자에게 내가 그 일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 다닐 때, 혼자 집 근처 미술관 전시 오프닝 파티를 갔는데 거기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 어떤 아저씨에게 스폰서 제의를 받았다. 나는 이미 충분히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말하며, 그 아저씨 말을 그냥 웃어넘겼다.
친구가 마사지를 받고 싶다고 해서 같이 마사지 샾에 갔는데, 30대 초중반 정도 돼 보이는 중국인 남자가 내 마사지사였다. 웃옷을 벗고 엎드려 누워서 등 마사지를 친구와 같이 받았는데 마사지가 끝날무렾 남자가 바지 위로 내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나는 엎드려서 굉장히 어리둥절 했지만 그게 '마사지의 일부인가?'라고 생각했다. 마사지가 끝나고 친구에게 물어보니 친구는 엉덩이 근처에 손도 대지 않더라고 말했다. 엉덩이를 때린 게 마사지의 일부라고 생각한 나 스스로가 너무 어이없고 웃겼다. 화는 나지 않았다.
어떤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그 남자를 참 많이 좋아했다. 하루는 그 남자 집에서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고 나니 밤이 늦어 그냥 같이 자기로 하고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나 근데 아직 너랑 섹스할 생각은 없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남자가 "네가 하고 싶을 때 하자"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잤다. 며칠 후, 또 그 남자 집에서 같이 자기로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 남자가 키스를 하고 내 몸을 만지고 옷을 벗기려고 하였다. 속옷 속으로 손을 넣으려고 하기에 내가 막으며, "나 아직 아닌 거 같은데"라고 말하니 그 남자가 나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나를 설득해서 섹스를 하려는 그가 그 순간 너무 매력 없고 싫어져서, "넌 지금 섹스가 하고 싶은 거잖아"라고 말하니, 그가 화가 나서 집을 나갔다. 나는 그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침대에 누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후 그를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는 집 앞 나무 앞에 앉아있었다. 내가 그 앞으로 가, "네가 그렇게 설득을 하는 건 나에게 강요로 다가와. 네가 강요를 했다는 게 아니라, 너가 아까처럼 나를 설득하면, 나는 내 원래 기분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랑 섹스를 해야한다고 느낀다는 거야. 나는 널 좋아하고, 널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그냥 네가 나를 섹스에 미친 사람처럼 말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났을 뿐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그를 달래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그날 밤 그는 나와 섹스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전에 마사지사가 내 엉덩이를 때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웃으며 하는데 그 사람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 사람은 나에게 화를 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너는 그 일이 왜 화가 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전에 스폰서 제의받았던 이야기를 꺼내며, '그 일이 너에겐 기분 나쁘지 않냐'고 물었다. 내가 말했다. "그 일들 중 내가 잘못한 건 없어. 나는 가만히 있었고 그 일이 일어났을 뿐이야.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건데?"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화를 내지 않아? 너는 네 몸이 귀하지 않니?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네가 조심하고 다니고, 그런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 따져야지. 그 일이 왜 너는 그저 웃긴 건데." 나는 그가 나에게 그 모든 일들의 책임을 씌우는 것 같아서 화를 냈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그런 일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생기지만, 네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는 거야. 그런 일이 많으니까 네가 수많은 피해자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네가 그런 일을 당해도 되는 게 아니잖아. 당하면 화를 내고 따져야 하는 거야."
그 대화 이후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맹세코 내가 성폭행 피해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생각을 꺼내면 꺼낼수록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초등학생 때, 중학생 때, 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사실 나는 이미 미국 여성 인구 20%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성폭력을 당하면 가해자를 고개 들고 떳떳하게 살지 못하게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만들지 못했다. 내가 기분 나빴던 경험들과 불쾌하고 황당했던 경험들 중, 내가 화를 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기분 나쁜 경험을 겪으면 화를 내고 따져야 한다고 말해주었던, 내가 너무나도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남자 또한, 연애 기간 동안 나를 어르고 설득하며 내가 원치 않는 섹스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