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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한림 Jun 03. 2020

#4. 버리지 말아야 할 것

당신의 버리기 주종목은 무엇입니까? 

할머니는 삼남매를 키우시며 손이 커진 탓에 매번 대거의 음식물 쓰레기를 양산하신다. 엄마는 이런 할머니를 놀리며 난지도 공원의 일등공신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운다. 삼남매가 출가한 이후에도 할머니 손은 줄지 않았다. 찌개나 반찬이 조금이라도 오래 됐다 싶으면 바로 버린다. 할머니의 음식물 쓰레기 봉투는 마를 날이 없다.  


엄마는 매주 한 벌 이상의 옷을 버린다. 엄마도 분명 해외 수출되는 빈티지 업계에 거성같은 존재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엄마는 애초에 오래 입을 옷을 사지 않는 것이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 의류는 거의 사지 않지만 그녀의 의류 계절 주기는 패스트 패션을 능가한다. 어쨌든 엄마는 그 옷이 유행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거나, 목이 늘어났거나,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가감 없이 버린다. 이것이 나에게까지 위협이 되는데, 엄마는 내 방에 옷이 어질러 있을 때도 다 버려버리겠다고 협박을 한다. 십년 전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주택의 1층에 살 적에는 내 방에 대해 한창 씨름을 하다가 엄마가 집 앞으로 내 옷을 던져버렸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던 할아버지가 허허 웃으시며 ‘아이고 이걸 왜 버리냐’라며 갖고 올라오셨다. 


2G폰을 쓰던 시절의 나는 연락처를 참 잘 지웠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연락처를 한 번씩 쭉 돌아보며 연락을 꽤 길게 안하거나 마음에 없던 사람들의 연락처는 반드시 지워 나갔다. 반대로 내가 너무 좋아해 연락을 할까 겁이 나는 사람들의 연락처도 지웠다. 번호 기억을 잘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삭제가 강제적인 자제력에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미취학 아동 시절이 담긴 앨범 3개와 몇 개의 비디오가 있었는데, 이중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오직 한 개의 앨범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사진은 싸이월드에 올렸었지만 알다시피 싸이월드는 폐업을 해버렸다. 그마저도 약간의 백업을 해둔 외장하드는 페루 쿠스코에서 하우스키퍼에게 도둑 맞은 듯 하다. 하우스키퍼님, 지구 반대편 중고등학생은 그렇게 살고 있답니다. 고등학생 때 사진은 나보다는 친구들이 더 많이 갖고 있다. 어쨌든 내가 버렸든, 나를 떠났든, 이러한 추억들 중에서 강렬하지 않은 인상의 것들은 자연스레 잊혀졌다. 이러한 습관들은 대학에 들어온 이후에는 자동 앨범 백업이 가능한 스마트폰과 밀물처럼 들어오는 새로운 사람들의 연락처에 의해 다 손실되었다. 2G폰을 쓰던 당시의 나는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와 사진의 개수를 읊을 수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가늠조차 하지 못하며 그저 흘려 보낸다. 


할머니, 엄마, 그리고 과거의 나. 우리 셋의 공통점은 잘 버리는 것들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어쩌면 더 좋아하는 것을 채워 넣기 위해 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엊그제의 찌개를 버려야 오늘의 새로운 찌개에 가스를 올릴 수 있고, 엄마의 작년 옷이 버려져야 오는 길에 구입한 반팔 티셔츠가 새롭게 옷장을 차지할 수 있듯이. 내가 사진을 지워야 용량 내에서 새롭게 셔터를 누르고, 물리적 연락처를 비워내 마음에서 덜어내야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듯이. 인간의 욕심은 끝 없지만 그들의 소유를 담기 위한 것에는 한계가 있다. 

현대인이라면 이렇듯 은연 중에 잘 버리는 종목들이 있다.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일수록 어느 날 돌연히 버리게 된다. 사진, 동영상, 마스크, 안경, 가방, 이어폰, 차. 어느 날에는 가장 소중했던 것들이 새로운 소중함의 자리를 위해 휴지통으로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들어간다. 


그렇다면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잘 버릴 수 있는 시대에 어려운 질문이다. 버리면 언제라도 그 버림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눈물을 지을 것 같은, ‘나’ 이외의 대상. 혹자에게는 사진이나 유품과 같은 추억 매체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돈이나 보물 1호와 같이 자신의 피땀눈물이 모인 사물일 수도 있다. 종교인의 경우 자신의 종교나 절대자가, 종교가 없더라도 가족, 애인과 같은 관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을 버리게 된다면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이 무섭고 이후의 삶이 두려워지는 것. 한편, 무소유의 태도를 지향하는 법정 스님과 같은 분들은 이 세상에서 그런 사욕에서 물러나는 것이 이로운 삶의 자세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런 미련, 그런 애착, 그런 아쉬움 하나 없는 삶은 오히려 겁쟁이처럼 느껴진다. 전혀 쿨하지 않다. 삶의 한 점에는 사랑함으로써 스스로의 약점을 남기는 것도 용기이고, 그러한 약점에 감정과 책임을 갖고 사는 것도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 열정이 있다는 증거다. 오히려 더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많이 만들고 사는 삶이 더 가치 있고 책임감 있게 살아내는 방법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어떤 것은 아쉽게 잘 버리고 어떤 것은 버리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질척이고. 혹시라도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입밖으로 소리내어 엉엉 울 수 있는 삶. 그렇게 잘 살고 싶다. 


혹자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인류의 이름으로 공익의 이름으로 희생할 수도 있고, 미를 숭배할 수도 있다고. 나는 그 모든 정열을 일시적으로라도 경험했던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들만이 절대적으로 살았던 유일한 인간들이다. 삶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인간들이다. 우리가 사랑과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식을 없애버려서가 아니라 용기를 가짐으로 가능한 것이다. 어느 구석에도 미치지 않는 존재함은 가치가 없다. 그러한 존재함은 돌이나 나무 조각, 잡풀의 것과 다르지 않다.  

-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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