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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 Oct 27. 2021

21세기의 해적들

2021년 10월,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파나마 선적의 화물선 루시아 호MSC Lucia는 대서양 연안 기니만Gulf of Guinea을 지나다가 해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고속정을 탄 해적들이 배에 접근하더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엔진실에 숨어들어 구조요청을 발신했다. 주변에서 순찰을 하고 있던 러시아 해군 함정들이 쫓아가 배를 구해냈다. 해적들은 쫓겨 도망갔지만, 이 사건은 이 일대에서 벌어지는 숱한 해적 사건들의 하나일 뿐이다.


Pirate boat flees the MSC Lucia (Russian Ministry of Defense)


기니 만의 무법자들


2020년 6월 서부 아프리카 베냉 앞바다에서 가나에 선적을 둔 어선 파노피 프론티어Panofi Frontier 호가 괴한들의 공격을 받아 한국 선원 5명을 포함해 6명이 납치됐다. 괴한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기승을 부리는 해적의 짓으로 추정됐다. 선원들은 다행히 한 달 만에 풀려났지만 비슷한 사건이 그 해 내내 이어졌다. 


한때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동아프리카 아덴만 일대의 소말리아 해적 사건은 한국을 포함한 국제 공동작전으로 많이 줄었으나 대륙 건너편 서아프리카의 기니만에서 몇년 새 해적이 판을 친다. 남쪽 앙골라에서 북쪽 세네갈까지 6000km에 걸친 해안선을 따라 20개국이 위치하고 있는데 해적 공격이 잦은 곳은 그중 가나,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 카메룬 일대다. 국제해사기구International Maritime Bureau(IMB)에 따르면 2020년 기니만에서는 해적 공격 75건이 발생했다. 세계 전체에서 보고된 공격 195건의 절반에 가까운 범죄가 서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것이다. 


ICC-CCS, ‘Piracy and Armed Robbery Against Ships’ 


동아프리카에서 해적들이 판치던 곳은 지중해-홍해-아덴만-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세계 물류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래서 해적들이 기승을 부린 것이기도 하고, 그만큼 세계의 관심도 높아 국제사회가 적극 대응에 나섰다. 반면 기니만 일대는 나이지리아의 니제르델타Niger Delta 유전지대를 빼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어선과 원자재를 실어나르는 배들이 적지 않지만 서아프리카는 연안국들의 군사력이 약하고 세계의 관심이 적으니 해적들이 늘어난 것이다. ‘땅 위의 빈곤이 바다의 위험으로’ 이어진 셈이다. 소말리아 앞바다의 위험이 널리 알려지면서 선박들이 항로를 서아프리카 쪽으로 바꾼 것도 한 원인이었다.


The Economist Intelligence Unit


2011년 나이지리아와 베냉이 ‘번영 작전 Operation Prosperity’이라는 이름으로 공동 소탕작전을 벌인 적이 있다. 공동대응이라기보다는 나이지리아군이 작전을 할 수 있도록 베냉이 영해를 열어주고 정보를 공유한 정도였다. 일시적으로 해적들이 줄어드는 성과가 있었지만 반년 만에 작전은 종료됐다. 2013년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Yaoundé에서 관련국들이 ‘야운데 선언Yaoundé Declaration on the Gulf of Guinea Security’이라는 이름으로 모니터링과 소탕작전 등 공동대응 계획을 발표했으나 강제력이 없었고 제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유럽연합(EU)이 2014년 야운데 선언의 실행을 돕겠다고 했고 국제해사기구도 2017년 서아프리카 해상보안 강화전략을 내놨지만 ‘행동’이 없었다.


토고의 포르 냐싱베Faure Essozimna Gnassingbé 대통령이 2019년 7월 런던에서 기니만 해적 대책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했으나 이것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듬해 인도가 자국 선원들이 기니만 일대 선박에서 일하지 못하게 금지한 것처럼 피해를 입은 나라들이 개별대응을 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서아프리카 해적들의 공격이 인명피해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해적들은 주로 선박의 화물을 훔쳐 밀거래하는 게 목적이다. 반면 서아프리카 해적들은 과거부터 중무장을 하고 오일탱커 습격에 치중해왔다. 나이지리아의 유조선을 노리는 해적들을 가리키는 ‘페트로 해적petro-piracy’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14년 이후 저유가로 수익성이 떨어지자 이 지역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을 본뜬 인질 납치와 몸값 뜯어내기가 늘고 있다. 민간기구인 원어스퓨처One Earth Future Foundation(OEF)에 따르면 2018년 기니만 일대에서 해적에 납치된 사람이 200명에 육박했다. 피해자들 절반이 필리핀, 인도, 우크라이나, 나이지리아 국적 선원이었다. 선박 소유국, 선원들의 국적, 피해 발생국이 모두 다른 것도 집중 대응을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다.


‘해양법에 관한 유엔 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UNCLOS)’에 따라 엄밀히 말하자면 한 국가의 영해에서 선박을 습격하는 것은 해적이 아닌 무장강도 사건이다. 해안선 12해리 밖 공해상에서 어느 나라의 사법제도에도 구속되지 않은 채 선박을 공격하는 것이 해적 행위에 해당된다. 하지만 통칭 바다 위의 선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모두 해적 피해로 분류한다. 아시아에서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 말라카 해협Malacca Strait,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카리브해와 베네수엘라 앞바다가 해적 공격들로 악명 높다. 모두 물류의 길목이거나 석유수출항이 가까운 곳들이다.


총독이 된 해적


에게 해에 있는 레스보스Lésbos 섬은 지금은 그리스 땅이지만 1462년부터 1912년까지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 섬 출신의 유명한 인물 중에 바르바로사Barbarossa, ‘붉은 수염’으로 알려진 인물이 있다. 오스만투르크의 고위직을 지낸 하이레딘 파샤 Barbaros Hayreddin Paşa라는 사람이다. 주로 키드르Khiḍr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에게는 ‘바다의 왕’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Barbaros Hayreddin Paşa, WIKIPEDIA


아루지 혹은 오루치Arūj, Oruç라고 알려진 동생과 함께 ‘바르바로사 형제’로 통칭되는 하이레딘은 15세기 말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던 시기에 지중해에서 해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바르바로사 형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국의 군대들이 북아프리카까지 넘보자 그에 맞선 선박 공격을 감행했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북아프리카 일대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베리아의 왕국들에게는 악명 높은 해적이었지만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에게는 지중해의 영웅들이었던 셈이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형제는 이스탄불의 지배세력과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했다고 한다. 


헨리 모건Henry Morgan(1635-1688년)은 영국 출신의 해적이다. 중미 카리브해에서 활개를 치면서 부하들과 함께 쿠바의 푸에르토 프린시페Puerto Príncipe를 약탈했고, 파나마의 포르토벨로Porto Bello를 점령하기 위해 현지 주민들을 ‘인간 방패’로 써서 악명을 떨쳤다. 1672년 체포됐지만 식민지 쟁탈전에 여념이 없던 영국은 오히려 그를 자메이카의 총독으로 앉혔다. 


18세기 말 중국에 기근이 들이닥쳤다. 해안지대의 숱한 주민들이 굶주림에 내몰렸고, 일부는 바다로 나가 해적이 됐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외국에는 칭이Ching Yih로 알려졌던 쩡이(鄭一)라는 사람이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적 선단’을 꾸린 것으로 기록된 쩡이는 19세기 초반 무려 500~700척의 해적선을 거느리고 광둥해 일대를 누볐다. 그가 죽은 뒤 거대한 해적사업은 아내 쩡이사오(鄭一嫂)가 물려받았다. 부부의 해적선들은 명 제국의 해군을 무력화하면서 유럽 상선들을 위협했고 유럽인 인질을 잡아 몸값을 받아내기도 했다. 칭시Ching Shih라는 광둥식 이름으로 더 유명한 쩡이사오는 이례적인 여성 해적선장이자 ‘경영자’였으며 그 휘하의 부하들이 무려 7만~8만 명에 이르렀다. 거느린 선박이 2000척이 넘었다.


An undated image of Ching Shih

 

서방의 공략을 받던 시기의 명나라 해안은 해적들이 득시글했다. 무능한 정부와 가난이 그들을 바다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만Persian Gulf의 남부 해역에서는 18세기 후반에 알카시미Al Qasimi라고 부르는 지방 권력자가 장악하고 해적질을 벌여, 영국이 ‘해적 해안Pirate Coast’이라 불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해적은 근대적인 국제법과 해군 체계가 생겨나기 전까지 세계의 거의 모든 바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인류의 항해의 역사만큼이나 해적의 역사도 길다.


해적의 황금시대


특히 1650년대부터 1730년대까지는 대양을 오가는 제국 선박들과 상선들의 왕래가 늘면서 해적들이 판을 쳐 ‘해적의 황금시대 The Golden Age of Piracy’라고까지 불린다. 카리브해, 영국 앞바다, 인도양, 북미와 서아프리카 해안 등등 곳곳에 해적이 넘쳐났다. 당시 아프리카와 가까운 인도양의 섬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는 한때 1000명 넘는 해적들이 기식했을 정도로 17~18세기에 해적들의 소굴로 유명했다.


해적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영화로 유명해진 카리브해일 것이다. 카리브해는 21세기에도 해적들이 출몰하는 지역으로 남아 있다.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혼란이 심해지면서 2010년대 이후 해적은 더욱 늘었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팰콘 호수 Falcon Lake는 1954년 만들어진 인공 저수지다. 길이가 100km에 이르는 이곳은 마약 갱들의 이동경로이자 인신매매 루트로 유명하다. 바다는 아니지만 이 거대한 저수지에서 멕시코의 마약카르텔 로스세타스Los Zetas 등이 2010년대에 라이벌 갱 조직들의 선박들을 공격하고 인질을 납치하는 해적질을 했다. 세계적으로 드문 ‘호수의 해적’인 셈이다. 


아시아에도 유명한 해적들의 길목이 있다. 앞서 언급한 말라카 해협이다. 말레이 반도 남부와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 사이에 있는 말라카 해협은 수에즈 운하, 파나마 운하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항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웃한 필리핀의 술루 해Sulu Sea와 셀레베스 해Celebes Sea 역시 식민시대 이래로 해적 행위가 빈발하는 곳이다.


The Lancet


그러나 최근 20여년 새 해적들의 공격으로 가장 악명을 떨친 곳은 소말리아 근해다. 소말리아의 해적들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언급되는 지명이 있다.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이라는 명칭이다. 아프리카 동부, 아라비아 반도 남단과 마주보고 있는 뿔처럼 튀어나온 지역을 가리킨다. 좀 더 동쪽으로 시야를 넓히면 인도양을 사이에 두고 인도 아대륙과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 일대에 위치한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지부티, 소말리아를 통상 아프리카의 뿔이라 한다. 소말리아가 해적들의 무대가 된 배경을 알려면 이 지역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의 뿔은 왜 악명 높은 지역이 됐나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나라는 에티오피아일 것이다. 솔로몬 왕과 결혼했다는 전설의 시바 여왕이 다스린 나라, 악숨Axum의 거대 유적을 간직한 고대 문명의 나라. ‘다윗에게서 시작돼 솔로몬 시절에 전성기를 구가한 유대 제국’이라는 것은 현대의 시오니즘과 유대국가 이스라엘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른바 ‘성서고고학’의 거짓된 가정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많지만, 현대의 에티오피아 역사가들도 ‘솔로몬 왕조’를 늘 들먹인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솔로몬 왕조가 세워진 것은 1270년 예쿠노 아믈락Yekunno Amlak이라는 지도자 때였다고 한다.  


현대의 에티오피아가 틀을 갖춘 것은 1931년 헌법이 탄생하면서부터이지만 왕조가 무너진 것은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 2세Haile Selassie II 황제를 마지막으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였으니, 꽤나 긴 시간 동안 ‘솔로몬 왕가’가 유지된 셈이다. 


에티오피아가 유럽 세력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 것은 1880년 전후의 일이다. 영국과 이탈리아가 각축을 벌이며 아프리카의 뿔 일대를 공략한 것이다. 1870년 에티오피아의 지방 군주가 홍해에 면한 아사브Assab 항구를 이탈리아 회사에 팔아버린 일이 있었다. 그것이 현재의 에리트레아에 1890년 이탈리아 식민지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그 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침략에 맞선 싸움을 이어갔다. 메넬릭 2세Menelik II 시절인 1896년에는 ‘역사적인’ 아드와 전투Battle of Adwa가 벌어졌다. 에티오피아는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를 물리쳐 유럽국들을 놀라게 했다. 여기서 졌다면 아마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됐을 것이다. 뒤를 이은 하일레 셀라시에 1세Haile Selassie I는 20세기 초반 에티오피아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제국주의 열강이 이런 에티오피아를 반겼을 리 없다. 


이탈리아는 1890년 에티오피아의 동쪽에 있는 오늘날의 에리트레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1936년에는 에티오피아와 소말릴란드를 묶어 ‘동아프리카 이탈리아 Africa Orientale Italiana’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했다. 현재의 소말리아가 있는 곳은 소말리족이 사는 땅이라 해서 소말릴란드로 불렸는데, 2차 대전 무렵부터는 영국령 소말릴란드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로 나뉘게 됐다.


이탈리아는 이미 1890년대에 에리트레아와 소말릴란드를 점령했지만, 앞서 얘기한 대로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다가 다시 에티오피아 공격에 나선 것은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집권 뒤였다. 


무솔리니는 1928년 에티오피아와 20년 기한의 우호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군대는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며 이듬해 봄 이탈리아군은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를 점령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만드는 완전한 점령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유럽 전선이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으로 방향을 정한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5년 간 계속된 전쟁에서 이탈리아는 결국 패배했다.


무솔리니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에티오피아는 주권을 완전히 되찾았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뿔 지역은 그 후에도 그리 아름다운 시절을 맞지는 못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하일레 셀라시에 2세가 쫓겨난 뒤 데르그Derg라 불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서 공포정치를 펼쳤다. 공산주의 독재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의 통치 기간 에티오피아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1987년 멩기스투 정권이 무너진 뒤 민주화가 시작됐고, 1994년 새 헌법이 도입됐으며 이듬해에는 첫 다당제 민주선거가 실시됐다. 


Masked Somali pirate Hassan stands near a Taiwanese fishing vessel on September 23, 2012. | AP


에리트레아는 1941년 영국군이 이탈리아 군을 몰아낸 뒤 유엔 관할령이 돼 사실상 영국군의 통치를 받았다. 그리고 1950년 유엔 결의안에 따라 에티오피아로 합쳐졌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에티오피아에 맞선 독립투쟁을 시작, 30년 넘게 내전을 벌였다. 유엔 관리 하에 마침내 1991년 주민투표를 실시하고 독립했으며, 1993년 국제적인 승인을 받아 명실상부 독립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소말리아는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혼란이 가중됐다. 북부 지역이 내전 끝에 ‘소말릴란드’라는 이름으로 분리 독립을 선언했지만 아직 국제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한 상태다. 계속된 내전에 더해 이슬람 극단주의가 발흥하면서 소말리아는 ‘실패한 국가’의 대명사가 됐다. 그로 인해 나타난 양상 중의 하나가 아덴 만의 해적들이다. 이탈리아가 몰래 핵폐기물을 소말리아 앞바다에 버리면서 해수 온도가 올라가 어획량이 줄어들었고, 살 길이 막힌 어민들이 해적에 가세한다는 얘기도 있다. 역사의 흔적, 제국주의의 유령이 21세기의 해적들에게도 드리워져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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