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일탈 메이트
한창 불안하고 우울하던 시기에, 타인의 글을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퇴사, 우울증, 번아웃, 진로고민, 워홀 막차와 같은 키워드의 글을 수없이 찾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하세요’라는 조언이나 실용적인 정보가 없어도, 나와 비슷한 감정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누군가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선택을 하는 누군가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 외로움이 씻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묘한 전우애마저 느꼈다. 자기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됐다. 그 모든 글쓴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다.
계획 없이 퇴사를 했다. 퇴사 후 자체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퇴사 당시 내가 갖고 있던 최소한의 계획은 결혼, 그리고 워홀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워홀을 가려 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내가 가고 싶던 나라의 국경이 막혀버려서 못 가게 됐다. 하지만, 이번이 진짜 워홀 막차라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년 생일까지 비자를 받으면 갈 수 있는데, 그때까진 상황이 좋아지지 않을까 한 가닥 희망을 붙잡고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지금은 딱히 일을 하고 싶은 마음상태가 아니라서, 운동을 통해 체력을 키우고, 살면서 한 번쯤은 잘 해보고 싶던 영어공부에 전념해보고, 또 한 번쯤 잘 해보고 싶었던 글쓰기도 꾸준히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끔 이런 나를 보면, 다들 바삐 움직이는 세상에 혼자만 멈춰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충분히 일을 사랑할 만한 에너지가 채워지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까지 쉬겠다! 어정쩡한 마음으로 일할 거면 안 하는 게 낫다!’ 하는 다소 호기로운 마음가짐으로 기약 없이 쉬고 있다. 이런 내가 다음엔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이런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참 대책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에도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통장 잔고를 보며 계산기를 두드려보며 ‘음... 맥시멈 이만큼은 쉬어도 되겠어’ 하고 계산해보기도 했고, 회사에 속하지 않고 제3의 길을 찾아가는 레퍼런스를 나름 열심히 찾아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대책 없음과 대책 있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잠깐 멈추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들거나 불안할 때,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싶을 때, 내가 너무 현실감각이 없고 이상적인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 나의 글을 읽고 이런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원래 일탈은 혼자 하면 재미가 덜하고, 일탈할 용기는 함께 할 누군가가 있어야 더 생겨난다. 몰래 야자를 째는 것도 그 경험에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재밌지, 혼자서는 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가도 금세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걸리면 혼자 혼나니까, 더 겁이 나기도 하고 말이다. 나의 글이 남들 다 가는 길에서 잠깐 멈추거나 옆길로 새는 일탈을 할 때, 같이 있어서 용기를 줄 수 있는 친구같은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
일탈이라는 워딩을 썼지만, 솔직히 이렇게 잠깐 멈춰서는 건 일탈이라고 보기에도 아주 귀여운 수준인 것 같다. 이게 무슨 일탈이야. 일탈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해. 변주곡이나 꾸밈음 정도나 될까?
인간의 수 만큼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는 법인데, 우리나라에선 유난히 정형화된 삶의 방식에 사람을 끼워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정형화된 방식에서 벗어나면 왠지 벌을 받을것만 같다. 그래서 작은 멈춤도 일탈처럼 느껴지고, 큰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불안은 나눠 가지면 줄어든다고 믿는다.
내가 뭔가 솔루션을 제공하거나 실용적인 정보를 주긴 어렵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또 있구나. 나만 멈춰있는 건 아니구나’ 하면서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안도감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내 글이 더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잘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렇게 살아도 진짜로 괜찮은 삶을 만들어야겠다는 책임감이 퐁퐁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