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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한림 Jun 27. 2020

#5. 지식예능과 나

2014-

1. 썰전

나는 고3때 진로를 바꿨다. 고2까지의 진로란을 보게 되면 항상 카피라이터, 국어교사 등 주로 국어와 관련된 직업을 적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뭘하는 직업인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난 국어과목을 꽤 좋아했고, 국문학과 진학 예정 학생의 진로란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2014년 <썰전>이 인기를 끈다. 당시 1부는 이철희 소장과 강용석 변호사가 각 진보, 보수를 대표한 논객으로 참여하였고 2부는 연예인들에 대한 썰을 뽑는 코너였다. 당연 나의 이목을 끈 것은 1부였다. 이철희 소장은 나에게 지식인 아이돌이었다. 닮고 싶은 우상, 어떻게 하면 저런 말을 뱉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든 대상이었다. 겸손한 태도와 살금살금 웃으며 핵심을 집는 언어들. 나는 그와 같은 언어를 하고 싶었다. 2014년의 <썰전>은 한 회차도 빠짐 없이 봤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도 유시민으로 진보 논객이 교체되기 전까지 매화 챙겨봤다.

그리고 마침 내 고3의 모의고사 성적이 같은 대학이라면 문과대학보다 높게 쓸 수 있을 수준이 되었다. 경영에는 통 관심이 없던 이 학생은 결국 <썰전> 탓에 정치외교학과로 수시를 독식시키고 결국 정치외교학과로 입학한다. 이곳에 오면 신입생들의 고정된 질문은 하나다. "넌 정치야, 외교야?" 사실 외교는 정치를 국제로 확장시킨 개념이어서 본질적으로 둘이 다르지 않다. 그래도 내가 입학한 학교는 외교 부분이 더 유명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외교관이 될 것을 기대하며 입학한다. 저 질문을 신입생들끼리 주고 받는 것은 '너 입학하기 전에 김효은 외교관의 '외교관은 멀티 플레이어다.'를 자기소개서에 써서 입학했니?'를 함의한다. 더불어 '너는 외국어 자격증을 딸 생각있니?' 이정도랄까. 어쨌든 나는 오로지 리틀 이철희만을 꿈꾸며 들어왔기 때문에 외교 따위 관심도 없었다. "아니, 난 정치야."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하고 교수님과 정치인들을 살펴보면 알게 된다. 여기는 심각한 남초다. 물론 입학 당시의 우리 학번은 50:50의 비율의 평등한 남녀비율을 보였다. 이런 비율을 갖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문득 의구심이 든다. 내가 이철희 소장과 같은 남성 지식인을 나의 롤모델로 두는 게 맞나. 나는 그와 같은 발화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능력의 문제도 있겠다만, 내가 그와 같은 말을 할 때 이 사회가 그것을 같은 느낌으로 이해해줄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일치화의 대상과 나와의 간극이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느낌이다.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이상향으로 뽑는 경우는 많다. 미디어를 통해 나오는 남성, 특히 지식인 모습이 절대 다수였기 때문에 그건 보편성에 가까운 모습이다. 하지만 역으로 남성은 여성의 말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뽑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애초에 그렇게 삼을 수 있도록 남아있는 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 그리고 그들은 미혼 또는 다른 여성의 희생으로 올라설 수 있던 알파걸일 것이다.

2. 알쓸신잡

이런 간극을 느끼고 나서부터 나는 마음 속에서 이철희 소장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여전히 똑똑하고 꽤 괜찮은 태도를 지닌 지식인이었지만, 내가 그를 이상향으로 꼽기에는 사회가 남몰래 부여한 계급의 차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철희 씨가 국회의원으로 출마를 하였다. 당신만은 비평가로 남아있어주길 바랬어...

이런 와중에 나영석 PD가 하는 <알쓸신잡>이 시작됐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유행인 팟캐스트 '지대넓얕'을 포맷을 가져온 것이었다. 거기에 나PD의 주특기인 여행을 얹었다. 나는 또 이 프로그램에 엄청나게 빠져들었다. 여행 자체보다는 이 사람들이 그로부터 받은 영감을 대화를 통해서 어떻게 풀어나가는 지에 매번 놀랐다. 내 인생을 곱절 정도 살며 공부를 하면 저 정도의 지식이 톡톡 뱉어낼 수 있나.

<알쓸신잡>을 재밌게 보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유희열을 비롯한 패널들에서 내 이상향을 찾진 않았다. 다만 똑똑하지만 그 태도가 겸손한 남자가 내 이상형일지는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시즌2까지 전편을 다 시청했다.

시즌 3가 되자 처음으로 여성 교수인 김진애 건축학 교수가 출현했다. 나는 꽤 큰 감동을 하며 지켜봤는데, 사실 그녀도 내 지식인 상으로 굳혀지는 데에는 실패했다. 물론 대화에서의 그녀의 지식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특히 에피소드 초기 아테네와 피렌체 등을 다니며 유럽 건축물을 설명하는 그녀의 지식은 프로그램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나영석 PD 특유의 인물 러블리화 작전 편집은 이번에는 김진애 교수에게 집중되어, 온통 그녀를 '오홍홍' 어머님 한 분으로 그려놨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편집일 수도 있었으나, 다른 남성 출연진들에 비해 그녀의 '성격'은 너무 두드러진 요소였다. 이렇게 사랑스럽던 그녀 역시 현재 열린민주당 의원이 되었다.

3. 차이나는 클라스
<알쓸신잡>은 시즌3에 종영된 듯 하다. 시청률이나 화제성이 마지막에 무너졌기도 했다. 그 이유를 김진애 교수 탓으로 돌려지는 댓글들을 볼 때마다 인상이 찌뿌려진다.

그 뒤로 나는 팟캐스트 '지대넓얕'을 다 들어보기도 하고, 여러 지식 예능들을 살펴봤다. 그러다가 최근 잘 보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바로 <차이나는 클라스>(이하 차클)이다. 어떤 주제를 설명해줄 수 있는 교수와 그에 대해 질문해줄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패널들이 등장한다. 아직까지 교수 비율은 절대적으로 남성이 많지만 나는 이 패널들에게서 하나의 희망을 품는다.

세 명의 남성 패널들과 5명의 여성 패널들이 출현한다. 모델 홍진경, 레인보우 지숙, JTBC 강지영 아나운서, 최서윤 편집장, 배우 남보라까지 방송계나 언론계에 있는 다양한 여성들이다. 이들이 진심의 눈으로 뽑아내는 꽤 날카로운 지적인 질문들이 내게 각기 다른 통쾌함을 준다. 강지영 아나운서와 최서윤 편집장에게는 지식 분야 여성 종사자들의 인사이트가 보인다. 지숙과 남보라에게는 공부를 못했을 것이라는 배우와 아이돌에 대한 편견 타파가 이루어지고, 홍진경에게는 예능인이라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뽑아낼 수 있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가 보인다.

난 이들 중 누군가를 다시 내 이상향으로 삼지 않는다. 이제는 별로 필요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패널들을 보면서 내 모습을 투영했을 때 이질감을 느끼질 않는다. 열심히 길러온 자신의 지적 수양을 질문으로 뽑아내는 저 2030 여성들이 이질적이지 않다. 저 자리에서 계속 질문을 던지는 자들이 언젠가는 차클의 교수님처럼 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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