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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한림 May 25. 2020

#3. 개인과 가족성.

나쓰메 소세키《마음》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을 중심으로.



Ⅰ. 서론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첫 관계는 바로 혈연의 가족이다. 엄마, 아빠, 그리고 혈연 관계의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 형태의 ‘정상 가족’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가족을 그들의 정서적 1순위, 친밀한 가족성(家族性)을 형성하여야 한다고 압력을 받는다. 그러나 강제된 가족성의 대상과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정신적인 유대 과정을 통해 부여하는 가족성은 다를 수 있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1878)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말처럼 가족 구성원 상호간의 유대적 우선순위가 불합치 하는 것 또한 가족의 형태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혈연의 관계가 합치되지 못하는 경우, 특별한 문제적 상황이 없다면 개인은 그저 당위적 존재로서 혈연의 가족을 인지하고 방조하게 된다. 이후의 혼인 관계로 새롭게 가족을 구성하게 되지만, 혼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혈연 가족과 교류를 지속하는 한 혈연 가족에 대한 질문은 제자리로 방치된다. 

    동아시아의 경우 전근대 시기부터 공통적으로 유교 영향권 하에서 ‘국(國)’과 ‘가(家)’에 대한 헌신이 강조되었다. 근대 이후 농업 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는 기존의 가부장 중심의 일부다처, 신분제에 기초했던 대가족 형태에서, 애정 관계에 기반한 개인들이 자유 연애 과정으로 인해 일부일처의 혼인을 결정한 핵가족 형태를 지향한다. 이 가정들을 국가가 법적으로 등록해 인구를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남과 여로 이루어진 이성애적 법률혼은 정상적 가족 이데올로기로 등장한다. ‘개인’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이전보다는 느슨해진 가족이 등장함과 동시에 국가의 법으로 인해 이 핵가족은 확실한 정상화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러나 그에 비적응(非適應)한 개인들은 결국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가족은 그 집단 내에서 출생한 개인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폭력적인 관습인가? 이 우연의 혈연적 관계에 대한 신뢰는 타인에 대한 경계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가족이란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나쓰메 소세키는 그의 소설 《마음》(心, 1914)에서 정상성에서 벗어났지만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가족 관념을 근대인의 시각에서 제시한다. 대표적인 장면으로 혈연 가족인 아버지의 임종 앞에서 도쿄행을 선택한다. 혈연을 넘어 타인을 선택한 ‘나’의 결정은 무엇에 기초해 있을까? 이를 단순히 ‘나’의 이기적인 결정으로 여기기보다는, ‘나’의 가족성의 방향으로 살펴본다면 ‘나’의 유대적 가족은 더 이상 혈연에 머물지 않음을 관찰할 수 있다. 이들 관계 외에도 나쓰메 소세키는 기존 가족의 문제점들과 새로운 가족 형태를 보여주며 근대 이후 등장할 가족 형태에 대해 문을 열어두었다.
가족을 다루는 영화를 주로 그려온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의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2018)은 나쓰메 소세키가 보여준 대안 가족의 등장에 대한 긍정에서 더 나아간다. <어느 가족>은 타인이지만 서로에 대한 유대로 구성된 대안 가족의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같은 일본인이지만 약 100년의 시대적 차이를 둔 두 창작자가 제시하는 가족 관념은 공통적으로 질문한다. 개인은 어떤 가족성을 지닐 수 있는가?


Ⅱ. 나쓰메 소세키 《마음》(, 1914)과 가족. 

    《마음》에는 주된 가족의 형태로 ’선생님’과 그의 부인으로 이루어진 혼인 관계의 가족과 ‘나’와 형, 여동생 그리고 ‘나’의 부모님으로 이루어진 핵가족이 등장한다. 주로 상편과 중편에서 등장하는 두 가족 사이의 연결고리로 ‘나’는 기존의 혈연 중심의 가족으로부터 충분한 만족감을 갖지 못하는 문제의식을 지닌다. 그러한 이유는 우선 시골에 거주하고 있는 부모님과 도쿄에서 수학한 ‘나’ 사이의 이질감, 가부장적인 부모로부터 받는 출세에 대한 압박감, 그리고 ‘아버지’와 상반되는 도쿄의 지식인 ‘선생님’과의 비교를 통해 그 거리감은 더욱 두드러진다. 다음 대목을 통해 ‘나’가 인식하는 ‘선생님’과의 유대는 친구나 지인 이상의 것임이 나타난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와 선생님을 비교했다. (중략) 선생님은 환락의 교제에서 생기는 친밀함 이상으로 어느새 내 머리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다만 머리라고 하면 너무 차가운 느낌이라 가슴이라는 말로바꿔 말하고 싶다. 살 속에 선생님의 힘이 파고들어 있다고 해도, 핏속에 선생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다고 해도 그때의 나에게는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라고 말할 것도 없이 선생님은 생판 남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눈앞에 늘어놓고는 비로소 커다란 진리라도 발견한 것처럼 깜짝 놀랐다.

    하나의 해석으로 ‘나’가 ‘선생님’에 대하여 갖는 감정이 동성애의 태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가 ‘선생님’과의 관계성을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부성(父性)의 이미지와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선생님’에 대한 가족성, 특히 부성에 대한 지향으로 해석된다. ‘선생님’ 역시 도둑이 들었던 집을 ‘나’에게 맡기거나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신뢰하게 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나’와의 관계에서 특수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부인 또한 ‘나’의 옷을 세탁해서 풀을 먹이거나 바느질을 해주는 등 근대 당시의 모성적 태도를 보여준다. ‘나’가 묘사 하였듯이 ‘선생님’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던 사람 임과 동시에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을 손을 벌려 안아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그의 부성을 완전히 발현해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강히 거부하지 않는다. 부부에게 아이가 없다는 죄 의식의 배경은 ‘선생님’이 ‘나’의 정신적 의탁을 거절하지 않도록 하고 독자로 하여금 그를 어색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기제이다. 상호 동일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나’와 ‘선생님’ 내외는 일정한 가족성을 공유했으며, 이는 특히 ‘나’에게 있어서 기존의 혈연적 ‘아버지’로부터 결핍된 정신적 부성을 만족시킨다. 

    가부장적인 가족에 대한 비판의식은 ‘선생님’의 친구 ‘K’가 그의 양부모로부터 의사가 됨으로써 이에(家)의 계승을 강요 받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K’만큼의 압박을 부모로부터 받지는 않지만 대학 졸업 이후 취업에 대하여 부모로부터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는다. ‘선생님’ 역시 과거에 숙부로부터 사촌 누이와의 결혼에 대해서 압력을 받는다. 이러한 장면들은 가족의 구성이 법률적이든 혈연적이든 구성원에게 억압을 행사한다면, 결국 그 가족성에 대한 만족감은 상실됨을 보여준다. 
     ‘아버지’와 ‘형’은 남겨질 ‘어머니’와 집안을 ‘나’에게 맡기고자 하며 다시 강압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선생님’은 그의 아내에게 자신의 비밀을 끝까지 말하지 말라는 것으로 소극적인 부탁을 다한다. 말로를 앞둔 두 부성적 인물의 대비는 혈연 또는 법률로 맺어진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시되는 억압과 의무들을 부정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개인들이 정신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족 관계를 긍정한다. 

    나쓰메 소세키가 이러한 대안적 가족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된 배경에는 근대 당시 혼인과 연애에 대해 사회 전반이 개인성을 인정하기 시작함에 있다. 그가 《마음》(1914)을 집필한 당시는 ‘(자유)연애’가 보급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의 근대문학사에서 첫 장편소설로 간주되는 이광수의 《무정》(1917) 역시 자유연애 관념과 기존의 전통적 가치관 사이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유 연애는 개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애정 관계 형성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기존에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가문과 가문 간의 결합에서 개인과 개인의 결합으로 혼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 결국 가족의 시작은 개인들의 선택적인 비혈연 관계라는 것이 발견되었고, 이것이 부모-자식의 관계로 가지를 뻗게 될 때 생겨나는 가부장적 억압에 대한 문제의식이 본격화되었다. 소세키는 이에 대해 보다 유연한 가족관을 제시하며 개인들은 스스로 가족을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Ⅲ.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2018)과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2018)은 전면적으로 사회가 법적으로, 정상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비혈연 가족에 대해 다루며 그들의 유대를 보여준다. 이 가족의 6명의 구성원들은 모두 기존의 가족들로부터 버림 받았거나 기존의 가족들로부터 뛰쳐나올 수밖에 없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러한 버림 받음에 대한 공감, 각자의 외로움, 돌봄, 그리고 경제적인 의존으로 서로 얽혀져 있다. 영화의 원제는 ‘좀도둑 가족’인데 이는 그들 모두가 기존의 관계들로부터 버림 받음으로써 서로를 주워 왔다는 것과 그들 가정의 주요한 경제 수단이 좀도둑질이라는 점에서 중의적 의미를 지닌다. 

    한 집에 살지만 그 안에서 가족에 대한 서사는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오사무(男)와 노부요(女) 부부 사이의 쇼타(男兒)와 린(女兒). 할머니와 그녀를 깊게 의지하는 아키. 우사무-노부요 부부와 쇼타, 린의 관계가 가장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핵가족 형태와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쇼타와 린은 오사무-노부요 부부를 아빠, 엄마 대신 아저씨, 아줌마로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의 부재가 그들의 관계에 부성, 모성이 부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사무는 자신의 본명이었던 ‘쇼타’를 쇼타에게 주며 언젠가는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주길 바란다. 노부요 역시 쇼타와 린이 준비되었을 때 엄마라고 불러주기를 바라며 그저 기다린다. 노부요는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자란 쇼타와 린이 오히려 스스로의 가족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강할 것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그들 스스로 이 관계에 대해 연민하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가족이기 때문에 기존의 가족보다 더욱 긍정하는 관계성을 보여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은 이러한 대안적 가족에 대한 긍정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가족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구성원과 그들의 관계성 이상으로 현실의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가족과 함께 그들이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과 조건들이 안정적인 ‘가정(家庭)’의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좀도둑질과 할머니의 연금으로 주된 생계를 이어가는 이 가정에는 두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조건과 인식은 결여되어 있었고, 이는 점차 성장하며 사회로부터 윤리 의식을 흡수하기 시작하는 쇼타에 의해 고발된다. 노부요의 대사처럼 이들 가정은 사회의 인정 없이 그 형태를 지탱하기에는 더 이상 역부족이었다. 이후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린은 기존의 학대 가정의 가족들에게 되돌아가고 쇼타는 위탁 가정에 맡겨져 교육을 받게 된다. 할머니의 연금을 지속적으로 수령하기 위해 그녀의 시신을 집 지하에 유기하였던 노부요와 오사무는 노부요가 대리 징역을 살게 된다. 

    가족이 공간적으로 흩어졌다는 측면에서 이들의 대안적 가족은 결국 사회로부터 인정 받지 못한 실패로 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도 가족이 가정의 형태로 항상 공간적으로 함께 해야 한다는 의식에 기초한다. 이들 가족은 서로 공간적으로 흩어졌지만 각자의 정체성과 정서에 여전히 존재한다. 쇼타는 결말에서 오사무와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혼자 “아빠”라는 단어를 읊조린다. 본인의 학대 가정으로 돌아가게 된 린은 마지막 장면에서 문 밖의 난간 위로 저만치 밖을 내다본다. 그녀가 좀도둑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서 쳐다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길게 내다본다면 린은 그녀의 삶에서 그들을 자신의 가슴 한 편에 묻고 앞으로 새로운 가족들을 계속 만들어나갈 것이다. 이는 린 뿐 아니라 쇼타, 오사무-노부요 부부, 그리고 아키에게도 모두 해당한다.

    영화 내의 관계성에서 할머니와의 관계가 중심이었던 아키의 행방은 어디로 향할까? 기존의 부유한 가정의 첫째 딸이었던 아키는 가출 이후 유사 성행위로 생계를 유지한다. 자신을 이 집으로 불러와 같이 살자고 제안한 할머니와의 관계는 그녀의 가족성에서 핵심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노부요는 감옥에, 오사무는 작은 원룸으로 흩어졌다. 노부요-오사무 부부가 공간적으로는 흩어졌으나 그들의 유대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오사무의 대사를 통해, 좀도둑 가족 중 아키의 가족성만 묘연해졌다. 끝까지 아키의 행방에 대해서 영화는 그 이후를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감히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키는 본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키는 더 이상 쇼타나 린처럼 법적 돌봄이 필요하지 않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본가로 돌아갈 만큼 태연히 스스로의 상처를 봉합하지 못했다. 
     아키의 묘연함에 대한 영화의 빈칸은 ‘탈(脫)가족’에 대한 긍정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은 개인에게 중요한 공동체이다. 하지만 가족을 갖기에 현재의 상황이 마땅치 않거나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서 가족이 한 공간에 존재할 수 없다면, 개인은 가족이란 공동체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연민이나 비정상의 틀을 씌워 임시적인 일탈 형태라는 식의 시각은 거두어야 한다. 

이 영화는 그 시작이 되어주는 비혈연 가족과 그로부터의 독립, 이탈까지 개인과 사회의 수용성에 대해 질문한다.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 어디까지 그들을 나의, 또는 사회의 정상 테두리에 넣고 있는지 질문한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발생하게 된 1인 가구가 전 가구의 30%로, 4인 가구 비율을 앞지른 현대에서 가족과 그로부터 벗어난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더욱 많이 필요하다. 


Ⅳ. 결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꾸준하게 가족의 형태와 뿌리보다는 그 안의 관계를 구성하는 사랑과 유대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렇다면 개인들은 근본적으로 왜 가족이 필요한가? 나쓰마 소세키의 《마음》을 통해서 이에 대해 대답하자면 우선 정신적 유대라고 답할 것이다. 히레카즈는 가족을 실제의 삶으로 재현시키면서 가정이라는 공간이 제공하는 개인에 대한 '돌봄'의 필요성, 그리고 개인의 삶을 지탱할 정신적 유대의 기록이라고 답한다. 이는 개인의 삶을 이루게 되는 역사의 공동체에는 하나의 가족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이든지 가족을 포함한 여러 공동체의 흔적이 축적됨을 의미한다. 

    20세기와 21세기의 1세기의 시대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혈연 가족 이외의 가족의 형태는 여전히 정상 테두리 밖에 있다. 그 범주 밖의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스스로의 지향 형태에 세모를 그리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 가족이 개인의 만족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기에 가족법과 인구 등록 시스템은 개인들을 국가와 사회 속에서 지속적으로 추적한다. 그 테두리 없이는 정당한 권리 주장이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개인들 역시 자신들의 관계가 사회적으로 인정 받아야 그것을 안정적으로 여길 수 있다. 근대 이후 개인은 발견되고 이전 시대에 비해 자유로워졌지만 그 진정한 자유로움은 국가와 사회의 법적 증빙 하에 존재한다. 

    두 시대 모두 여전히 정상 가족의 신화는 여전하지만 나쓰마 소세키의 근대에 비하면 현대는 ‘정상 가족’의 문제점에 대해서 가시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시대이다. 문학 외에도 영화나 사진과 같은 다양한 시각 매체를 통해 전달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효과성은 더욱 크다. 예술이 의미를 지니는 지점은 바로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 전면에 나오지 못하지만 수면 위로 언젠가는 끌어올려져야 하는 소수에 대한 이야기를 담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술의 역할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사회 역시 정상의 범주 바깥에 있는 이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궤도를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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