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02 (금) 새로운 호스트,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의 불금!
다시 봐도 너무 좋은 집이었다. 언젠가는 이런 집에서 살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남은 재료들로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요리를 해 먹는다.
새로운 호스트가 일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서 만나기로 한다. 키예프 동물원 근처에 있는 집이었는데 짐이 많아서 아무리 해도 지하철을 타고 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키를 경비아저씨께 맡기고 우버를 타고 이동한다. 도착하니 정말 낡은 아파트가 있고 낡은 옷을 입은 아이들과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있다. 저녁 8시즘이었는데, 발릭이라는 호스트와 만나서 인사를 했다. 한국 나이로 23살인 것 같은데 정말 백인 치고는 앳된 얼굴이었고 몸이 좋고 잘생긴 친구였다.
장을 한 보따리 봐온 모양이었는데 나를 위해서 저녁을 준비해주겠다고 한다. 소 심장 스테이크라는데 값도 싸고 맛도 좋으니 기대해보라고 한다. 카우치서핑 레퍼런스를 남기는 란에 발릭은 요리를 정말 잘한다고 평이 많았는데 뚝딱뚝딱 금세 요리를 해냈다.
소비에트 스타일의 밥이라는 어떤 보리밥 같은 것도 함께 주었는데, 고기가 정말 스테이크 하고 맛이 똑같았다.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불금을 즐기러 간다는 발릭이 나에게도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해온다. 사실 키예프에서 이렇다 할 술친구가 없어서 제대로 논 적이 없었는데, 잘됐다고 생각하고 옷을 챙긴다. 8월 2일인데도 날씨가 쌀쌀해서 나중에 추운 지역에서 입을 두꺼운 옷을 꺼내 입고서는 나갔다.
두 명의 여자 친구와 중국 혼혈이라는 남자가 있었고 다들 굉장히 어려 보였다. 큰 마트에서 술을 고르더니 이윽고 750ml에 도수가 30도가 되는 폴란드 술을 2병 골라 들었다. 밖으로 나가니 거의 시간이 10시 30분이 됐는데 공원에 가서 마시자고 한다. 아주 화장실을 많이 가는 나는 생존을 위해 부끄럼을 무릅쓰고 그럼 화장실은 불편하지 않겠느냐며 계속해서 어필한다. 마트 주차장 한구석에 자리를 잡더니 술과 사온 쥬시쿨 같은 음료수를 번갈아 마신다. 유러피안 스타일로다가 아무데서나 후리 하게 마시는 느낌이 든다. 컵도 사고 안주도 사고 바닥도 깨끗해야 하고 누가 볼까 걱정하는 한국과는 좀 다른 느낌의 친구들이었다. 심지어 이 나라는 밖에서 음주도 안되지만 이 친구들은 그냥 큰 소란은 피지 않지만 굉장히 자유롭게 그 공간을 사용하며 지배한다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강한 술인데도 서로 입을 병에 대며 벌컥벌컥 마시고 입의 씁쓸함은 쥬시쿨 같은 주스로 달랜다. 그러다가 우버를 타고 자리를 옮기기로 한다.
강가로 자리를 옮겼고, 도착하자마자 맥도널드의 화장실에 다들 들러서 볼일을 본다. 한강 같은 드니프로 강인데, 강변에 많은 볼거리에 앉아서 술을 마 실수 있는 펍들이 놓여있다. 그곳에서도 그저 서서 계속해서 독주를 들이켠다. 지지 않으려고 나도 내 차례가 올 때마다 양껏 마신다. 여자 친구들도 정말 주저 없이 벌컥벌컥 들이켠다.
오랫동안 친구라는 4명은 사실 발릭과 남자였던 친구 빼고는 영어를 못한다. 그래도 순수함이 잇는 친구들이었고 조금씩 취기가 오르니 몸으로 하는 장난이 심해진다. 격하고 위험하다기보다는 스킨십이 거리낌 없고 야하다는 느낌보다는 정이 많고 사이가 가깝다는 느낌으로 서로가 서로를 대한다. 그러다가 발릭과 릴랴가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하더니 몸이 좋은 발릭이 서있는 릴랴를 들어 올린다. 진짜 영화 같은 장면을 영상으로 담아낸다.
우리는 계속 술을 마시며 걷고 걷는다. 근처의 바로 옮긴다는데, 걷다 보니 이미 12시가 넘어간다. 으슥한 터널을 건너 또 한 번 볼일을 보고 우리가 도착한 바는 Grails라는 바였다.
이미 바깥이 북적북적했는데, 잘 보니 지난주 한국 일행과 멀찌감치에서 보고 들어가지 못했던 바였다. 발릭은 가자마자 나에게 칵테일 압생트를 권했고, 불을 붙여서 설탕을 녹이는 술이었는데 나에게 권하면서도 취할 수 있으니 30분간은 아무것도 마시지 말라고 당부한다. 술을 약하다고 생각은 안 했지만 계속 겁을 주니 왠지 마시면서 취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든다. 맛은 좋은데 탄맛이 나서 이은 지 목이 씁쓸하다. 한잔을 들이켜고 센척하며 서있는데, 혹시 어떻게 될까 봐 진짜 30분을 속으로 샌다.
한국에서는 없는 분위긴데, 자리 개념이 없이 바에서 주문을 하고 아무데서나 서서 마신다. 물론 밖에서도 담배를 태우며 걸터앉아 피는 무리도 있고 이미 실내는 꽉 차서 밖에 주로 나와있다. 비가 내리다 그쳤다 해서 쌀쌀해도 백인들은 거의 옷이 얇고 짧다.
30분이 지나고 맥주도 마시면서 나도 이곳저곳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먼저 말을 걸어오던 4명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몇몇 친구는 17살이라는데 이 곳에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자기들 이름을 말하는데 타냐 타샤 마샤 비슷한 발음이다. 자기들이 마시는 술을 자꾸 한입 먹어보라면서 주는데, 조금 지나고 생각하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다 조금 있으니 담배가 있냐고 물어보고 혹시 한잔 더 마실 거면 자기 것도 사다 달라고 하는 폼이 뭔가 수상쩍기도 했다. 그들과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본 발릭은 씩 웃어 보이며 자기는 저쪽으로 간다고 손짓한다. 그러라고 하고 이곳저곳에서 어우러져서 맥주를 마셨다. 아시아 사람은 나뿐이었고 거의 외국인은 없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온 촬영팀을 만났는데, 평양을 갔다 와봤다는 한 친구는 취한 건지 그냥 무시하고 싶었던 건지 계속 북한 남한을 비교하면서 농담을 하는데 하나도 안 웃긴다. 미국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왔다는 친구도 있었고 이런저런 사람들과 어울려 먹는데 나중에는 휠체어를 타고 와서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미국에서 클럽에 휠체어를 타고 들어와서 춤추는 사람도 본 적이 있는데 이런 곳은 참 이런 것에 대해 편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를 보고 우리나라의 이런 수준 격차가 갑자기 몇십 년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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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가 넘으니 친구들이 술집 앞으로 다 모였다. 릴랴 외 다른 친구는 너무 취해서 갔다고 하고 우리 넷은 길 건너의 24시간 식당으로 갔다. 들어보니 3시부터 6시까지는 1+1 행사를 해서 밥을 먹자는 거였다. 굉장히 좋은 딜이었고 나는 가락국수라면을 시켜 릴랴와 하나씩 먹고 발릭은 초밥과 미소국을 시켜 먹는다.
역시 술 먹고 난 후는 국물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들도 그릇을 들고 국물까지 다 마신다. 릴랴는 상당히 취해서 몸을 베베 꼬며 약간의 교태를 부렸는데 마주 앉은 나는 부담스러워서 돈을 내고 먼저 나가겠다고 한 후 바로 가서 한잔을 혼자 더 마셨다. 그때가 거의 3시 30분이 넘었는데, 바 안에는 토를 한 여성이 있었고 소강상태였다.
다른 친구들이 먼저 우버를 타고, 발릭과 나는 맥주를 한 잔씩 더 마시고 4시 30분쯤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잤다.
생각보다 치안도 괜찮고 인종차별도 없고 사람들도 한국인이라는 말에 호의적이고 재밌는 우크라이나의 밤문화 이자 불금이자 클럽이자 술 문화이자 나이트 라이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