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누룽지 Aug 02. 2021

Ep30. 누군가의 비망록

서른 번째 방울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어느덧 <자유로운 30방울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을 순간이 왔다. 작년 7월에 한창 코로나로 국가 간 여행이 중단됨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이 시점에서 세상에 대한 시선이나 좋아하는 책에 대하여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 시작한 이 매거진은 자그마치 1년 만에 마칠 수 있게 되었다.(종종 다른 장르도 다루기는 했다.) 한편으로는 고작 30편의 글을 작성하는데 1년이 걸렸다는 것이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데, 대학교 마지막 학년의 진부한 변명이지만, 생각보다 할 일이 많다. 그럼에도 한 작품 한 작품에 정성을 다했다는 것에 자그마한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  

 1년 전, (당시에) 호기롭게 시작한 첫 작품을 다시 보면서 느낀 것은 그 당시에 여행에 관련한 글을 계속 작성하고 있었던 시기인지라, 감정적인 부분을 세세하게 드러내기 위해 소위 예쁜 단어 혹은 수려한 문장을 써서 내가 가진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풋풋하고 어린 신입처럼 아는 것도 없지만 할 말은 많은, 감정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는 귀여운 글. 아직은 서투른 것이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성장하면서 어렸던 순간을 항상 되돌아보며 부족했고, 부끄러웠던 나를 질책하거나 보듬어가며 새로운 출발을 준비할 것이다. 나의 시간도 그렇게 흘러갈 테다. 그렇다면 5년 뒤, 10년 뒤, 혹은 정말 말도 안 되지만 100년 뒤에도 내 글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할 작품은 예브게니 보돌라스킨의 장편 소설 <비행사>이다. 


#플라토노프의 연대기

 플라토노프는 병실에서 눈을 뜬다. 자신이 1900년대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침침하고 차가운 이 병실에서 그는 주치의 가이거를 만나 이야기를 하지만 본인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스스로가 기억해내기를 독려한다. 한 가지 수상한 것은 자신이 작성하려는 저널에 꽂힌 이상한 물건이다. 간호사가 두고 간 이 물건은 딸깍 소리를 내며 펜의 심을 뿜어낸다. 또한, 점점 몸이 회복되면서(왜 아픈지도 알 수 없다.) 가이거는 새로운 경험을 하도록 돕는다. 이토록 보지 못했던 것들의 향연인 도시는 자신이 1999년에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려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어렸을 적,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의 아버지가 당시 공산당의 반역자로 고발을 당해 죽음으로 내몰린 슬픔과 분노로 그를 고발한 자신의 이웃을 죽음으로 되갚고, 수용소에서 죽음 대신 냉동 실험의 피실험자가 되어 냉동의 상태에서 해동된 것을 깨닫게 된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70년 정도인 것이다. 그는 이제 90대의 실제 나이를 가진 20대의 몸으로 새로운 시대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시대를 초월한 혼란과 고뇌, 그리고 죽음

 이제 세상에 조금씩 눈을 뜨는 인노켄티 플라토노프는 자신의 비망록을 작성해나간다. 자신이 보는 모든 것과 기억해 냈던 것, 사랑했던 것, 모두를 작성한다. 그러는 동안 70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는 공허함과 허무함을 느껴야만 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빈 시간 속에 놓인 고독과 외로움 그것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사랑했던 이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으며 그가 간직했던 것들은 낡고 허물었다. 세상과는 동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까?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의사 가이거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와 똑 닮은 그녀의 손녀 나스챠, 그리고 냉동 인간에 대한 일시적인 세간의 주목들 뿐이다. 사랑과 믿음, 우정 그리고 나름의 명예를 얻었더라도 그에게는 허울뿐일지도 모르는 1999년, 진실된 사랑과 믿음, 우정은 1920년에서 살아있음을, 세상이 두렵고 낯선 그는 계속해서 과거를 회상하고 순간을 느끼려고 한다. 하지만 그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사라져 가고 있다. 

 그리고 점점 플라토노프는 그의 사라진 세상처럼 기억을 잃어가고 몸이 퇴화되는 것을 느낀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적고 자신이 속한 일부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제 그는 떠나지만 그의 기록은 남아 누군가에게 전달될 비망록이 되어 다시 기록으로 또 기억으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것이다. 

  "뭘 그렇게 열심히 쓰세요?" "사물과 감정 등을 묘사하고 있어요. 사람들도요. 요즘 저는 매일 제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제가 기억하는 것들을 적고 있어요."
"그러기에는 신이 창조한 이 세계가 너무 거대하지 않을까요?"
"각자 자신이 속한 세계 즉, 이 세계의 일부를 적으면 됩니다. 하긴, 꼭 그 세계의 일부가 작다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요. 넓은 시야는 언제든 확보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를 테면요?"
"비행사처럼요." --비행사 中- 

#나의 비망록

 만약 당장 냉동인간으로 냉동되어 70년 후 다시 깨어나게 된다면, 2091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잠시나마 뛰어난 기술과 완전히 다른 세상은 우리를 매혹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고결하거나 환상적인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것처럼 말이다. 허나, 결국 2021년에 존재했던 작은 기억들은 다시금 소환될 것이다. 하지만, 기억들의 조각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들과 감각들을 표현하거나 다시 되살리기에는 영겁의 시간이 이를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플라토노프는 해동된 그 순간부터 그의 비망록에 모든 일을 적어 나갔다. 비록 그가 죽어 스스로 느낄 수 없을지라도 항상 그의 비망록에는 아름다운 모든 순간과 감정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글을 쓴다'라는 행위로 나의 비망록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인 듯하다. 정말로 70년의 세월을 냉동인간으로 지내다가 내 글을 보게 되지는 않겠지만, 나의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기에, 5년, 10년 혹은 더 먼 미래에 내가 쓴 글들을 봤을 때, 당시 내 안경을 비추던 햇빛, 또는 키보드를 누르면서 느껴지는 촉감과 참고하거나 읽은 책들을 다시 돌려보고 분석하던 열정의 시간들이 소환될 것이라 믿는다. 

 그때는 또 지금의 글들이 너무 삭막한 사막처럼 낭만이 없다고 욕하거나 비판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 그동안 <자유로운 30방울의 이야기>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또 다른 시리즈를 준비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여행시리즈도 계속 연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만, 이전처럼 모든 일정을 다 서술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다시 하게 된다면 굵직한 이야기들과 그에 대한 시선과 사회적 현상 등을 연결하거나 좋아하는 책의 부분과 관련지어 작성하게 될 것 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Ep29. 산티아고의 순례-(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