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로 말한다, 악착같이
아기는 자궁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공포를 느낀다.
탯줄이 잘리고 자신의 몸이 두 개로 분리되는 것에서 오는 근원적인 공포감. 그것은 최초의 호흡으로 기관지들이 일제히 열리면서 생기는 통증, 좁은 산도를 빠져나올 때 겹쳐진 두개골에서 오는 아픔, 눈을 아리는 태초의 빛, 벌겋고 예민한 살에 닿는 누군가의 손길, 그 모든 육체적인 고통으로부터 기인한다.
그것은 탄생 순간부터 아기의 내면에 각인되는 어떤 두려움이다. (아기들은 태어난 후에도 엄마와 자신을 한 몸으로 여기는데, 그러한 심리적인 동일시는 수개월간 지속된다. 아기들이 거울놀이를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신이 엄마와 다른 개별적인 사람임을 인지하는 계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태초의 공포는 아기의 성장과 함께 보통 두 가지 형태로 전개된다.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거부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두 번째는 내가 속한 그룹/집단에서 소외될 것에 대한 불안감이다.
첫 번째 두려움이 더 큰 아이들은 개인과의 관계에서 강한 집착을 보인다. 놀아주던 사람이 아이의 어떤 행동으로 인해 화가 난 제스처를 보였을 때, 그 사람의 화가 풀릴 때까지 노력하는 아이들을 본 적 있을 것이다. 화가 났던 사람이 아이의 애교스러운 행동을 보며 피식 웃고 다시 따뜻하게 안아주는 모습을 보인 후에야 아이는 비로소 안심하고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린다.
반면, 상대방이 삐쳤던지 화가 났던지 일절 관심이 없고 화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할 마음도 없어 보이는 아이들도 있다. 자신 이외의 사람의 감정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경우다. 이런 성향의 아이들은 친구들 그룹에서 소외된다거나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주목받지 못한다거나 하는 상황들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집단에서 소외되는 것에 대한 공포.
나는 이 공포감이 내가 스페인어를 그럭저럭 잘할 수 있게 만든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었다는 궤변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세상의 중심이 나라고 믿는 스타일, 그것이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성향이었다.
장녀로 태어나 조건 없는 사랑을 누리며 자랐고, 부모님은 동생들이 태어난 후에도 언제나 맏딸을 옹호하는 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학교에서 인기를 독차지하며 승승장구하던 나는 4학년 때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가면서 강도 높은 왕따를 당하게 된다. 11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집단에서 소외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정과 관심이 갈구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내가 속한 그룹의 질서와 룰을 알지 못하면 얄짤없이 울타리 밖으로 내몰린다는 것도, 그 질서와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을 습득하려면 구성원들과의 소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도 그 경험을 통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소외는 고통이었고, 친구들의 외면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 그 경험이 그렇게나 괴로웠던 것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나의 가장 큰 심리적 약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 때 시골로 이사를 가서 어찌어찌 내신을 잘 받아 외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여유롭게 공부했던 중학교 때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아이들로 가득한 외고라는 집단에서 나는 즉각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미술이나 음악, 시 짓기 같은 것을 좋아하던 나는 선생님들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학생으로 전락했다.
서른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대한 생생한 꿈을 꾸는데 공포 그 자체다. 수학 담당이었던 지기룡 선생님은 교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인사도 없이 칠판을 대여섯 구역으로 칸을 나누고 문제를 적으셨다. 그날 날짜가 5일이면 5번, 15번, 25번의 학생들이 불려 나가 문제를 풀곤 하였다.
불려 나가는 학생들은 날짜에 따라 예측을 할 수도 있지만 무작위로 선출되기도 했기 때문에 언제 내 번호가 호명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내 번호가 호명되면 칠판 앞에 서서 분필을 손가락으로 감아보지만 나는 대부분의 경우 문제를 풀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이 또각또각 문제를 풀면서 숫자를 적어 내려 가는 소리만 귓가에서 울려댈 뿐이다.
도움을 청하려 뒤를 돌아보면 나머지 스물다섯 명의 친구들이 ‘멍청하긴, 그것도 못 푸냐’라는 눈빛으로 보고 있다. 모두가 알아듣는 그 언어를 알아듣지도, 해석하지도 못한 죄로 나의 자아는 쪼그라들고, 망치질당하며, 난도질된다. 내가 언어영역 문제는 잘 푼다는 사실, 그림은 제법 그린다는 사실, 음악에도 소질이 있다는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왕따를 당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집단에서 소외되는 것에 대한 엄청난 공포감을 느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름대로 큰 결단을 하게 된다. 동기들이 대부분 언론고시를 준비하며 방송국 입사를 목표로 하고 있을 때, 해외 봉사활동을 선택했다. 그것은 한국에서의 미래를 준비하려는 발판도, 스펙을 쌓으려는 의지도,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도 아니었다. 나는 언론고시를 준비하면서 느끼게 될 소외감이 정말로 두려웠다. 그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 태어나고 싶었다.
어찌어찌하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일 년을 살게 되었다. 나는 이름만 비슷할 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더 친절한 사람이 되었고, 한국말을 더 이상 쓰지 않았기 때문에 목소리도 바뀌었으며, 그동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의 많은 것들을 해결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 그렇다. 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스물여섯 살에 새로 태어난, 말 한마디 못하는 아기 상태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아기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보살핌을 받기 마련이다. 그나마 인복이 있었던지 아르헨티나에서 알게 된 많은 친구들은 너그러웠고 친절했다.
이제 겨우 말 배우기 시작하는 아기가 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관심을 받으며 조금씩 성장해갔다. 여전히 코질질이 아이 수준의 스페인어를 구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달콤함에 젖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된다.
한없이 너그러울 것만 같았던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정착해서 조금 더 살아보겠다고 나서자 조금씩 팍팍한 맨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날은 아주 무덥고 불쾌한 여름날이었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나는 학생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해 새벽부터 이민청에 갔다. 아침 일곱 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이민청 내부는 아시아 출신, 아랍 출신, 중미 출신으로 보이는 수많은 외국인들로 가득했다.
건물 밖까지 늘어선 줄에 엉겨 붙어 얼마간의 시간을 견딘 후에야 담당자와 대면할 수 있었다. 이 전 담당자가 이런저런 트집을 잡은 탓에 두 번이나 빠꾸를 먹은 참이었다.
세 번째로 이민청을 방문한 그날, 나는 또 어떤 꼬투리를 잡히지나 않을까 하며 조바심이 나있었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쓸어내리며 마주한 담당자는 심한 사시 눈으로 거의 두 눈동자가 콧등에서 만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첫눈에 봐도 그가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친구라면 다른 직원들과 달리 외국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리라, 이유 없이 하대당하는 기분이 어떤지 이해하고 있으리라, 오늘은 기필코 비자 신청을 마무리하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 말더듬이 직원은 무범죄 증명서의 날짜가 하루 지나있다면서 서류 신청을 거부했다. 내가 서류 신청 절차를 개시한 이 주일 전에는 아직 유효한 상태였고, 첫 담당자도 그건 문제없을 거라고 했던 탓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차였다. 누가 봐도 악의적인 트집잡기였다. 열 가지에 달하는 각종 서류를 마련하느라 그동안 전전긍긍하며 보낸 시간이 와르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짧은 스페인어로 항의라도 해보고자 노력했지만 내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들은 의미화되지 않은 헛소리들 뿐이었다.
말더듬이 직원은 싸늘하게 나를 창구에서 밀어냈다. (미안하지만) 웃음부터 자아내는 그의 눈빛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게 학교를 다니겠다고?’라고 묻는 듯했다. 나의 지성과 인격은 나른하고도 미동 없는 그의 표정 앞에서 여실히 짓밟혔다. 그 앞에서 나는 그냥 서구 사회에 빌붙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말 못 하는 동양인 여자였을 뿐이었다.
이민청을 나서면서 왈칵 눈물을 쏟았더랬다. 처량하고 슬퍼서가 아니라 트집 잡기를 일삼는 직원들과 말싸움 한번 제대로 못한 것이 너무 분해서였다.
이민청 사건을 시작으로 나는 싸우기 위해, 나의 개무시된 인격과 지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스페인어를 배웠다. 어린아이 같은 수준으로 말을 하는 사람을 어린아이 이상으로 대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그간 사람들이 나를 지극한 관심의 대상으로 여겨준 것은 교양 있는 사람들의 배려 그 이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소외를 피해 한국을 떠났던 나는 결국 이국에서도 소외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 과정은 나름 신나는 여정이었다.
벙어리 일 년, 귀머거리 일 년, 그렇게 한 삼 년 정도의 시간을 바둥거린 뒤에야 스페인어로 웬만한 말싸움을 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인터뷰를 따와서는 밤새도록 돌려보며 번역을 했던, 그렇게 겨우 편집한 영상을 한국으로 보내곤 했던 나는 한국에서 촬영팀이 오면 통역을 할 정도의 스페인어는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찌어찌 아르헨티나에서 남편을 만나 아이 둘을 낳고 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사람들이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거 아니냐고 과장 어린 칭찬을 해줄 정도로 그럭저럭 말을 잘한다.
한국이든 아르헨티나든 어디서나 평생 소외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면서 살았을 것이다. 어울려 산다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일 게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고 싶고, 뒤처진 사람으로 대접받기는 싫은 마음이 늘 한켠에 존재한다.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인생에서 어떤 장점으로 작용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인생 전반에 걸쳐 항상 동행해 왔던 감정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겠다는 몸부림이 아르헨티나로 날아온 나에게는 적당히 즐거운 과정이었다는 사실은 불행 중 다행이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