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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Sep 23. 2017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바람이 분다> / 미야자키 하야오

바람이 분다. 소년 곁으로 분다. 어디서 불고 어디로 나가는 바람인지는 모른다. 소년은 알고 싶지 않다. 그저 불어오는 바람을 기분 좋게 맞이할 뿐이었다. 이 바람이 이 바람이고 저 바람이 저 바람이라 한 들, 무슨 소용 있으랴. 그저 바람이 부는 것만으로 바람이 부는 하늘이 있다는 것만으로 꿈을 꿀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으로 불린, 아니 불렸었던 작품 <바람이 분다>는 전투기 ‘제로센(가미카제에 사용된 일본 국군 전투기)’의 탄생비화와 이를 만든 엔지니어 ‘호리코시 지로’의 삶을 다룬 영화다. 바람, 하늘, 꿈 이런 것들을 한데 모아 하야오 특유의 색채를 더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는 하야오 작품 중에서 특이점으로 기억된다. 아마 그 이유는 이 작품이 건드린 소재의 민감성 때문일 것이다. 제로센의 탄생은 이유야 어찌 됐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는 비극의 목전 앞에서 끝나지만 그럼에도 비난받을 여지는 충분했다. 주인공의 꿈을 강조한 나머지 대의를 미화시키고 말았다. 심하게는 미화를 넘어 숭고하게 표현한 부분마저 있었다. 노골적인 선전처럼 보이기도 했다.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영화였다. 그런데 <바람이 분다> 꼭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바람이 분다>를 보고 딱 두 가지를 떠올렸다. 하나는 지금의 하야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향후의 하야오, 즉 포스트 하야오에 대한 것이었다. 하야오에 대해 생각해보자. 미야자키 하야오, 1941년생 일흔을 훌쩍 넘은 나이다. 지금에 와서야 백발에 흰수염이 인상적이고 썩 어울리는 노인이지만 그 역시 흑발에 혈기 왕성한 시절이 있었다. 그의 전성기 구가 시절로부터 벌써 몇 년일까.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났다. 보통의 감독이라면 업계에 발을 떼었을 법한 나이다. 그런데도 하야오는 은퇴를 몇 번이나 번복하고 일일이 욕먹는 걸 감수하면서 현역을 지키고 있다.


그가 아직까지 현역을 지키는 이유를 미련 때문이라 생각한다. 업계와 일에 대해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라고 본다. 성공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고서 흔히 보이는 패턴이다. 물론 좀처럼 타협할 줄 모르는 외골수적인 그의 성격 탓도 있을 테다. 그러나 꼭 이런 개인적인 흠만이 그가 현역을 지키는 이유는 아닌 듯 보인다. 그 이유를 애니메이션 업계의 동향이 잘 말해준다.


최근이라 말하기도 무색하지만 통상 애니메이션은 상품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작품의 내실을 논하기 전에 우선 돈이 되는지 먼저 논한다. 전자는 후자에 비교하면 꽤나 가치가 떨어진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작품이 좋으면 수익 역시 저절로 따라올거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전부 다 깨져버렸다. 작품성이 좋더라도 수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제작은 꿈도 꿀 수 없다. 콘텐츠는 소비되어야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일단 뭐라도 만들어야 한다. 타협만이 살길인 셈이다. 꿈을 갖고 업계에 발을 들인 애니메이터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라고 팔릴 작품만 만들고 싶으랴. 그러나 시대가 시대고 인식이 인식인지라 대다수는 현실에 순응한다.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그렇게 타협은 관성으로 굳어갔고 순응은 중력처럼 당연한게 되고 말았다. 


업계에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멈추지 않는 소용돌이였다. 일생을 애니메이션에 투자한 하야오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하야오는 ‘오타쿠 정신’을 상실한 오타쿠를 비난했다. 그는 오타쿠들이 이 같은 변화의 상당수를 야기했다고 믿었다. 상품에 휘둘리기 바쁜 그들을 겨냥해 맹렬히 비난했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야오 역시 이들을 통해 맹렬히 소비된다. 그들이 지지하는 팬덤 같은 환호가 있기에 업계의 확장이 도모됐고 지브리 역시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하야오는 일절 그런 이해관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직감한 것이다. 이 같은 맹목적인 지지는 언젠가 껍질만 부풀리는 꼴이 될 거란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웬걸? 매마른 불모지에도 싹은 자라났다. 실력파 감독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안노 히데아키, 호소다 마모루, 신카이 마코토다. 세간은 이들의 등장을 기념하며 거장 하야오의 뒤를 이을 포스트 하야오 후보군으로 묶었다. <에반게리온>으로 일찍이 성공가도에 오른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까지 억지로 끼워 우열을 가리고도 했다. 그만큼 포스트 하야오에 절실해서인지 혹은 어지간히 인물이 없어서인지 아무튼 성급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애써 물망한 이 셋을 꼭 포스트 하야오로 봐야할까? 세명 모두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진 걸출 난 감독들이다. 이들은 이름만 들어도 설레게 만드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 국내 언론 역시 이 셋은 늘 예의 주시해왔다. 그만큼 국외 정서로도 먹어주는 감독들이다. 문제는 셋을 하야오의 이름으로 포장할 때 발생한다. 하야오라는 상자에 꾸겨 넣기엔 뭔가 조금 부족해 보이거나 탐탁지가 않아서다. 그도 그럴게 셋과 하야오는 엄연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생각이 다르고 길이 달랐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 업계의 발화를 고심했던 감독이라면, 나머지 셋은 어떻게 하면 불을 계속 지피 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감독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차이는 무엇을 보고 작품을 만드는 가에 따라 다르다. 하야오는 세상을 보고 작품을 만든다. 그리고 포스트 하야오 후보 셋은 세상을 바라보지만 상품으로써의 가치 역시 동시에 생각한다. 그들은 작품의 상품화가 익숙한 세대다.


최근의 예시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하야오의 기록을 경신했다. 관객수로 압도하고 비교가 안될 만큼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하야오보다 낮은 네임벨류인 걸 고려하면 대단한 성공이다. 그런데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너의 이름은>이 아무리 현재의 일본을 대변하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 안에 상품적으로 팔릴만한 이야기가 가득하다는 사실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를테면 성전환(TS) 요소가 들어가 있다는 것과 시간여행의 트렌드를 따르고 있다거나 또 무엇보다 대중들에게 먹힐 만한 작화 역시 그렇다. 반면 하야오는 <벼랑 위의 포뇨>나 <고양이의 보은>을 제외하면 늘 비슷한 작화와 딱히 자극적인 의도 없이 작품을 만들어왔다. 물론 그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소녀들의 판치라 같다는 비아냥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상품으로써의 디테일에 크게 신경 쓰는 감독이 아니다. 그게 설령 돈이 될지언정.

<바람이 분다>를 그 누가 상업을 가장한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애당초 팔릴만한 이야기도 아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도 등장하지 않는다. 호리코시 지로의 성우가 안노 히데아키인 걸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후보군 셋과 하야오가 엄연히 다른 이유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정치적인 우화로 보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 상업이든 정치든 이야기에 투영되면 목적이 확실해지기 마련이다. 직선적이고 그럴듯하게 포장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교훈은 덤이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는 그만큼 저돌적이지도 그렇다고 억세지도 않다. <바람이 분다>는 주장이 없다. 그러니 교훈도 없다. 호리코시 지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묵묵히 비행기를 만들 뿐이다. 자꾸 말을 걸고 말을 하는 건 그를 둘러싼 세상이다. 비행기를 만들어 전쟁에 써야 한다느니, 세계를 어떻게 한다느니 등 모든 말들은 그를 제외한 세상의 말이다.


이 영화는 세상과 적을 둔 한 사람의 이야기다. 목적에 충실하고 꿈에 맹목적이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다. 다만 그 목적이 결코 순수한 의도로 지속되지 않았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고 크게 되돌아봐야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논란의 여지를 남긴 하야오는 충분히 비난받을 일이다. 그러나 비난의 화살은 이쯤에서 그쳐야 마땅하다. <바람이 분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이야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호리코시 지로와 같다. 몰두하고 빠져들고 탐닉한다. 그리고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주변의 그 어떤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과 별개인 것 마냥 살아간다.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생각해보라. 하야오는 늘 그랬다. 그건 때로 사회에 대한 규탄(<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었고 과거에 대한 예찬(<붉은 돼지>)이기도 했고 인류와 환경(<모노노케 히메>)에 대한 관심이기도 했다. <바람이 분다>를 통해서는 스스로를 뒤돌아 봤을 뿐이다. 호리코시 지로를 통해 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 것이다.

노장의 끈질긴 분투. 고심과 타협의 결정. 그렇게 번복되어온 결심.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논란의 작품 <바람이 분다>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일본을 찬미하고 전쟁을 미화하고 대의를 수단 삼았다는 의혹은 빗겨나가기 어려워 보인다. 오해는 당연하다.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결코 열탕을 조장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걸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단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꿈을 잃지 않고 살았던 누군가의 인생을. 그리고 그 인생사가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는지를. 또 후계자의 등판을 소란 삼아 흰머리 지긋한 노인네를 내치기에 바쁜 아무개들을 향한 일침이었을 뿐이다.


꿈에 맹목적인 감독과 마냥 그런 건 아닌 감독 사이엔 커다란 협곡이 있다. 가볍게 넘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해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깊이가 다르다.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바람이 분다>는 그런 작품이다. 노장의 번민이 깃든 플래시 백에 가깝다. 나는 하야오다, 이런 울림 같다. 어리석게 누가 누가 되야하고, 누가 누구를 넘어서는 것만을 생각하는 단순한 프레임은 버려야 한다. 늙었다는 이유로 생각이 더딜거라는 생각 역시 버려야 한다. 그렇게 다시 그를 바라본다면 <바람이 분다>는 조금 새롭게 다가온다. 하야오는 여전히 하야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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