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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르다 Jul 16. 2024

영화배우 문숙 인터뷰 후에

문숙은 이만희 감독의 페르소나다.


저번 <영화 검열> 아이템 취재 과정에서 이만희 감독과 감독의 영화에 대해 문숙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문숙은 삼십 년이 된 기억을 현재의 것인양 생생하게 풀어냈다.


이만희 감독과 배우 문숙의 첫 만남에서 감독은 지각을 해서 그녀를 기다리게 했다. 그때 문숙도 자기 나름대로 잘 나가는 배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왜 기다리게 할까'라는 마음뿐이었는데, 감독이 들어서자마자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 마음이 풀어졌다고 한다. 예의가 바르고, 따뜻한 인상이었다고. 그렇게 그 둘의 만남은 시작됐다.


문숙의 이야기를 듣는데 배우 문숙과 감독 이만희가 머릿속에 필름처럼 재생됐다. 삼십 년 전 이야기를 이렇게 생생하게 풀어낼 수 있다니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하는 기억의 힘은 이토록 강력하다.


전쟁과 이념 속에 서로를 증오하며 살 수밖에 없던 그 시절, 이만희 감독은 영화를 통해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그렸다.


어느 날은 감독이 문숙에게 갑자기 어디를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도착해 보니 청계천 주변 지하 움막이었다. 그곳엔 어렵게 사는 문숙 또래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문숙은 거기서 일하는 여자들과 함께 언니 동생 하며 술을 마시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이를 통해 그녀는 삼포 가는 길에서 술집 작부 '백화'란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다.


대본 주고 무작정 '레디 고'를 외치는 감독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이야깃거리를 건져 내, 배우가 연기로 말할 수 있게 하는 연출 능력은 이만희 감독이 천재라고 불리우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이 에피소드 말고도 문숙은 거침없이 감독과의 기억을 쏟아냈다. 그 시절 느꼈던 행복, 슬픔, 그리움이 그녀의 말짓, 몸짓에 얼마나 묻어나던지 아직도 그녀 곁에 이만희 감독이 살아 존재하는 것 같았다.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생이별을 겪은 그녀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한 남자와 저리도 강렬하게 사랑했다는 사실에 그녀가 잠깐 부럽기도 했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그녀가 클레멘타인 곡에 개사를 한 노래를 불러 주었다. 살아 생전 감독이 문숙의 무릎에 기대 들었다는 노래. 반주 없이 나지막이 부르다 결국 눈망울엔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숙였다.


인터뷰 시작 전부터 그녀는 시종일관 밝은 표정이었다. 소녀 감성을 유지하고 있는 배우 문숙. 그래서인지 보는 이로 하여금 나이를 잊게 만들었다. 한없이 맑은 영혼을 가진 그녀.


이십 대에 하루아침에 그녀 곁을 떠나 버린 이만희 감독. 사랑하는 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좌절과 슬픔이 엄청났을 텐데... 수십 년이 흘러도 줄 생각을 하지 않는 애절한 그리움이 그녀의 눈물에 담겨 있었다.


<태양 닮은 소녀, 1974  감독: 이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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