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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색머리 Jun 28. 2017

나를 사랑하는 시간

지난 일을 끊임없이 되감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자학하며 끝없이 무너져 내렸던, 겨울이 지났다. 그 겨울, 나는 매 초를 버티고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내 안에 가득 들어와서 복잡한 머릿속 모든 생각들을 얼려버릴 수 있도록, 집의 모든 창을 열어둔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창밖을 바라봤다. 집 밖으로 걸음을 내딛으면 머릿속에 너무나도 선명히 남아있는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게 될까 봐 나 스스로를 집안에 가두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새벽 3시 반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수면장애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처음 경험했다. 다시 잠들지 못해 해가 뜰 때까지 뒤척이는 걸 반복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한밤중에 잠에서 깨면 침실을 나와 책상 앞에 앉아서 일을 했다. 새벽 4시에 일을 시작하니, 그 날 계획한 분량의 일을 끝내면 점심때였다. 매일 그렇게 한나절씩 시간이 남아서 외출을 하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킥복싱 짐에 등록해 운동을 시작했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데이트를 하지 않으니 돈이 남아서 쇼핑을 다녔다. 일의 효율이 오르니 진행하고 있던 사업이 속도가 붙었고, 그 결과물 덕분에 프로젝트 하나를 따고, 또 어떤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늘 같은 풍경이던 옷장을 뒤집어엎어 새 옷과 신발과 가방을 채워 넣었고, 몇 년 만에 붓을 들어 하얀 캔버스에 색을 입혔다. 어느 날 거울 속 내 얼굴을 보았더니, 어느새 눈물은 말랐고 입술은 붉었다.




삶이 바빠지니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 시간이 좋았다. 하루를 따뜻한 물에 녹여 씻어내고 나서 바디로션을 바를 때 내 살갗의 부드러움이 좋았다. 혼자 사는 집에서 거추장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넓은 침대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구르는 기분이 좋았고, 새벽녘 어슴푸레 동이 밝아올 때 침대 머리맡 넓은 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어린아이들 스쿨버스 기다리는 소리가 좋았다. 


나는 사랑을 계속했다. 내 지난 모든 시간을 사랑했고, 그 곁에서 내게 잊을 수 없는 행복과 즐거움과 기쁨과 슬픔과 절망과 고통을 주었던 그 모든 사랑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오도카니 남은 평화를 사랑했다. 온전히 나를 사랑하고 나를 생각하는 이 시간을 사랑했다. 누군가 요새 만나는 사람 없어?라고 물으면, 나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요새 나 너무 행복해, 혼자." 


누군가 곁에 있을 때에 나는 너무나도 외로웠는데, 아무도 곁에 없는 시간의 나는 전혀 외롭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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