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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Dec 22. 2017

<세 번째 살인>, 세 번째의 몫

<세 번째 살인>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는 세 번째 살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세 번째 살인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설명도 일절 없다. 이 영화의 말미인 최종 재판 씬은 오로지 두 번째 살인에 대한 판결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세 번째 살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 영화의 제목이 <세 번째 살인>이라는 점과 그 흔적이 갈피조차 잡기 어렵다는 걸 미루어보면 어수룩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살인에 대한 몫은 오로지 관객의 것이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역작으로 평가되는 <걸어도 걸어도>는 일견 진입 장벽이 낮은 가족 풍 영화로 분류되곤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걸어도 걸어도>는 스토리면에서 아주 단순한 드라마일지는 몰라도, 인물들의 감정과 그들 저마다의 깊은 골 그리고 일상에서 조우하는 선명한 비극들은 이 영화가 드라마를 지향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날이 서있는 것들이다. 푸근한 마음속에서도 서늘한 긴장이 오고 가는 <걸어도 걸어도>는 그저 드라마라는 외형을 빌린 일종의 사회 고발물 나아가서는 서스펜스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그에게 있어 장르의 규격이란 무용한 것이었다. <걸어도 걸어도>뿐만이 아니라 <아무도 모른다> 역시 서정적인 풍광을 빌려 더욱 따갑게 매질하는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걸어도 걸어도> 이후 고레에다 감독은 변했다. 자신의 장기를 섬세하게 다듬기보다 작품의 문턱을 낮추고 대중을 맞이했다. 이 다음에 나온 작품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 등은 상당히 대중적인 작품들이었다. 그가 영화감독으로서 지향하는 바가 바뀌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살인>은 달랐다. 다시 이전으로 돌아온 그의 모습이 보인다. 고레에다 감독 역시 이 영화를 결코 대중의 시선에서 풀이한 작품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끝끝내 선명하지 못하고 불친절하게 끝나는 <세 번째 살인>은 재미 또는 장르적인 쾌감을 쫓아 극장을 찾은 대중의 기호에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서스펜스의 규격상 그리고 이같은 영화의 태도상 <세 번째 살인>은 어려운 영화가 될 수 밖에 없다. 실제로도 상당히 난해한 영화다. <걸어도 걸어도>에 버금가는 어려운 영화다. 그러나 단순한 복잡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의도적으로 숨기고 의도적으로 비틀어도 어지럽지는 않다. 해석이 모호히 꼬리를 물고 물지만 마냥 감이 안잡히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전개가 두 인물 간의 대결구도로 펼쳐진다는 점과 이에 이색적인 촬영술이 더해졌다는 점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세 번째 살인>의 상당수의 요소를 서부극에서 따왔다고 전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작품들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특히 카메라의 구도를 해당 작품들과 비슷하게 제편했다고 밝혔다.


서부극에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있다. 확연한 양 갈래의 대치 속에서 두 인물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며 영화는 결말로 다가간다. 서부극의 전통이다. <세 번째 살인>엔 서부극의 특징이 그대로 담겨있다.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와 미스미(야쿠쇼 코지) 둘은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지만, 진실을 추구하고 진실을 은닉하려는 입장 차에서 조명해보면, 둘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쫓고 쫓기는 사이다. 대결구도는 필연이다. 

둘의 대치가 극명한 가운데, 카메라는 분주히 돌아간다. 두 사람을 면밀히 포착하고 아주 깊고 내밀하게 다가간다. 번갈아 교차되는 무수한 장면 속에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장면은 이로인해 팽팽히 조여진다. 두 사람을 가르거나 포개거나 같은 화면 안으로 담아 둘의 대치가 결코 일방적이지 않게 끔 설계한다. 다소 느슨해지거나 퉁명한 부분들이 단번에 사그라들고 이색적인 구도를 통해 화면만으로 적지 않은 긴장감이 조성되기도 한다. 


옥창을 가로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인 둘의 관계가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건 이 때문이다. 또한 서서히 떠오르는 사건의 내막이 표정의 이면을 밝히니, 그 순간마다 새로운 의혹들이 펼쳐지고 어느새 관객은 진상규명에 몰두하게 된다.


그렇게 최종장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결말에서 어김없이 황망해지고 말 것이다. 구체적인 진실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진실은 쉽가리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의 언급 역시 그 어디에도 없다. 다만, 혼란 속에서 세 번째라는 의미가 진짜 세 번째를 칭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을 깨달을 뿐이다. 

그렇다. <세 번째 살인>의 의도는 여기서 멈춘다. 암시조차 없는 세 번째의 의미와 끝까지 두루뭉실할 뿐인 미스미의 태도 그리고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법정의 매캐한 공기가 이 영화의 전부다. 진실은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었고 진실을 밝힐 의향조차 없다.


결말부, 시게모리는 조각난 진실들을 모아 미스미를 찾아간다. 그의 퍼즐을 본 미스미는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네요. 하지만 좋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시게모리의 그림은 분명 가장 합리적인 그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미스미는 부정한다. 부러 하는 부정인지 진짜 부정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를 마주한 시게모리는 그것(진실)만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릇’이란 독백과 함께 무너져내리는 그의 표정에서 진실 너머의 것이 스친다.

곧이어 나오는 마지막 장면, 시게모리가 사차로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다. 어수선하게 그어져 있는 전깃줄 아래로 그의 발이 묶여있다. 진실 역시 갈 길을 잃는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우리마저 그곳에 갇힌다. 진실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 그런데, 진실이 어디를 향하든 소용없는 일이었다. 눈 앞엔 이미 거짓들로 그물 친 세상이 있었으니까. 무수한 추측만이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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