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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로빈 Aug 06. 2023

[도서] 오웰의 장미와 1984

정치적 메시지를 예술로 만든 한 작가의 저항 방식



조지 오웰에 관심이 생긴 건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를 본 후였다. 조금은 기괴한 방식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표현하는 작품들을 보면서,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든' 조지 오웰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조각과 문자라는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방법이 때로는 직접적인 언어보다 더 깊고 명료하게 전달된다는 데서 공통점을 찾았다. 조지 오웰에 대한 호기심으로 소설 '1984'와 에세이들을 한 권으로 묶은 『조지 오웰 디 에센셜』,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를 읽었다. 두 책으로 오웰의 작품 세계를 엿보았고 새로운 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1949년 소설 '1984'에서 2003년 영화 '이퀼리브리엄'이 떠올랐다. 극단적인 전체주의 세계 속에서 의구심을 품은 주인공이 약간의 일탈을 넘어 사회를 바꾸려 한다는 내용이 비슷하다. 또한 영화 등장인물의 이름과 상징이 소설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1984'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영화를 제작한 듯하다. 완벽히 동일하지는 않아도 오웰의 소설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으며, 현대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이다.






윈스턴의 등 뒤에 있는 텔레스크린에서는 아직도 무쇠 생산과 제9차 3개년 계획의 초과 달성에 대해 지껄이고 있었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이 동시에 가능하다. 이 기계는 숨죽인 속삭임을 넘어서는 모든 소리를 낱낱이 포착한다. 더욱이 윈스턴이 이 금속판의 감시 범위 안에 있는 한 소리는 물론이고 행동까지 감지된다. 
어떤 경우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가령 승전 소식이 보도될 때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그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된다. 심지어 이에 대한 신어까지 있는데, '표정죄(facecrime)'가 바로 그것이다.
「1984」 p.13, 105


설마 이런 세상이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암울한 환경이다. 거리와 직장, 심지어 휴식을 취하는 침실에도 설치된 텔레스크린은 미세한 감정 변화까지 포착하며 감시한다. 소설에서 말한 '표정죄'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는 '감정죄(Sense Offence)'가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감정을 억제하는 약물을 투여하는데, 이를 거부할 경우 화형에 처한다. 색출하는 방법은 쉽다. 눈물을 보이거나 웃으면, 혹은 미술품을 즐기거나 책을 읽으면 바로 감시 대상이다. 

다소 과장되었지만 인간의 사적인 영역, 즉 사고와 감정을 비롯한 기본적 욕구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크게 낯설지 않았다. 개인보다 전체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인권과 같은 기본적 가치를 손상시키고, 비판의 목소리는 삭제시키는 사례를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보아왔다. 작게는 조직, 크게는 국가가 선언하는 하나의 사상을 전체 구성원 개인의 신념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제3자의 시선에서는 확연한 문제가 폐쇄적인 내부에서는 충성이나 애국과 같은 개념으로 포장되기도 하므로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가끔은 스스로 처한 상황에서 한 발짝 떨어져 주변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진리부는 다른 건물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흰색 콘크리트로 번쩍이는 피라미드 모양의 그 웅장한 건물은 층마다 계단식으로 쌓아 올려진 채 300미터나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흰 건물 전면에는 윈스턴이 서 있는 곳에서도 훤히 보이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이 우아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1984」 p.15


공공의 적은 내부 결속력을 강화시킨다. 소설 속 배경이 된 오세아니아에도 두 가지 대상이 있다. 계속 전쟁을 벌이는 상대 국가와, 혁명을 시도한 골드스타인이라는 인물이다. 텔레스크린을 통해 연일 알리는 승전 소식으로 빅 브라더는 영향력을 과시하고, 대중은 지도층에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하루 중 시간을 별도로 내기까지 하여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능력자 빅 브라더에 도전한 골드스타인을 다 함께 증오하기도 한다. 책에서 설명하는 전쟁의 목적은 더이상 영토 확장이나 생산물 확보가 아니라 지배 구조의 안정화다. 잉여 자원을 분배하지 않고 소진함으로써 계급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삶의 전선에 있는 대중들이 지식을 쌓고 통치에 의문을 품을 여유를 뺏는다. 그러면서도 지도층은 이러한 사회에 개인이 속할 때 오히려 자유롭다고 말한다.  

시작부터 내내 구호처럼 적힌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을 처음 보았을 때 이해하기 어려웠다. 'A는 B'라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단어의 의미가 도저히 연결되지 않아서다. 오히려 반대되는 개념으로만 여겨졌으나 뒤로 갈수록 일리 있는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과 지배 구조에 대한 관점을 이처럼 단순하고도 명확한 문장으로 요약해 낸 점이 인상적이다. 






신문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 정기간행물, 팸플릿, 포스터, 전단, 영화, 녹음테이프, 만화, 사진 등 조금이라도 정치적 사상적 색채를 띠는 것이라면 문학이든 기록이든 상관없이 그 모든 것에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매일 매순간 과거는 현재의 것이 되곤 했다. 이런 식으로 당이 예언한 모든 것들은 문서상으로 증명되고, 그때그때 필요에 맞지 않는 기사나 의견은 기록에서 영구히 삭제되었다. 
윈스턴은 오늘 오길비 동지의 명복을 빌어 주기로 했다. 사실 오길비 동지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몇 줄의 글과 두어 장의 모조 사진이면 얼마든지 그를 생존해 있는 인물로 만들 수 있었다.
「1984」 p.70, 79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은 꽤 성실한 공무원이다. 기록국에 근무하며 기사를 살피고 수정한다. 취재하여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소식을 '만드는' 일이다. 지도층의 능력을 입증하려면 그에 걸맞은 정보가 필요하건만 그들의 예언은 항상 틀리고 내세울만한 업적도 없다. 그래서 윈스턴과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 조지 오웰은 에세이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에서 '전체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는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무엇'이라고 적었다. 과거의 사례를 배우고 현재에 적용하며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에 역사와 기록을 이용한다.  

반드시 전체주의가 아닌 사회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꾸며내지 않더라도 여론을 원하는 대로 이끌기 위해 같은 일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정책 방향에 맞추어 어느 인물과 사건, 역사 장면을 유난히 부각하거나 생략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정권의 성향에 따라 어느 국가와의 친선을 결정하면, 우호적인 정보가 중점적으로 흘러나오고 반대되는 일은 축소된다. 어떤 나라와든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고, 굳이 좋은 상황에서 부정적인 기억을 꺼내어 재를 뿌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정치외교적 분위기를 이유로 현재 발생하거나 진행 중인 사건의 공개를 꺼리며 섣불리 무마하는 건 위험하다. 단기적 성향에 맞추기보다 장기적 원칙에 따라 대응하고 공론화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 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세월이 흐를수록 낱말 수는 줄어들고, 그에 따라 의식의 폭도 좁아지게 되는 거지."
「1984」 p.88-89
어느 한 구체적인 사물을 생각할 때 단어 없이 생각하고, 그러고 난 후 마음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을 언어로 묘사하려고 하면 거기에 딱 들어맞을 정확한 단어를 찾을 때까지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정치와 영어」 p.622


언어는 문화를 반영함과 동시에 사고에 영향을 준다. 한 예로 동양에서는 동사가, 서양에서는 명사가 발달되어 있다. 관계 중심의 동양에서는 사물 간 연결을 의미하는 서술어의 비중이 높은 반면, 개인 중심의 서양에서는 그보다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가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영어를 배우면 단수와 복수, 가산명사와 불가산명사, 관사 등이 낯설게 다가온다. 한편,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견해도 있다. 언어적 상대성 개념을 제시한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에 의하면 모국어가 다를 경우 인지하는 범위에도 차이가 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색을 구분하는 단어가 세부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더 다양한 색을 지각할 수 있다. 이 가설은 많은 비판 속에 부분적으로 수용되어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사고방식은 환경과 상호 작용하는 만큼, 언어도 하나의 요인이 된다. 동일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모국어에 따라 자주 접하는 언어가 먼저 인출되어 지각 및 판단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말에 이미 문화가 녹아있기 때문에 언어 하나만으로 사람의 사고방식을 좌우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앞의 예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관계를 중요시 여겨서 동사를 많이 사용하는 것인지, 혹은 동사를 자주 사용하다 보니 관계에 더 초점을 두게 되는 것인지 선후 관계를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또한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생각이 떠오르거나 감정을 느끼면 적확한 단어가 아니라 해도 유사한 용어나 표현을 활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한다. 따라서 '사상'이나 '혁명'과 같은 단어를 없앤다고 해도 그 개념마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윈스턴은 즉시 4달러를 지불하고 그 탐나는 물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그 물건에 반한 것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현재와는 사뭇 다른 옛 시대의 유물을 지니는 데 따른 묘한 기분 때문이었다. 표면이 부드럽고 모양이 빗방울 같은 그 유리 덩어리는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옛날에는 문진(文鎭)으로 사용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게 더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1984」 p.157-158


윈스턴의 마음 한 구석에는 현 체제에 대한 반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배급 받지 않은 일기장에 적는 감정의 기록, 옛 시대의 문진 구입으로 소소하게 시작된 일탈은 동료이던 줄리아와의 비밀 연애와 혁명 단체 가입으로 점점 커졌다. 소설 속 세계라면 일기 하나 쓰는 것도 마음이 조마조마한데, 끝을 모르고 달리는 윈스턴을 보자니 불안하면서도 응원하게 되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대로 밀고 나가서 사회를 변화시켰으면 좋겠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면서도 평온하게 이어지는 윈스턴의 일탈에 감시 체제가 예상보다 물렁하구나 싶던 찰나, 당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그들은 윈스턴이 문진을 사던 날부터, 아니 그보다 더 전에 텔레스크린 사각지대에 숨어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라고 써내려 갈 때부터 이미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토록 오래 지켜보기만 하다가 일격을 가하는 교묘함에 놀랐다.






"어쩌다 들어왔나?" 윈스턴이 물었다. 
"사상죄야." 파슨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 사상죄를 범했는지 아나? 잠잘 때였어. 그래, 그건 사실이야. 나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하려고 정말 열심히 일했어. 내 마음속에 못된 생각이 들어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잠꼬대를 했대. 뭐라고 한 줄 아나? …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는 것이었네.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누가 자네를 고발했나?" 윈스턴이 물었다.
"어린 내 딸년이야. 그 아이가 열쇠 구멍으로 엿들었어. 그러고는 이튿날 내 얘기를 경찰에게 신고했지. 일곱 살짜리치고는 꽤 똑똑하잖나? 신고했다고 해서 딸에게 불만 같은 건 없어. 사실 그 애가 대견스러워. 그러고 보면 내가 딸 하나는 제대로 키운 것 같아." 파슨스는 자랑하듯 말했지만 표정은 침울했다.
「1984」 p.378-381 


윈스턴은 무늬만 성실한 공무원이었던 반면 그의 동료 파슨스는 뼛속까지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빅 브라더는 항상 옳다며 칭찬하던 그도 사상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소설에 보면 전체주의 이전의 사회를 살지 않은 어린 세대일수록 충성도가 높다. 사상범 처형 장면을 즐기고 가족을 감시하며 고발할 거리를 찾는 모습에 소름 돋으면서도 안타까웠다. 흔히 잘못 끼운 첫 단추에 비유하듯, 현세대가 지나친 사소한 문제는 미래 세대에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진다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그러면서 책임감도 느꼈다. 한편 그 와중에도 더 나쁜 죄를 짓기 전에 이렇게 체포된 것이 다행이라며 오히려 법정에 서면 '늦기 전에 저를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거라는 파슨스를 보니 세뇌가 잘 된, 참 한결같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하긴 그러한 인물이 많아야 윈스턴과 같은 사람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꼭 필요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윈스턴은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기력을 되찾았다.
"당신들은 그럴 수 없을 겁니다." 그가 힘없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윈스턴?"
"당신이 방금 말한 그런 세계를 당신들은 만들 수 없단 말입니다. 그건 꿈에 불과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공포와 증오와 잔인성 위에 문명을 세운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결코 지탱될 수 없습니다."
"어째서인가?"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붕괴될 겁니다. 그런 문명은 저절로 파멸하게 됩니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자유다. 만약 자유가 허용된다면 그 밖의 모든 것도 이에 따르게 마련이다.「1984」 p.134, 438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욕구다. 따라서 이를 거스르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 수밖에 없다. 공포심을 유발하는 폭력, 반대 세력의 제거, 비합리적인 선동이 뒤따른다. 벽을 세워 물을 가두거나 흐름을 막더라도 오래가지 못하듯이 억압은 장기화될 수 없다. 일생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변화되기는 어렵겠지만 긴 세대에 걸쳐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어떠한 체제든 사람의 발전적 욕구와 성장 동기를 이해하고 충족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사회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문을 걸어 잠그고 봉쇄하며 명분 없는 전쟁을 계속해야 지킬 수 있는 통치 구조는 지배층 외의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배 계급이 주장하듯 그것이 올바른 체제라면 굳이 힘을 들이지 않고도 지속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언제 붕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스스로 안은 채 시간만 지연시키게 될 것이다.   






그의 생각은 이중사고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민 거짓말을 하는 것, 상반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 …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 이런 것들은 지극히 미묘하다. 의식적으로 무의식 상태에 빠지고, 자신이 방금 행한 최면 행위에 대해서까지 의식하지 못하는 격이다. 그래서 '이중사고'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조차 이중사고를 사용해야만 한다.
「1984」 p. 63


당에서 윈스턴을 고문하며 얻고자 하는 건 단지 범죄 사실의 자백과 시인에 그치지 않았다. 겉으로는 체재를 인정하면서도 속으로는 끝까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며 죽음을 맞이할 자유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빅 브라더를 존경하게 되는 순간까지 기다리다 뒤에서 예고 없이 총살하는 것이 목적이다. 과연 윈스턴의 마음이 바뀔지 궁금하면서도 정신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온갖 고초를 겪은 윈스턴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 줄리아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신념마저 빼앗겨 버림으로써 완전히 무기력해졌다. 결국 그는 빅 브라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품은 채 처형되고 소설은 마무리된다.

희망이 꺼져 버린 결말에 잠시 멍해졌다. 외부 환경은 어쩌지 못하므로 겉으로는 수긍하더라도 정신만큼은 굴복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인지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신념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될 경우 괴로움을 느껴 둘을 일치시키려 한다. 이미 벌어진 행동은 바꾸기 어렵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신념을 변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당은 이러한 사람의 특성을 알고 있었고 윈스턴에게 교묘히 적용했다. 누구라도 끝까지 정신을 붙잡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결말을 몰고 간 조지 오웰이 원망스러우면서도 강력한 메시지 전달력에 감탄하기도 했다.       

       






만일 전쟁과 정반대되는 것이 있다면 때로는 정원이 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와 프로파간다에 대한 선견지명으로, 불유쾌한 사실들을 직면하는 것으로, 건조한 산문체와 굴하지 않는 정치적 견해로 유명하던 작가이다. 그런 그가 장미를 심었던 것이다. 
나는 장미를 보고 놀란 후에 다시 그의 글들을 읽어보았는데, 그러면서 정치적 기괴함에 대한 냉철한 시각과 균형을 이루는 듯한 또 다른 시각들을 지닌 오웰을 만나게 되었다.
『오웰의 장미』p14, 27, 41


리베카 솔닛은 조지 오웰이 그의 작품 세계와는 사뭇 다르게 정원 가꾸기를 즐겼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소설만큼 어두운 현실에서도 장미를 심고 가꾸며 주변을 환기하고 미래를 꿈꾸었다. 꽃은 단순히 예쁜 모양새를 넘어 씨앗과 열매로 재탄생되는 생명력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조화보다 생화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정치적인 글을 쓰며 장미를 심는 행동은 조지 오웰만의 저항 방식이었다. 리베카 솔닛은 '1984'를 다시 읽으며 자연 묘사와 서정적 분위기를 재발견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들이 떠올랐다. 윈스턴이 줄리아와 처음으로 비밀 만남을 가지던 숲길이 섬세하게 그려진 부분도 오웰의 이러한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구나 싶었다. 버려져 정돈되지 않은 숲에 불과했지만 통제로 가득한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공간이었으며 차가운 현실과 대비되어 편안함과 해방감이 극대화되었다. 암울한 결말로 인해 희망을 상실한 기분을 안겨 준 소설이었으나 리베카 솔닛의 글에서 '1984'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비록 당은 윈스턴에게 원하는 바를 이루었지만 어딘가 그러한 숲이 숨겨져 있는 한 희망은 계속 존재했다.    






고되게 일하는 그네들의 영혼도 예술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알았으니―
그렇다, 우리는 빵을 위해 싸운다― 그러나
우리는 장미를 위해서도 싸운다.
빵은 육신의 양식이지만, 장미는 좀 더 섬세한 무엇의― 단순히 마음만이 아니라, 상상력과 정신과 감각과 정체성 같은 것들의― 양식이다.
『오웰의 장미』p.121-122


빵은 생존, 장미는 풍요를 위해 필요한 존재다. 위기가 만연한 시기에 실용성과 거리가 먼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사치라 여기는 상황 속에서 오웰은 자연을 감상하는 일이 과연 문제가 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다. 빵에만 치우쳐 장미를 추구하는 욕구를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사회주의를 비판했다. 특정한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항상 한쪽 편에 서서 옳다고 말할 의무는 없다. 어떤 체제나 정당도 가치 실현의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적 수용과 맹목적 충성은 무의미한 희생을 가져오기도 하고, 문제 인식에 방해되기도 한다. 정치적 입장을 단 둘로 나누어 A를 비판하면 B라 치부하고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전환되어야 조금 더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요즘보다 더 삼엄한 시대에서 비판을 이어간 오웰은 용기 있는 작가였다.






예술은 목전의 정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도 자아와 사회, 가치와 헌신에 대한 감각과, 심지어 주의를 기울일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시대의 위기에 대처할 저력을 주는 것이다.
『오웰의 장미』p.132-133


소설 '1984'는 오웰의 마지막 작품이다. 집필을 시작한 연도가 1948년이어서 뒤의 두 자리를 바꾼 1984년으로 배경을 설정했다고 한다. 당시 사회가 지속된다면 미래에 어떠한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경고한 글이다. 이를 두고 리베카 솔닛은 '경고는 예언이 아니다. 경고는 우리에게 선택이 있음을 전제하고 그 결과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웰은 다양한 메시지 표현 방식 중에서도 예술을 택했다. 영국 제국주의 시절, 인도 식민지에 파견된 경찰로 근무하며 회의감을 느끼고 사직한 후 파리와 런던의 빈민가를 돌며 노동자의 삶을 체험했다. 경험으로 형성한 정치사회적 관점을 이야기로 풀어나갔고, 이는 듣는 사람의 머리보다 가슴에 닿아 공감을 일으키기에 좋은 방법이었다. 거리의 시위대 팻말과 현수막에서, 혹은 기사와 뉴스, 인터넷 글에서 수많은 주장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시선을 끌거나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의견은 소수에 불과하다. 오웰의 소설과 에세이는 지금까지 회자되며 현대 사회에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단지 선언에 그치지 않고 예술로 전달되도록 글을 쓰는 것. 조지 오웰이 작가로서 하고 싶던 작업이자 이루어 낸 업적이다.






※ 인용 도서

『조지 오웰 디 에센셜』-  조지 오웰(정회성 강문순 번역), 민음사

『오웰의 장미』- 리베카 솔닛(최애리 번역),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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