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복치 Mar 01. 2021

나를 아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걸까

이제서야 조금씩 나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나는 나에 대해 아주 사소한 것조차 잘 모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몇 시간을 자야 원활한 생활이 가능한지, 집 앞 공원 한 바퀴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상태인지, 우울하고 무기력한데 왜 그런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기분이 좋아지는지, 뭘 먹었을 때 배가 아파지고 뭘 먹으면 속이 편한지, 어떤 스타일이 어울리고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 쉬는 날엔 뭐 하고 싶은지,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했는데 진짜 외국에 가고 싶은 게 맞는지, 내가 정말로 일을 좋아하는 게 맞긴 한 건지.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문득 느끼게 되면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불쾌감에 휩싸였다. 눈앞의 모든 것들이 불투명해 보이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변수가 아주 많은 이 세상에서 그나마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나를 아는 것조차 너무 어렵게 느껴질 때면 '내가 나를 컨트롤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건 중요하다. 아마 이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을 제대로 소화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해 깊게 이해하는 것이 개인의 삶의 질을 좀 더 확실하게 올려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건 가방끈이 긴 척척박사에게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알았다고 생각하면 자꾸 새로운 모습이 튀어나오고, 몰랐던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되면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나에 대해 잘 아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1.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잘 알려고 노력하는 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이다.

내가 누군가에 대해 잘 알아보려고 마지막으로 노력했던 게 언제였을까? 아마 누군가에 대해 덕질을 할 때가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금사빠'인 편이라, 작년 말에 드라마를 보고 주인공 배우에 푹 빠졌을 때 그와 관련된 프로파일부터 시작해, 과거 인터뷰 자료와 영상들을 한참 찾아 나섰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영화는 뭔지, MBTI는 뭔지, 요즘 쉴 땐 뭐 하면서 쉬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뭔지... 처음엔 그렇게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게 정말 재밌었다. 그러나 나의 금사빠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사람에 대한 호감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가는 데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잘 알려고 노력하는 데는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애정이 아니고서야 상대방을 깊이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게 점점 귀찮아질 수 있다. 어느 순간 '이 정도 알았으면 됐지 뭘 더 알아?'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자기 자신을 알려면, 남을 알기 위한 노력과 비슷한 노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찬찬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고, 내 감정이나 느낌에 주의를 집중할 필요도 있다.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뭐든 이렇게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어떤 존재에 대해 알아간다는 건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니,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져도 이상한 게 아니다. 



2.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절실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 

무슨 기술이든 생존에 필요하다고 느끼면 배우게 되는 법이다. 실제 생존에 얼마나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수능을 잘 보는 게 생존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니까, 뭣도 모르는 나이 때부터 고민도 없이 입시 준비를 했듯이.


이 사회에서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나에 대해 잘 모른 채, 진짜로 내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와 상관없이 '외부에서 좋다고 하는 가치'를 충족시켜가면서 살아가기만 해도 먹고 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었다. 나에 대해 잘 아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면 진작에 나를 알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사실 그렇게 느낄만할 상황에 부닥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나에 대해 알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럴 시간에 공부 한 페이지 더 하지 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나는 상당히 개복치 같은 사람이라, 나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 자체로 생존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것도 서른 무렵이 돼서 말이다. 내가 원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한 곳에 고여있으며 타인의 필요 때문에 나에게 요구되는 일을 쳐내는 날들이 반복됐다가는, 빠르게 변하는 이 세상에서 언젠가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태에 대한 불안이 커졌던 것, 정신과 상담에서 자신의 감정을 관찰해보라는 조언을 받았던 것. 이런 계기들이 쌓여가면서 '생존을 위해서는 나에 대해 잘 알아야겠다'라고 생각한 거지, 그전까지는 굳이 나를 알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3. 그냥 나니까, 잘 알 거라고 착각한다. 

나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는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불순물이 있다. 바로 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대화를 자주 나누지 않으면 서로에 대해 잘 모르기 마련이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부모님이나 룸메이트라도 가끔 만나는 친구보다 나를 더 모를 수도 있다. 얼마나 편안하게 마음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열려있느냐가 중요하지,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이라고 '당연히' 서로를 잘 아는 건 아니다는 나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존재니까 나에 대해 알아갈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뿐이지, 당연히 잘 아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편이다. 정말 가까운 가족, 친구에게도 힘들다는 걸 털어놓지 않았다. 심지어 나 자신과도 데면데면한 편이라서, 힘든 상황에 부닥쳐도 나 자신과 대화를 하기보다는 늘 자신을 혼내고 다그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서른 무렵이 될 때까지도 나 자신과 친해지지 못했고,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우울증을 겪고 나서야 나 자신과 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고, 이제서야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가깝기 때문에 다 안다고 착각하고 굳이 자신과의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아마 어느 순간 '내가 나를 이렇게 몰랐구나' 하며 화들짝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4. '나'라는 존재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착각한다. 

어릴 적 나를 예뻐해 주시던 먼 친척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분이 내가 어린 시절에 좋아했지만, 지금은 흥미가 없는 장난감을 들이밀면서 '너 이거 좋아하잖아'라고 한다면 황당할 것이다. '그런 건 어릴 때 좋아했던 거지, 지금은 관심도 없는데 무슨 얘기람.'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데 의외로 자기 자신에 대해 이 '먼 친척'처럼 생각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특히 정체성에 대해 집착하며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나의 캐릭터를 고집하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데, 과거의 내 모습 중, 내가 나라고 믿고 싶은 모습들을 조합한 것 = 나라고 덥석 믿어버리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여행하는 걸 좋아했다. 여행 자체도 즐거웠지만, 그렇게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에 열려 있는 내 모습이 꽤 맘에 들었다. 그때의 내 모습이 내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며('나는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3년 전 여행을 갈 때 6인실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는데, 이게 웬걸. 


공동 샤워장을 쓰는 것도 거슬렸고, 잘 때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거슬려서 게스트하우스에 묵은 걸 후회했다. 게스트하우스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건데 그게 묘하게 싫었다. 사실 3년 전의 내게 필요한 건 게스트하우스보다는 혼자 조용히 쉴 수 있는 숙소였다. 내 취향이 변했는데, 과거의 내 모습 중 내 맘에 들었던 내 모습을 지금의 내 모습이라 착각해서 후회했던 사례다.


이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과거엔 A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Z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좌파였던 사람이 극우로 변할 수도 있고, 몇 년 전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했던 사람에게 갑자기 감정이입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어?' 하며 돌변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조건 '변절자'라고 생각하며 일관성에 대해 집착하곤 했는데,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이 세상에서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입맛도 변하고 여행 스타일도 변하고 라이프스타일도 변하고 사고방식도 변하는 법인데, '어느 한 시점의 내 모습'에 꽂혀서 그 시점의 내 모습이 곧 나라고 믿어버리고 '이미 나는 나를 다 알았어!' 하고 나를 더 알아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를 포착하는 센서가 퇴화할 수 있다. 나를 알아가는 것, 그것은 곧 '빠르게 변화하는 존재를 알아가는 일'이기에 정말 어렵다.  



서른이 넘어서야 나에 대해 조금 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어린아이를 키운다면 아이가 언제 변을 봤는지, 언제 어떤 이유로 울었는지, 어떻게 하면 푹 자는지, 요즘 아이가 어떤 말을 새롭게 배웠는지. 이런 정말 사소한 것까지 세심하게 관찰하고 신경 쓰며 키울 텐데, 나에 대해서는 전혀 관찰하지 않고 방치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나를 돌보듯 나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돌봐주고, 내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줄 사람이 평생 한 사람쯤은 필요할 것이고, 그게 바로 나 자신이 돼야 할 것 같다. 나와 평생을 가장 확실히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니까. 


요즘 나는 자신과의 대화 시간을 매일 갖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는 정반대였다. 사람들에 둘러싸인 시간으로 평일과 주말을 꽉꽉 채워왔고, 나 자신과 대화할 시간은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아니, 애초에 대화할 생각조차 없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여러 이유로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나에 대해 일부만 알면서도 다 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다 한 번 탈이 나고 나서야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하고 있다.


어색해도 나 자신과 한번 대화를 해 보자.


누구든 처음 대화를 하면 어색한 정적이 흐르듯이, 오랜만에 펜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할 때는 정말 어색하고 쓸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가끔 한 번씩 입 터지는 주제가 나오면 한참을 펜으로 노트에 주절거리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할 말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 적고 노트를 덮기도 한다. 


정말, 이렇게 한다 한들 내가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잘 알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렇게 조금이라도 나 자신과 대화하고 나면 막연한 불안감이 조금은 걷히는 느낌이 든다는 것. 조금씩 나를 알아가는 게 재밌고 30대, 40대, 50대, 60대의 나는 또 어떻게 변해갈지도 너무나 궁금해서 늘 애정어린 눈으로 관찰해보려 한다.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아마 평생의 숙제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센서가 고장난 인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