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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nnun Jan 05. 2020

에콰도르에서 뒤통수 맞은 사연

Ecuador, Baños de Agua Santa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콰도르에서 호텔 사장에게 뒤통수 맞은 이야기. 


우리 가족이 장기 여행을 하며 어떻게 돈을 버는지 그다지 궁금한 영역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카르멘 사건>을 이야기하려면 간단하게나마 설명이 필요하다. 


아르헨티나에 두고 온 집에서 나오는 월세, 인터넷으로 하는 편집일에서 들어오는 약간의 돈, 그리고 여행하면서 호텔 홍보영상을 만들어주고 버는 돈, 이렇게 세 가지 수입으로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비상용으로 들고 나온 만불 정도의 달러에 손대지 않고 일 년 가까이 여행을 했다는 사실은 우리 부부의 소소한 자부심이다. 물론 돈이 남아서 저축까지 하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홍보영상은 주로 금전을 받지만, 때로는 며칠간의 숙식이나 투어 프로그램과 맞교환하기도 한다. 숙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우리에게는 현금이 가장 좋지만 금액이 높은 투어 프로그램을 제공할 경우 지출비용을 아낄 수 있으니 손해보지는 않는 장사다.  


금액이 꽤 높았던 나스카 지상화 경비행기 투어와 혹등고래 투어, 브라질의  동굴 투어, 그 외에도 잠수 투어, 플랑크톤 투어 등등 보통의 캠핑카 여행자들은 비용 때문에 포기하는 많은 경험들을 누릴 수 있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필 우리가 해왔던 일이 영상제작이라 이렇게 여행하면서도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남편이 수준급의 영상을 만드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자화자찬으로 공을 돌리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족에게 애정을 느끼고 우리 여행 프로젝트에 어떤 식으로든 함께 하고자 한 마음이 있었기에 남편에게 영상 작업을 맡기고 페이까지 후하게 주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즐기며 감사하며 여행을 이어 오던 어느 날, 드디어 뒤통수를 맞게 된다. 여행도 삶이니 당연히 핑크빛만 가득할 리 없지 않은가. 


에콰도르의 바뇨스(Baños de Agua Santa)라는 곳은 온천으로 유명한 관광도시였다. 지긋한 나이의 어르신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단체로 관광을 하는 곳, 골목에는 마사지샵과 스파시설이 가득한 곳. 이쪽저쪽 어디를 보나 호텔로 가득하다. 


짭짭 입맛을 다신다. 어장에 들어선 듯 물고기를 낚을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이번 달엔 일을 하나도 못했는데 한 곳에서 여러 건 건지겠구먼. 


기세 등등하게 노트북을 옆구리에 차고 호텔들을 방문해보지만, 여행하는 동안 판촉사원으로 경력을 높인 나의 입담에도 여간해서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발품을 팔고 나서야 거리에 가득한 어르신들이 눈에 들어온다. 연세 있는 분들을 주 타깃으로 하는 호텔들에게 소셜미디어용 홍보영상은 별로 매력적인 상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하며 많은 곳을 찾아갔다. 그러다 관광안내소 사람에게서 바뇨스에서 가장 큰 호텔이라는 루나 볼칸(Luna Volcan) 사장님의 연락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신속히 메시지를 보내본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사장님에게서 직접 답변이 왔다. 두 호텔 영상을 만드는데 사백 불이면 괜찮겠냐고 묻는다. 


당연히 오케이를 하고 바로 다음날부터 남편이 작업에 들어갔다. 산 꼭대기에 위치해서 시내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호텔, 가장 비싸고 화려한 호텔이니만큼 편집에도 유난히 공을 들이는 남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두 개의 영상을 마무리하고 우리 둘만의 시사회를 가졌다. 이 순간만큼은 나도 실눈을 뜨고 평가를 한다. 나의 의견은 대부분 수렴되어 수정 작업을 거친 후 최종적으로 고객에게 보여진다. 루나 볼칸 호텔의 영상은 손댈 것 없이 촬영이 잘 되었고 전반적으로 괜찮았다. 배경음악이 너무 젊은 취향으로 선곡된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음악에 싱크가 맞춰져 편집이 잘 된 면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태클을 걸지 않았다. 물론 배경음악을 바꾸면 편집을 완전히 새로 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드디어 편집 영상 전달.


당연히 기분 좋은 사장 아주머니의 답변이 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띠링하고 전해진 메시지에는 영상에 대한 말은 없었다. “비서와 이야기하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뭐지? 찜찜한 마음으로 비서에게 연락을 하니, 사장님이 '자기 취향이 아니다'라는 말만 전했다고 한다. 그러니 페이도 당연히 지급하지 않겠다고.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그럼 수정할 부분을 이야기해달라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영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다시 촬영할 수도 있고, 음악을 바꾸거나 편집을 새로 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리 그래도 가타부타 의견도 없이 일주일 내내 작업한 것을 그냥 쓰레기통으로 내던질 수는 없지 하며 기다린 지 사흘이 지난 후에야 우리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 물 먹이는 일에 도가 튼 작자들이구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그냥 잊어버리라며, 가던 길 가자고 했지만 너무 속이 상해 그럴 수가 없었다. 일주일 동안 산을 몇 번이나 오가며 촬영하고 새벽까지 편집을 했던 남편의 노고도 마음이 쓰였지만,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인간들을 참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이 계약서도 없이 한 일을 가지고 법적인 조치를 할 수도 없고, 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호텔 앞에 가서 일인시위라도 할까, 사무실을 찾아가서 깽판을 부릴까, 관광협회에 고발을 할까, 이 도시의 최고 유지인 호텔 사장에게 항의하는 외국인 여자의 이야기를 누가 들어주기나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복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곧 여행을 이어가야 하는 뜨내기, 무력한 프리랜서 외국인 노동자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다면, 호텔 문 앞에 똥이라도 뿌려놓고 도망치자! 

그런데 젠장, 오르막이 너무 가파른 산길이라 캠핑카가 올라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부글거리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혼자 카메라를 들고 버스를 타고 호텔로 올라갔다.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가장 비싼 메뉴를 한꺼번에 세네 가지 주문했다. 서빙하는 사람이 의아한 눈으로, 혼자 오신 것 맞아요?라고 물었다. 배가 고파 다 먹을 거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고 음식을 기다리며 영상을 찍었다. 직원들이 식탁으로 음식을 가져오자 나는 말했다.


내 취향이 아니에요. 음식값을 지불하지 않겠습니다.


직원들은 무엇이 마음에 안 드냐며, 원하면 요리를 다시 해올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내 취향이 아니라는 말만 반복. 


직원들의 황당한 얼굴과 반응을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물론 영상을 찍은 후에 그분들께는 상황을 설명했고 양해를 구했다. 이 호텔의 사장이 우리에게 이런 짓을 했고, 너무 억울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이다. 


다음 날에는 마이크를 들고 사무실을 찾아갔다. 몇 년 동안 프리랜서 피디 일을 해오면서 그래도 배운 게 카메라와 마이크 들이미는 거라고, 비비씨 르포라도 찍는 듯이 씩씩하게 뛰어들어갔다. 불쑥 카메라가 들어오자 사무실 직원들은 놀란 얼굴이었다. 비서라는 사람은 사장님이 지금 해외에 있는 ‘것 같다’는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대며,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답변을 했다. 


그다음은 관광협회였다. 바뇨스의 관광정책에 대한 인터뷰를 하는 척하며, 마지막에 질문을 던졌다. 어떤 호텔 사장님이 홍보영상 작업을 맡기고 촬영 내용과 페이에 대해 구체적인 메일까지 주고받은 후에 아무 근거 없이 페이를 주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관광협회 남자는 그러면 안되지요, 일을 시켰으면 돈을 주는 게 맞지요,라고 대답했다. 이윽고 내가 말했다. 그 호텔 사장님이 바로 관광협회의 회장님인 까르멘입니다. 그런 비도덕적인 사람이 관광협회의 회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아도 된다고 보시나요?


관광협회 남자는 더 이상 코멘트하지 않겠다며 나를 문밖으로 밀쳐냈다. 


누군가 우리를 도와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 사회에서 자본가에게 돈을 뜯긴 일개 노동자에게 힘을 보태주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관광협회 사무실의 유리문이 세차게 닫히고, 그 유리창으로 마이크를 손에 쥔 내가 비친다. 기자도 아니면서 기자 코스프레라니. 세상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듯 설치는 모습이라니. 


고작 사백 불을 뜯기고도, 고작 그 정도의‘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서도 이렇게나 분통이 터져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것을.


그동안 뉴스로 접한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합당한 이유 없이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돈을 잃은 사람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 몸을 다친 사람들, 목숨까지 잃게 된 사람들… 돈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착취당하고 배신당한 그 수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얼굴들이 하나하나 선명해지는 듯하다. 


내 자존심이 가장 중한 사람. 

그동안 그 누구를 위해서도 카메라를 무기로 들고 싸워본 적 없던 사람.  


그런 비루한 사람이 나였다.


아이고, 속이 다 시원하다, 큰 소리로 말하며 이죽거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속으로 통곡했다. 앞으로 여행을 하는 동안 누군가의 억울함을 마주할 때가 올까, 그 억울하고 약한 누군가를 위해 주먹을 부라릴 용기가 이제 조금은 생겼는데. 그들을 위해 언성을 높여 싸울 수 있는 값진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런지?


그날 밤, 남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남편은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무심하게 기타를 끌어 잡는 습관이 있다. 


남편이 기타를 퉁기기 시작하자, '여보, 카르멘 사건을 노래로 만들어봐' 주문했다.

그리하여 올해 빌보드 차트 상위에 오를 뻔했던 “내 취향 아니야”라는 명곡이 즉흥적으로 탄생하게 된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거기에 내가 찍은 르포 영상과 이것저것 편집을 해서 동영상을 툭 만들어냈다. 


남편의 즉흥곡, <내 취향 아니야>의 가사는 대충 이러하다.


일거리를 찾아 바뇨스에 도착했지

가장 화려한 호텔 주인이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었어

열심히 찍고 밤새 편집해서 사장님께 보냈지

그런데 들려온 대답

내 취향 아니야

사장님, 다시 찍을게요 편집도 새로 할게요

페이는 그냥 주세요

우리 여행 계속해야 해요

그러나 사장님의 유일한 대답

내 취향 아니야

내 취향 아니야

우리 마나님은 카메라를 들고 호텔에 갔지

음식을 시키고 똑같이 말했어

내 취향 아니야

왜 돈을 주는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굴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

내가 만든 호텔 비디오 좀 봐봐

어때 멋지지? 한번쯤 가서 자보고 싶지?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내가 비디오를 그럭저럭 잘 만들었다는 얘기지

근데 잘 들어

이 호텔에 예약할 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마법의 단어가 있어

내 취향 아니야

그럼 돈 안 내고 그냥 집에 가도 돼

내 취향 아니야 내 취향 아니야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는 그 B급 동영상 같은 조악한 영상을 보면서 함께 키득거렸다. 그리고 바뇨스에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에게 영상을 보냈고, 인스타그램에도 올렸다.


비디오를 본 많은 팔로워들이 댓글을 달았다. 

배 터지게 웃었다, 그런 일을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보기 좋다, 힘내라는 메시지도 더러 보내주었다. 


그러나 하루도 안되어 인스타 그램에서 비디오를 강제로 삭제한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호텔 쪽에서‘조롱과 협박'이라는 명목으로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며칠이 지나자 바뇨스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수십 통의 메시지가 왔다.


‘우리 호텔 영상을 만들어 줄 수 있나요, 페이는 당연히 드립니다’

‘내 친구도 그 호텔에서 몇 년간 일하고 하루아침에 잘렸어요. 그 호텔 주인이 물 먹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영상을 보면서 정말 통쾌했어요’

‘카르멘 같은 사람은 언젠가는 망할 겁니다’ 

‘같은 에콰도르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등등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 어처구니없는 동영상으로 바뇨스에 문란을 일으킨 것은 아닌지 송구스럽기도 하다. 



마침내 우리 부부도 피식 웃고, 툭툭 털고 다시 길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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