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시간 내리 잠만 잤다
이제 논문이 한 달 도 안 남았다. 불안한 마음은 '하루도 쉬지 말고 미친 듯이 논문에만 매달려!'라고 외치지만, 이제 나는 나를 안다. 그렇게 해봐야 스트레스만 받고, 논문은 더 안 써지고, 건강만 더 망가진다는 것을.
그래서 지난주 일요일은 마음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로 정했다. (그동안은 주말이 되어도 '쉬어야 되는데...' 생각만 하고 몸은 쉬지만 머리로는 계속 논문이나 밀린 일들을 생각하며 걱정하는 시간이 꽤 되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그러면 뭘 할까?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기 위한 계획이 필요한 이상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다이어리를 끄적였다.
'일단 수영은 원하는 만큼 실컷 하고 싶어. 그리고 또 뭘 하지... 산책? 카페? 아마존 쇼핑? 청소? 게임?'
요즘은 뭐 하나 하려고 하면 선택지가 너무 많다. 쉬는 일조차 그렇다. 다이어리에 뭘 할지 고민하며 물음표만 그리다가 잠이 들었다. 일요일 아침이 되었다. 일단 일어나서 아침 루틴에 따라 움직였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고, 아이폰을 확인한다.
그러다 문득 피로가 쏟아져서 침대에 눕고 싶어졌다. 그래,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날이니까 오랜만에 침대에서 뒹굴어 볼까? 그렇게 누워서 카드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깨고 나니 벌써 두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슬슬 허기가 져서 좋아하는 식빵에 피넛 버터를 발라 사과랑 먹고 나니 또 피로감이 몰려왔다. 또 누웠더니 또 잠이 들었다. 정말 한 17시간은 잔 것 같다.
근래 좀 잠을 설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잠을 자다니 신기할 정도였다. 너무 오래 자면 온몸이 찌뿌둥하고 오히려 개운하지 않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몸도 개운했다. 진짜 오랜만에 몸도 마음도 아무 걱정 안 하고 푹 쉰 날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도 좋아졌다.
나는 기본적으로 잠이 많은 편이긴 해서 과거에도 오래 잔 적이 종종 있긴 한데 최고 기록은 13-14시간이었다. 17시간은 신생아 이후로 - 아니, 나는 신생아 때도 안 자고 울어서 엄마아빠가 고생을 많이 하셨댔다 - 그럼 태어나서 거의 처음인 건가? 혼자 웃음이 났다.
더 웃긴 건 '이렇게 하루 종일 잠만 잤으니 오늘은 저녁에 잠이 안 오겠군' 하고 그날 정상적인 수면은 반쯤 포기했는데 평소처럼 10-11시 사이에 아주 자연스럽게 잠들어서 다음 날도 평소처럼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진짜 2일 동안 잠을 얼마나 많이 잔 건지.
아마 과거의 내가 이 시기에 이렇게 잠을 많이 잤다면 나는 나를 엄청 자책했을 것이다. 잠을 많이 잔다는 것은 항상 내게 '혼이 나는 일', '게으른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참 잘-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안쓰러웠다. 요즘 하루하루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긴장하며 살아온 나 자신을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오늘은 무엇을 해도 괜찮은 날이라고, 내가 나 자신에게 이야기해 준 것만으로도 생각보다 긴장이 많이 풀리는 거구나 - 머리로만 알다가 진짜 온 몸으로 실감한 날이기도 했다. 1년 365일 중에 이렇게 순수하게 아무 걱정도 안하고 보낸 날이 며칠이나 있었을까 싶다.
결국은 나 자신이 결정하는 일이다.
나에게 걱정을 주는 것도 나, 하루의 자유를 주는 것도 나다.
이렇게 하루 정도 푹-자도 아무 일도 없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잠을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잤던가. (과거의 나는 자책은 하면서도 잠은 잘 잤다.)
앞으로도 한 번씩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잠만 자는 날을 정해줘야겠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날, 또 하나의 완벽하지 않은 날.
ps. 며칠 전 갑자기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냉장고를 덜컥 그냥 살 수는 없고, 냉장고 고민하는데 반나절을 보내고, 부랴부랴 에세이를 썼다. 그래도 블랙프라이데이 세일 기간이라 평소보다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어 다행이다. 휴.
커버 이미지 출처: Unsplash의David Cl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