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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Oct 12. 2023

인간은 인류를 위한 도구


인간은 인류를 너무 많이 아낀다고 늘 생각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가끔 신물이 나기도 한다.


인간은 늘 인간의 편이어야 하고, 어떤 철학적이고 초월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봐도 결국엔 인간이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고, 그런 것들은 전부 ‘인류의 번영’이라는 타이틀로 마무리가 된다. 결국엔 그런 주제로 수렴되는 이야기에 신물이 나고 인간을 위한 무언가를 하는 인간만이 효용가치가 있는 존재로서 채색되는 이런 지금의 시간에 현기증이 난다.

인간은 왜 인간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은 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류의 번영과 번식을 최종 지향점으로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고민해 보게 된다. 번영과 번식이란 말이 구리다면 이 말을 조금 안전한 어휘로 바꿔 ‘행복’이라고들 칭하기도 하겠지. 인간의 최종 목표는 자신의 행복, 개인의 행복, 인류 전체의 행복과 번영.이라고. 그런데 여기서 그 행복이라는 관념어 안에도 사실은 수 없이 많은 ‘결국 인간을 떠나 살지 못하는 부박함‘ 이 덕지덕지 묻어있다는 걸 알아차려야 한다. 무해해 보이는 단어 ’ 행복‘이란 말 안에는 사실 인간이 자신의 디엔에이를 위해 죽이고 먹고 살육하고 해치는, 즉, 그것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다면 조금 나아질까.


인간이 인간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면, 모든 존재가 다 그렇게 태어나 어쩔 수 없다는 원리에 갇혀 살길 좋아한다면,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핑곗거리를 내세워 그 뒤로 숨기를 즐기겠다면,


정말 그야말로 우린 왜 태어난 걸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에 대한 답을 끝내 내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나. 이유를 찾는 욕구마저 본능으로 갖고 태어났는데 그 이유는 절대 주지 않는 이 잔인한 우주 속에서 우린 대체 무얼 알고, 무얼 잡고, 무얼 고민하며 살아야 하는가.

우주는 우리에게 잔인하리만큼 관심이 없다.

모든 규칙, 도덕, 법, 예의, 감정 다 우리가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괜찮게 오래 살기 위해 만든 인위적 합의체일 뿐. 그 기준 안에 인간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지향점은 아니다. 결국 종착지는 인간으로 오고, 모든 인간은 인간을 벗어날 수 없고. 아이러니하게도 벗어나려는 인간은 다시금 붙들어서 이 부덕한 서클 속에 순환하며 살아가게끔 하는 알 수 없는 중력이 있다. 그게 질서라면 질서겠고 책임감이라면 책임감이겠지만, 언어 따위 어차피 인간이 자기들끼리 소통을 위해 만든 도구에 불과하니, 결국 인간은 인간을 벗어나려 하는 순간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도 되지 않는, 당장 죽어버려도 우주는 털끝만큼도 관심 없는 시체가 될 것이다.


누군가 죽고 다치고 이별을 해도 바람은 선선히 불어 좋고, 낙엽은 예쁘게 물들어 보기 좋다.

이상하게 마음이 아픈 인간일수록 우주가 보여주는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풍경에 더 많이 냉정해진다. 인간은 인간을 떠나 살 수 없고 떠나 산다고 한다면 우주에게서 버려질 테니. 어정쩡한 위치에서 어정쩡하게 살아가다가 시간을 축 내는 것이 또 다른 인생을 사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린 모두 죽으러 가기 전 잠시 이 잔인한 우주에 들른 것뿐이니까. 그 여행을 즐길 수도, 괴로워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지만 이 여행동안 무엇을 할지 선택하는 건 전부 개인의 자유에 달렸다.

왜 이런 여행을 하게 됐는지 우주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지만, (어쩌면 우주도 모를 테지. 이유는 없을 테지.) 이번 여행을 어떻게 끝마칠지에 대해서 조금만 더 고민하며 살아가 보기로.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게 사실은 가장 성숙한 인생의 방향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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