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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 As A Medium

by 가브리엘의오보에

*Drop Labs, Unsplash


기억의, 매체로서의 역할은 무엇일까?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던 어느 날, 성시경의 ‘차마’가 에어팟을 타고 흘러나왔다. 창밖은 비가 오지도, 흐리지도 않은, 어제와 같은 날이었다. 황혼이 지고 있긴 했다. 일출보다 황혼을 좋아해서일까? 자연스럽게 가사 속에 그려진 광경을 상상했다. 놀랍게도 추억은 온데간데없고, 추억에 묻은 아픔만, 깊이 묻어둔 아픔만 터져 나왔다. 왜 아팠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감정은 너무도 생생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주변 사람들 앞이라 꾹 참았다. 아직도 눈이 화끈거린 감각이 생생하다. 기억이 추억과 감정을 분리해서 저장할 수도 있는 것일까? 그 순간 나는 다시금 기억에 대해 주목하게 됐다. 매체로서의 기억이란 무엇일까?


기억은 나와 과거를 잇는 다리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억을 감각 경험의 축적으로 보았다. 그에게 기억은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판단과 미래의 예측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키케로는 기억을 ‘지혜의 저장고’라 불렀고, 퇴계 이황은 기억을 ‘자기 성찰과 수양의 도구’로 여겼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를 향해 걸어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길 원하는지. 그러나 기억이 항상 선명한 것은 아니다. 좋았던 기억은 오래 남고, 상처가 된 기억은 억눌리기도 한다. 때로는 아픔만 남고, 그 원인은 희미해진다. 누군가는 기억이 미화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기억은 나의 장점을 육성하고, 아픈 기억은 가지 않아야 할 방향을 알려 준다. 혹은, 아픈 기억이 예전부터 걸어온 길을 지속할 때, 웅덩이에 빠지거나 발목이 접질리지 않게 움츠러들게 만들지도 모른다.


기억은 관계의 촉매이자 파괴의 매체다


기억은 관계 속에서 더욱 강렬해진다. 우리는 타인을 기억함으로써 그들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함께한 시간들, 나눈 대화들, 작은 순간들이 모여 상대와의 관계 형태를 결정한다.


과거의 나는 상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스스로를 닫아버렸고, 그 관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대에게 실수하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많은 관계가 아픔을 피워 올렸고, 그 아픔들은 애써 숨겼다. 나와 다시 만나지 못하도록.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내가 상대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겠다’는 태도로 변했다. 이는 스스로 비하하던 나에게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기억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 사실, 과거의 나는 기억 속에서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나의 약점이 상대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했었다. 마치 아르마딜로의 갑옷처럼. 언젠가는 막을 내릴, 아니, 이 이상 나아가면 내가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실수 뒤에 숨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과 우정이 상이한 감정이 아니라 표현 방식의 차이가 있는 이음동의어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만일 앞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 즉, 서로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를 이해하게 되는 이를 만난다면, 나는 상대를 우정으로 대할 것이다. 사랑과 우정은 상대가 행복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으니까. 굳이 티를 내지 않아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과거처럼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고 상대가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진 매체로서의 기억의 정의다.


기억은 나와 미래를 이어주는 힘이다


니체는 기억이 ‘인간의 가치 체계를 형성하는 핵심 요소’라고 보았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실수를 피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기억이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기억이 우리를 가두고, 우리 스스로를 깎아내리게 만든다. 나는 오랫동안 ‘나는 부족하다’는 기억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기로 했다. 기억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도록, 나아갈 수 있도록 사용하고 싶다.


당신은 기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룰 것인가?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나를 이어주는 매체다. 이제 나는 기억을 부정하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아팠던 순간도, 행복했던 순간도 나를 이루는 일부다. 앞으로 중요하게 여길 부분은 그 기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는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기억에는 감정만 기록되지 않는다. 사실도, 사건도, 타인의 행위도, 읽은 책도, 독서하며 떠올린 상상도 모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오래 기억되는 내용은 나에게 의미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기억을 매체로 여겨, 과거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성장하는 것. 그것이 기억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이러한 영향력이 있는 기억을 당신은 어떻게 수용하고 다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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