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비상등이 울려야 할 때 울리지 않는다면?
유독 일이 안 풀리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의 나는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는 능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시장을 보는 눈, 제품을 보는 눈, 팀의 상황을 보는 눈… 눈에 이상한 필터를 씌운 듯, 어떤 상황은 별것 아님에도 내 눈에는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보였고, 도리어 민감하게 느껴야 하는 상황에는 무뎌져 있기도 했다.
사실 진짜 문제는 내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안 풀리는 시기를 보내면서, 나의 상태를 알아차리는데 유난히 둔감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분명 지칠 때가 됐는데 못 알아채다가 갑자기 터져버리기 일쑤였다. 힘들만 한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는 걸 평소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힘들다고 느끼고는 '나 왜 피곤하지? 왜 힘들지? 그럴 일이 없는데?' 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 내 상태도 못 보고 있으니, 외부 세계를 정확히 보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이 당연했다. 너끈히 할 수 있는 일도 못 할 것 같이 벅차게 느껴지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일도 의지로 나를 갈아 넣으면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정도 일을 해야 내 의지와 마나가 바닥나는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세탁기에는 센서가 있어서 무게를 감지하고 자동으로 물의 양을 조절해주고, 난방기기는 일정 온도 이상 올라가면 꺼진다. 로봇청소기는 센서가 있어서 주변 환경을 정확히 파악하고 움직이고, 스프링클러는 연기가 느껴지면 작동한다. 센서는 대개 안전의 문제와 직결돼 있어서, 평소 사용하는 가전제품이든 스크린도어나 엘리베이터 같은 큰 제품이든 전자제품이라면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다.
나는 기계로 비유하면 센서가 약한 인간이었다. 에너지보다 감당해야 할 일의 무게가 무거울 땐 꾸역꾸역 마른걸레를 쥐어짜듯 일을 했고, 온도가 계속 올라가도 그것을 잘 못 느끼니 꺼질 줄 모르고 에너지를 불태웠다.노트북도 핸드폰도 과열되면 갑자기 픽 나가버리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할 때도 그렇고, 심지어 과식하면서도 과식하는 걸 못 느끼고 있다가 몇 시간 후에 소화제를 찾곤 할만큼 둔감했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것들도 감지를 못하니, 좀 더 고차원적인 것을 느끼는 건 더욱더 어려웠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길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는 나날이 이어져 왔다. 그렇게 뭔가 이상한 센서로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다가 망가질 때가 돼서야 ‘으악!’ 하고는 한 발 늦게 비상벨을 울렸다. 비상벨은 미리 울려야지, 망가지고 나서 울리면 뭘 하나.
나를 평소 세심하게 관찰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면 나는 센서에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짝꿍은 내 에너지 레벨이 높은지 낮은지, 에너지의 방향이 상승세인지 하락세인지 항상 민감하게 관찰하며 나에게 틈틈이 위험 신호를 보내왔다. 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양의 일을 힘을 잔뜩 줘서 하고 있다거나, 에너지의 방향이 하락세로 갈 수밖에 없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면 따끔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너에게 좋을 게 뭔데?’라고 지적해주기도 했다.
다만 내가 진짜 상태가 안 좋았을 때는, 그의 지적 자체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상황 파악 못 하고 의지치만 불태웠던 때라, 조심하라는 지적조차도 나의 의지를 방해하는 존재로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괜찮다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하는 답답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내가 괜찮다고 하던 그 때 나는 이미 삐그덕대며 고장나고 있었는데 말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따끔하게 지적할 정도면 객관적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거였을텐데... 마음을 담아 한 지적을 귀담아듣지 않고 날선 반응을 보였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안하다. ‘난 괜찮은데?' 하고 주변에서 주는 위험 시그널을 무시하다보니 센서 수리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을뿐더러, 스스로 센서를 더욱더 망가뜨리고 있었다.
실내가 건조할 때 그것을 쉽게 몸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앞에 습도계를 들이 밀어줘야 ‘아 지금 건조하구나’ 알아채는 사람이 있다. 몸이 안 좋아지고 있는데 그걸 느끼지 못하고 건강검진에서 위험하다는 통보를 받아야만 알아채는, 센서가 약한 사람. 스스로 감지 능력을 민감하게 갈고닦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어렵고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면 이렇게 정량적인 지표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한동안 나는 수면 시간, 근무 시간, 운동 시간을 스프레드시트로 정리해보며 나름의 에너지 점수를 매겨보며 관리를 했던 적이 있다. 실제로 내 몸은 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도, 매일의 에너지가 마이너스가 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하루 이틀 에너지가 마이너스가 되도록 일해도 몸이 크게 축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루 이틀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 살아도 갑자기 우울증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몸과 마음이 축나고 있다는 걸 스스로는 잘 못 느끼니까. 이 정도 일하면, 이런 마음 상태가 계속된다면 객관적으로도 몸과 마음에 무리가 가는 게 맞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보호해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둔한 나에게 수시로 눈앞에 숫자를 들이밀며 '너, 이 정도 했으면 피곤할 때 됐어'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내 센서를 민감하게 만드는 것의 시작은 내 센서가 약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약한 감지 능력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들을 하나씩 내 주변에 만들어나가는 것. 나처럼 둔한 사람에게 감지 능력을 개선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과제지만, 내가 아프고 힘든 걸 남이 대신 알아줄 수 없고 내 상태를 가장 잘 알아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 생존하기 위해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