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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혜 May 18. 2018

안네의 '야한 농담'이 뉴스가 되는 이유

여성의 순결성, 성적 수동성을 강요하는 문화

『안네의 일기』에서 봉인돼 있다 발견된 '야한 농담' 두 페이지가 어제 하루 실시간 검색어를 달궜다. 오늘자 신문을 둘러보니 국제면 등에서 꽤 비중있게 처리한 매체들이 많았다. 소위 메이저 매체들이 주를 이뤘다. 혹시나 해서 봤더니 우리 신문은 안 썼다.


그 중 조선일보의 헤드라인이 가장 인상적이다.

가려진 일기속 두 페이지 보니… 안네, 너 그렇게 '야한 아이'였니

란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 소식은 화제가 됐다. 일단 그 유명한 안네의 일기에서 미공개 페이지가 공개됐다는 자체가 뉴스는 뉴스다. 하지만 이 뉴스가 진짜 잘 팔린 이유가 뭘까. 안네라는 10대 소녀가 성과 관련된 발언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더 많은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아직 너무 자연스러운 사회라는 것.


안네가 성 관련 얘기를 하는 것, 이 내용이 널리 공개되는 것에 뉴스가치가 부가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달라지지 않고 있는 '여성에 대한 순결성, 성적인 수동성 강요'와 무관치 않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순결한 소녀여야 할' 안네가 야한 농담을 던졌다는 점의 '이례적인' 측면이 재밌다고, 혹은 임팩트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일부 기사는 친히 "당시 안네의 나이는 13세였다"라며 독자가 곧장 궁금해 했을 만한 정보를 덧붙였다.


가려진 일기 속에 담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성이 생리를 시작하는 때는 남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기가 됐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지만, 결혼하기 전에는 당연히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정상적인 모든 남자는 거리의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다. 파리에는 (성매매를 위한) 커다란 집들이 있고 아빠도 거길 가봤다. 독일 여군들이 왜 네덜란드에 있는 줄 아느냐. 그들은 독일군의 침대야.

-아내가 아주 못생겨서 그와 관계를 원하지 않는 남자가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친구가 아내와 함께 침대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마디 했다. 친구는 원해서 하지만, 내게는 '의무'인 것이다.

-성행위는 '율동적인 움직임', 피임약은 '일반적으로 먹는 약'.


비록 안네가 당시 사회적 시선을 고려해 풀칠을 해버리긴 했지만 이 같은 내용을 가감없이 쓸 수 있었다는 점에 개인적으로는 호감이 높아졌다. 중요한 건 이 내용을 풀칠해버려야 했던 그때와 지금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단 점이다. 이 부분에서 사회적 인식 개선은 미미한 수준이라서다.



이와 관련해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한 말이 있다. 「여성의 전문직 」이라는 강연에서 그는 여성 작가들이 부딪히는 심리적 장애에 대해 1. '가정의 천사' 역할 강요 2. 성적 주제 언급에 대한 금기시를 꼽았다. 울프는 자신이 가정의 천사를 죽이는 것은 갖은 노력 끝에 성공했지만, '성적인 주제 언급'이라는 금기는 끝내 깨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가정을 수호하는 여성이라는 창백한 유령을 죽인 후에도 "하나의 육체로서 나 자신의 경험을 진실대로 말하는 것"은 여전히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남성은 성과 정욕에 관련해 말하는 데 자유를 누리지만, 이러한 자유는 여성에게는 엄격하게 통제되며, 그러한 제한은 내면화된다."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성들에게 이 두 번째 금기를 깨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훨씬 쉽게 '문란하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붙일 만 하다고 여기고, 붙여 마땅하다고까지 생각하는 문화는 여전하다. '성적 자기결정권' 같은 개념은 아직 먼 나라 얘기다. '여성의 주체적인 선택' 자체가 아직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만연하다. 하물며 이 선택에 대해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자기결정권 얘기를 하자면.. 오랜 기간 성폭력 사건에서 여성은 "왜 거부하지 않았냐"고 질문당해야 했다. '동의여부'가 아닌 '거부여부'를 묻는 것 자체가 여자한테 선택권이 있다는 건 생각도 못하는 작태다. 뿌리로 파고들어 보면 결국 '간택당하는' 존재로, 수동적인 존재로 박아놓았을 뿐이다. 단골 스토리 한번 보자. 일자리 등의 볼모는 장난이고 심하면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 심지어 완력으로까지 약자인 여성이 목숨 걸고 생 발악을 하며, 분명 밀폐돼서 탈출이 힘들 것이 자명한 공간에서 히어로물 주인공처럼 안젤리나 졸리 급 액션과 기지로 혼자서 용케 빠져나오지 않는 한, '암묵적 동의'를 한 것으로 간주돼 그놈의 단골 레퍼토리인 '합의한 관계'에서 오직 남자 인생 하나 망가뜨려보겠다고 앙갚음 하려고 덤비는 꽃뱀 취급을 받으며, 미투가 아닌 질투에 눈 먼 '첩년'이 되어, 봐주고 봐줘서 한번까지는 강간당했더라도 3-4번의 관계가 이뤄졌다면 빼박 자발성이 인정되는 것이며(불륜관계에서 그 긴 기간 3-4번의 관계만 한 것이 더 부자연스럽다는 추론은 아예 제외한 채), 결과적으로 여론재판과 무고죄의 희생양이 되는 시나리오는 절대 낯설지 않다. �


이제서야 거부 아닌 동의 여부가 성폭력 수사 기준으로 변경 제시되며 자기결정권의 진정한 의미가 수용되기 시작했지만 사회적 인식이 따라오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아니 대체, 딸내미는 밤늦게 돌아다니면 못쓴다 하면서 아들내미는 좀 늦게 돌아다녀도 왜 괜찮은가! 결혼정보회사에서 외국유학 갔다온 여자의 점수는 깎아도 남자 점수 깎는단 소리는 못들어봤다. 깎을거면 똑같이 깎든가. 이 무슨 코미디인가. 이걸 읽고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면 아직도 갈 길이 참 멀다는 뜻이다. (그 딸내미는 그놈의 순결을 혼자서 잃고 들어오나?)


여성의 순결과 남성의 순결을 바라보는 시선이 왜 조금이라도 달라야 하는가. 그 시선이 완전히 똑같아질 때까지 변화를 촉구하는 움직임은 계속돼야 한다. 결국 그렇게 가긴 할 것이다. 시간과 속도의 문제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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