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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미. 영화 <아가씨>

사기꾼들의 사기극 - 가학적인 장면 속 숭고한 감정의 반전

by 곰자


영화를 보기 전엔 제목에 끌렸고 김민희라는 배우에 끌렸다. 영화를 본 후엔 장면 장면에 끌렸고 김태리라는 배우에 끌렸다. 그리고 반전의 케미까지! 평소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감정적으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자주 보곤 했었다. ‘난해하고 자극적인 영화에도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이 있겠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의 작품에 대해 나름대로 애정을 갖고 있었음에도 자주 접하는 게 꼭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라는 합리화로 적당히 철벽을 쳤던 것 같다. 그렇게 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다르게 <아가씨>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고 영화를 다 본 후 그 잔상 때문에 관련된 글과 라디오 등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만큼 이 영화의 진짜 의미를 깨닫고 싶어 졌다.

사기꾼들의 반전 사기행각이라는 겉 스토리 아래 그가 정말 전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사랑은 여성 간의 사랑으로 가장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두 여주인공의 활약이 어떤 영화보다 남다르게 돋보여야만 했다. 그들의 감정 변화에 따라 바뀌는 관계 설정 또한 매끄럽고 이치에 맞아야 했다. 결코 갑작스럽게 히데코가 숙희를 사랑해선 안됐고 특히나 반대로 숙희가 히데코를 사랑하게 되는 부분에는 결코 비약이 있어선 안됐다.



처음 숙희의 목적은 돈이었다. 아가씨(김민희)의 재산을 빼돌려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백작(하정우)을 도와 그 낯선 집으로 겁도 없이 들어갔다. 그만큼 숙희는 돈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가씨에게는 없는 ‘감정’이라는 것이 숙희에겐 있었다. 그녀는 돈에 대한 감정이 컸던 것만큼 사랑도 아주 솔직하고 천진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아가씨는 이제껏 감정적인 부분에 크게 의미부여를 하고 산 사람이 아니었다. 히데코(김민희)는 코우즈키(조진웅)의 조종으로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야설만 낭독하는 것으로 일생을 보내며 어떤 인간적인 교류를 피부로 느낄만한 경험은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숙희의 욕심을 시작으로 감정이 풍부한 사람(숙희)과 감정 없이 살아온 사람(히데코)이 만나게 된다. 극의 중반부쯤 가면 그 둘이 자연스레 겹치는 접점엔 놀랍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다. 숙희의 어리숙한 사기극이 히데코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것은 신선한 반전이었다. 백작과 숙희의 사기극이 사실은 백작과 히데코의 사기극이었고 마지막엔 이 감정의 반전을 통해 오랜 시간 공들인 스토리가 또 한 번 숙희와 히데코의 사기극으로 바뀌게 된다. 놀라긴 했지만 그럼에도 예상은 됐었다.

“그 반전이 그렇게 대단한 반전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클리셰와 같은데 그럼에도 그 장치를 세련되게 하는 힘은 영화 자체가 반전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사랑에 중점을 뒀기 때문에. 역시 박찬욱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팟캐스트 머볼랭가이드 패널 曰 ) 말에서처럼 어쩌면 감독은 ‘사기극’의 반전이 아닌 ‘여자 두 명(히데코와 숙희)의 감정’의 반전에 더 많은 애정을 품고 영화를 만들어 갔던 것은 아니었을지. 그래서 예상됐던 반전이 유치한 설정극으로 끝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내게 오히려 반전보다 더 신선했던 것은 ‘낭독’이라는 설정을 ‘억압’으로 잡은 부분이었다. (팟캐스트 머볼랭가이드 패널의 말을 빌리자면.) 박찬욱 감독의 시선으로 봤을 때 어쩌면 독서라는 것은 하나의 세상에 갇혀 그 안에서 자신만의 또 다른 세상을 구축해가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한 억압 속에서 히데코는 숙희를 목도했으며 자신과는 반대로 감정 표현에 당당하고, 사기꾼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감정에 결국 속고 마는 숙희의 모습에 애정을 갖게 된다.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법을 알려준다는 명분 하에 밤이 주는 몽롱함과 이상하게 솟아오르는 서로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육체적인 관계마저 나누게 된다. 그렇게 히데코와 숙희에게서 사랑의 감정이 터진다. 그럼에도 히데코의 낭독 행위는 계속됐고 영화의 후반부엔 히데코의 감정을 억압하는 낭독회를 숙희가 뒤엎어버림으로써 결국 히데코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히데코의 인생이 숙희의 손을 빌려 큰 터닝포인트를 맞게 되는 것이다.

평생을 아가씨로 살면서 낮은 담장 하나 넘지 못하는 히데코를 위해 거뜬히 먼저 담장을 넘은 뒤 가방을 쌓아 올려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숙희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숙희에겐 그런 힘이 있었다. 욕심을 낼 줄 아는 힘,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힘,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힘. 그것이 히데코의 마음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이 영화의 가장 힘 있는 존재를 감히 숙희라고 표현하겠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사람은 김민희보단 김태리라고 보겠다.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영화가 주고 싶었던 메시지다. 인간의 사랑은 여성 간의 사랑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에서 머무를까.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인간의 사랑이란 돈도, 명예도 겉모습도 아닌 신뢰와 유대감이라는 것이었다. 꼭 여성들의 사랑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의 임계점을 넘는 것은 둘만의 교감과 신뢰다. 감정 공유를 남자보단 여자에게서 더 발견하기 쉽다고 생각했기에 여성들을 극의 주체로 세운 것일 수도.

그렇게 영화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가 여성들에게서 드러났다. 숙희는 사기꾼이라는 타이틀과는 정반대로 의도치 않게 히데코를 향한 신뢰를 쌓아간 것이다. 그렇기에 신뢰의 마지막 단계로 영화의 엔딩 장면은 숙희와 히데코의 관계 장면이 등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장면을 통해 유년시절부터 히데코에게 고통을 줬던 구슬이 동시에 숙희의 손을 통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쾌락의 극치의 형태로 뒤바뀌게 됐다는 것을 알았다. 같은 대상이어도 어떤 의미부여를 하느냐에 따라 내게 다가오는 느낌은 달라진다. 히데코에게 숙희는 처음엔 그저 사기꾼에 지나지 않을 괘씸한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가시 없는 숙희의 모습은 히데코를 사랑이라는 복잡한 감정에 빠지게 하고 결국 유대감의 정점을 느끼게 하는 숭고한 존재가 돼버린 것처럼.

가학적이고 잔인하기만 했던 장면들 속에서 이런 의미를 느낄 수 있다면 ‘아가씨’를 반복해서 봤던 것이 조금은 성공적이었다고 봐도 될까. 인간은 불편한 감정을 마주할 때 감성적으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그저 틀에만 갇혀서 밀어내고 쳐내기에만 바빴던 감정들이 ‘아가씨’를 본 뒤 좁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체면과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휘감긴 인간의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수고로움도 서로 간의 감정 공유로 극복할 수 있다. 감독의 연출과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가 내 일상에도 들어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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