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섬을 떠나,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며
2023년 마지막 긴 연휴를 맞았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을 맞이하기 무섭게
많은 직장인들이 수요일 밤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면서 달도 점점 차올랐다.
한편 연휴가 끼어있어 오히려 마음이 조급해진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그게 바로 접니다.
월, 화, 수요일 예고에 없던 휴가를 쓰게 됐다.
그래서 그 전주와 주말 동안 모든 일을 다 끝내놓고 멋지게 휴가를 떠나는 것이 이상적인 목표였지만,
사람 일이 어디 그렇게 착착 풀리기만 하던가.
절대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무슨 첩보 작전이나 암살 작전도 아니고 나는 편집실로 숨어들었고,
문을 꽁꽁 닫고서 잔업을 처리했다.
점심때 급식소에도 물론 가지 않았다.
화장실에 갈 때는 앞뒤 양옆을 살피면서 몰래 다녔고,
내게 커피며 간식을 넣어주는 동료들의 고마운 보살핌이 있었다.
어찌어찌 특집 가편을 작가님께 넘기고,
내 레귤러물 아이템 선정과 출연자 미팅도 연휴 전에 끝내야 했다.
설상가상 미팅이 지연되면서 나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한다고 이동했는데
결국 10여분 차이로 탑승 마감 소식을 들었고,
부분 환불조차 받지 못한 채 다음 비행기를 예매했다.
그래도 걱정인 것은, 도착한 공항에서 집까지 또 시외버스를 한 차례 더 타야 해서,
버스 시간도 미뤄야 하게 생겼는데 추석이라 모든 표가 매진인 것!
그래, 원래 예매했던 버스 시간에 맞춰 뛰어보자.
땅에 발을 딛자마자 줄곧 달리기만 했다.
멈추지 않고 달리니 경전철이 딱 맞게 도착해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세이브.
무사히 먼 길을 달리고 달려 집으로 당도했다는 이야기.
하루는 온종일 잠만 잤다.
겨울잠 자는 곰처럼 침대와 한 몸이 됐다.
맥을 못 추겠는 내가 놀라웠다.
일할 땐 잠이 많지도 않고 5시간씩만 자도 별 무리는 없는 신체 리듬이었는데,
아마 올여름 지나치게 잠을 설치고 적게 잔 탓이었다.
꼬박 하루를 쉬고는 할머니댁으로 향했다.
열차 타는 건 언제나 설레고 즐겁다.
어린 시절 탔던 통일호, 무궁화호가 생각난다.
외삼촌댁에 모두 모였다.
먼저 와있던 사촌조카들, 분명 아기였는데 어느새 말도 잘하고 점잖게 잘 놀고,
휴대폰만 쥐어주면 조용히 게임을 하는 어린이가 돼있었다.
그중 초5가 된 한 명은 내게 물었다.
"이모는 직업이 뭐예요?"
이 아이는 나와 편의점 쇼핑을 다녀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줬는데,
톰 크루즈가 나오는 <탑건 매버릭>을 아빠와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톰 크루즈가 분한 매버릭은 파일럿인데, 그걸 보면서
미국에서 공군이 되면 돈을 많이 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군인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꿈이 한 100가지는 되는 모양이었다.
장래희망을 줄줄 읊는 아이가 귀여웠다.
실컷 말하더니 내 직업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기자 일을 했고 지금은 PD가 됐다고 말해줬다.
"그럼 아이브 만나요? 아이돌 많이 보겠네요?"
"PD는 뭐 하는 거예요? 레디 큐만 하면 되는 거죠?"
이 아이에게 101번째 꿈이 생겼다.
PD가 돼보겠단다.
"넌 앞으로 수십 번도 더 꿈이 바뀔 거야. 신중히 생각하고 정해도 늦지 않아."
별 임팩트 없는 조언을 해주고서는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걷는 길이 어떤 아이에게는 이정표가 될 수도 있겠구나.
나무마다 표시해 놓은 손수건이나 리본이 될 수도 있겠구나.
잘 걸어가야지 싶었다.
높은 빌딩 없는 촌동네는 노을도 아름다웠다.
산 너머 지는 해가 참 고왔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늘 값지다.
친척도 마찬가지로 늘 반갑다.
차례도, 인사도 모두 간소화됐다지만 명절 때라도 만남은 필요한 듯싶다.
연휴가 길어서인지 할머니댁을 다녀와서도 시간 여유,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틈만 나면 눈이 감겨대서, 이번에는 약속도 잡지 않았고
오롯이 집에서 쉬거나 하고 싶은 걸 하고 보낸다.
집에 오고 싶다.
마음이 약해진다.
섬이 싫은 건 절대 아닌데,
집이 너무나 안락하다.
가기 싫으면 어쩌지.
모두 달 보고 소원 비셨나요?
오늘의 곡,
<소원> - 김현성 [이소라의 프로포즈 1997년 12월 06일]
https://www.youtube.com/watch?v=AeZz32jSq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