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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복치 Jun 20. 2023

영국에서 보낸 500일

워홀이 나에게 알려준 것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은 예전부터 로망이었다. 언젠가는 꼭 어느 나라든 워홀을 가보리라 생각하다가 결국 서른 살이 되었고, 더 이상 미룰 수 없겠다 싶어 퇴사를 했는데 하필 코로나가 계속됐다. 다행히 만 30살이 되기 얼마 전 영국과 캐나다, 두 나라의 워홀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찐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기 때문에 혹시나 떨어질 것을 대비해서 다 넣어봤는데 둘 다 된 것이다. (참고로 올해부터 캐나다는 만 35세로 나이제한이 완화됐다고 한다. 아... 아깝다.)  


이왕이면 두 나라 다 갈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비자 기간 때문에 영국에 2년 머무르거나, 영국 1년 캐나다 1년 머무르는 것만 가능했다. 일단 영국에 가 보고, 맘에 들면 2년 있고 안 들면 캐나라도 넘어가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작년 2월에 영국에 왔고, 오늘로 영국생활 500일 차가 됐다.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뒤로 하고, 이곳에서 살면서 느꼈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들을 적어본다. 



1. 처음 느낀 것은 깊은 고립감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왔다는 느낌이 너무나 강렬했어서 그 느낌을 절대 잊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다. 하필이면 또 매일같이 비가 오고 해도 빨리 지는 겨울에 와서 외로움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 느낌은 단순히 사람을 만나고 싶다, 누군가 만나서 같이 놀러 가고 밥도 먹고 하고 싶다, 이런 느낌의 외로움, 심심함이라기보다는 고립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위기감에 가까웠다. 사회와의 끈이 뚝 떨어져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한국에서는 못 느끼고 지냈지만, 내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아온 '사회적 자본'이라는 게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느끼게 됐다. 그리고 그것이 생각보다 되게 든든한 느낌을 주는 자본이었다는 것도 말이다.


사회와의 끈이 떨어져 있다는 느낌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내가 이곳에서 두문불출하고 2년 내내 방구석에만 있어도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여기 와서 영어도 한 마디도 안 하고 그냥 그렇게 2년이 지나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진~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무서웠다. 모든 일은 사람을 만나면서부터 이루어지기 마련이라 집을 구하려 해도 일을 얻으려 해도 누군가를 찾아가서 나를 소개하고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한국에서도 물론 나를 소개하고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특별히 먼저 약속을 잡지 않아도 연말모임이다 결혼식이다, 약속은 자연스럽게 생겼고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나는 사회의 일원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무도 내 존재를 알지 못했다. 주변에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속해 있는 곳도 없는 그 느낌이 되게 막막해서 첫 한 달은 평생 써볼 생각 없었던 친구 만드는 앱도 써보고, 종교가 없지만 괜히 교회도 가 보고 그랬다. 누군가한테 말 거는 거 진짜 어색해하는 파워 내향형 인간이던 내가 안 하던 짓 열심히 해 본 것이다. 



2. 이방인들의 도시

한 달간 어학원을 다닌 후 곧 Job을 구하며 이 고립감은 거의 사라졌다. 일단 어딘가에 소속이 됐다는 것. 일을 해야 하기에 더 이상 두문불출할 수 없고 사람들과 매일 소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이 컸다. 


하지만 또 고립감이 줄어든 계기 중 하나는 런던이라는 multi-cultural 한 도시의 특성이었다. 나는 여기서 영국인보다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더 많이 봤다. 친구 찾는 앱을 통해 만났던 3명도 모두 외국인이었고, 특히 나처럼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이곳에 계속 있는 게 아니라 몇 달, 혹은 몇 년 있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아마 남들이 보기에 나도 똑같이 보일 것이다) 가족들과 같이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혼자 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이 도시에 머물렀다가 떠나가는 사람들을 계속 보다 보니 나 혼자 이방인이 아니구나, 비슷한 느낌을 받으며 이곳에 자리 잡고 살아온 사람들이 많겠구나 싶어서 자연스럽게 고립감이 사라졌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스쳐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 살게끔 도시가 나를 품어주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이 나라에서 써먹을만한 경력도 없고 영어도 서툰 내가 그럭저럭 일해서 한두 달 만에 월세 꼬박꼬박 내며 자리 잡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3. 딱 필요한 규모의 삶

런던의 집값은 비싸다. 그리고 난 여기에 평생 눌러앉아 살 계획이 없다. 6명이 셰어 하는 플랏의 작은 방 한 칸이면 충분했다. 방은 더블 침대 하나에 화장대, 책상, 옷장이 있고 바닥에 요가매트 하나 펴고 홈트 정도 할 수 있는 사이즈다. 화장실, 샤워실, 주방은 6명이 공유하고 있고, 주방에서도 나에게 할당된 공간은 냉장실 한 칸, 냉동실 한 칸, 찬장 한 칸 정도의 공간이 전부다. 식기는 공동 공간에 두고 공유하고 있다. 나에게 할당된 공간이 작고, 언젠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쇼핑도 거의 안 하고 지내고 있다. 냉장고도 한 칸만 쓸 수 있으니 식재료도 딱 필요한 만큼만 사게 됐다. 

나의 작고 소중한 방

살림이 간소화되니 내가 지금 갖고 있는 물건이 무엇 무엇이 있나 바로 떠올릴 수 있고, 그것이 마음의 평안을 준다. 베란다 창고에서 내가 모르는, 얼마나 됐는지 모를 물건이 튀어나올 일도 없고 가장 좋은 건 냉장고나 찬장 구석에서 내가 모르던 새에 상해 가는 음식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작년 연말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러 잠깐 한국에 다녀왔는데... 내가 살던 집이지만 물건도 너무 많고 냉장고에 뭐가 너무 많으니까 그 물건들에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사람 사는 집인데 물건에 압도된다고 해야 할까. 나중에 한국 가면 한번 싹 치워야 할 텐데 벌써 막막해지는 느낌이다. 돌아가면 필히 더 작은 집으로 옮기고 살림도 많이 처분을 할 것이다. 


여기서 살면서 나에게 필요한 살림은 어느 정도고, 필요한 최소한의 집의 요건이 어느 정도인지, 내가 어떤 주거환경을 선호하는지 더 잘 알게 됐다. 일단 이렇게 사람들과 화장실이나 공용 공간을 셰어 하는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익숙해지니 오히려 안전한 느낌이 들고 편하다. (플랏메이트를 잘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20대 때는 혼자 사는 걸 좋아했는데 지금은 혼자만의 공간은 보장되되, 집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걸 더 선호하게 됐다. 그래야 화장실에 갇혔을 때도 누군가 도와줄 수 있지. 살림은 내가 단번에 파악할 만큼만 있는 게 좋고, 집의 넓이나 낡기보다 중요한 건 대중교통의 위치와 동네 분위기다. 너무 조용한 동네보다는 언제든 나가면 사람 몇 명씩은 지나다니는 걸 볼 수 있는 동네가 좋다. 옛날엔 한적한 전원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이렇게 이곳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더 뚜렷해지고 있다.



4. 여행이 마냥 좋은 줄 알았지

영국에 있으면 제일 좋은 점이 여행 가기가 편하다는 것이다. 주변 유럽 국가들에 비행기 타고 1~2시간이면 갈 수 있고 심지어 비행기값도 엄청 싸다. 여행 다니는 게 남는 거다 싶을 정도다. 처음에 일을 시작했을 땐, 연속으로 2일만 쉬는 날이 생겨도 어디든 여행을 가려했다. 2일을 쉬면 영국 국내 여행을 갔고, 3일 이상 쉬면 해외여행을 갔다


작년 여름에 갔던 산 마리노. 내가 유럽에 살지 않았다면 어쩌면 절대 가볼 일 없을만한 작은 나라.  

내가 여행을 제법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다녀보니 막상 길게 다니는 걸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여기 와서 알았다. (영국에 오기 전에는, 길게 여행 오려면 큰맘 먹고 1년에 한 번 휴가 열심히 끌어모아야 가능한 거여서... 사실은 그 희소함과 회사에서 해방된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4박이 넘어가면 몸도 붓는 것 같고 생활이 흐트러지는 것 같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막 올라온다. 심지어 당일치기도 혼자 돌아다니면 한계가 있다. 예전에 옥스퍼드에 혼자 다녀온 적이 있는데, 한 5시간 혼자 열심히 돌아다니고 나니 갑자기 텐션이 확 떨어져서 집에 서둘러 가고 싶어졌다. 


한편으로는, 예전엔 유럽이 멀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영국-한국 오가는 장거리 비행기도 이제 몇 번 타봤다고 익숙해하고 말이다. 어디 가만히 못 있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여기 와서 역마살이 많이 해소된 느낌이다. 요즘은 한국에 돌아가서 얼른 정착하고 싶은 느낌도 들고 그렇다. 예전엔 한 시간이면 프랑스, 네덜란드에 갈 수 있는 곳에서 산다는 게 너무 좋았는데 지금은 한 시간이면 가족들을 보러 갈 수 있는 곳에 사는 게 나에게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5. 내년엔 어디서 뭐 하고 있을까

만약 내가 20대 초에 워홀을 왔다면 90% 이상의 확률로 여기서 눌러앉는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 워홀로 와서 눌러앉은 분들을 신기할 정도로 많이 봤다. 지금이야 한국에 돌아갈 가정이 있고 보고 싶은 고양이들도 있기 때문에 나에게 영국은 잠깐 머무는 곳일 뿐이지만, 만약 더 어렸을 때 왔다면 아예 이곳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선택지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됐을 것 같다. 그게 참 신기하다. 


사실 영국이 막 특별히 더 살기 좋고... 그런 나라도 아니다. 물가도 비싸고 지하철에서 인터넷도 안 터지고 겨울은 우중충하고 음식도 맛없고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근데 왜 이곳에서 눌러앉는 삶이 꽤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건지 아직 미스터리다. 이곳에 무슨 매력이 있는 걸까. 


그렇지만 선데이 로스트는 맛있어! 

어쩌면 그냥 이곳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을 워낙 많이 보다 보니 외국인으로 사는 게 하나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라 생각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비자든 뭐든 완전히 안정적으로 갖춰진 상태가 아님에도 이곳에 와서 살아가고, 더 장기적인 비자에 대해서는 여기 와서 생각해 보고 또 방법을 찾고.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모습들에서 뭔가 생명력, 생동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가서 뭔가 정착했다, 싶을 때쯤 난 또 나이제한이 완화된 나라들의 워홀 신청서를 뒤적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 먼 곳으로 가보고 싶은 욕구와 정착하고 싶은 욕구가 늘 부딪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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