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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Dec 30. 2017

다름 아닌 우리의 영화, <강철비>

<강철비> / 양우석 감독

올해 초 <공조>라는 영화가 있었다. 현빈과 유해진이 주연한 영화로 썩 나쁜 영화는 아니었다. 설날을 목전으로 개봉한 이 영화는 연휴 극장가의 골든타임을 맞이해 좋은 성과를 올렸다. 물론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좋은 작품이기도 했다.


문제는 작품의 내실이었다. 재미는 있는데, 그게 전부였다. <공조>는 남과 북을 소재로 다룬 영화다. 사실 이 영화의 관건은 예민한 소재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였다. 그러나 액션이 장르인 이 영화의 특성상 소재의 민감함이란 결국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것이 흠이자 패인이었다. 남과 북의 사이가 꽤나 단순하게 묘사되고 말았다. 치고받고 투닥거리며 사나이끼리 뜨거운 땀방울을 나누면, 그간의 모든 울화가 희석되는 것 마냥 그려지고 말았다. <공조>는 뼛속부터 액션 영화를 지향했다. 때문에 남북 간의 문제를 일차원적으로 본 방만한 자세는 꽤나 문제로 남았다.


올해 말 <강철비>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정우성과 곽도원이 주연한 영화로 <공조>와 같이 남과 북을 소재로 다룬 영화다. 소재만 두고 보면 두 영화는 비교의 대상이다. 그러나 두 영화를 쉽게 비교할 순 없다. 결코 같은 영화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은 내용 자체부터 지향하는 바까지 전부 다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조>와 <강철비> 두 작품은 어쩔 수 없이 포개지는 부분들이 있다. 둘을 겹쳐보면 놀랄 만큼 똑같으면서도 놀랄 만큼 다른 영화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북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개성공단서 일하는 임직원들의 격려 차 공장을 방문한 북한 1호 김정은을 향한 암살 시도였다. 주인공 임철우(정우성)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쿠데타 음모를 미리 알고, 쿠데타 주도 인물을 사살하기 위해 파견됐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 그는 반동분자들의 쓰기 좋은 말이었다.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른 채 개성공단을 향했다. 자신이 쿠데타를 막기 위해 보내졌다고 착각한다. 1호 암살 계획으로 개성공단에 미사일이 무차별 폭격되는 순간, 철우는 그제야 일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


철우는 1호를 암살한다는 명목 하에 시민들이 쿠데타 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그리고 우연히 그 참담한 현장에서 1호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그는 1호를 살리기 위해 현장인 개성공단에서 도망친다. 그가 향한 곳은 남한이었다.  


철우는 운 좋게 남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숨 돌릴 틈도 없이 1호를 암살하려는 추격조에게 쫓기고 만다. 그는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그의 상관인 리태한(김갑수) 정책 총국장은 앞으로는 1호의 안전을 확보하라며 그에게 지시를 주면서 뒤로는 1호의 암살을 지시하고 있었다. 철우는 뒤를 밟은 추격조에 의해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공조>의 임철령(현빈)과 <강철비>의 임철우(정우성)는 이유야 어찌 됐든 남으로 건너온 북의 사람이다. 둘의 목적은 다르지만 둘은 공통적으로 필요로 하는 게 있다. 도움이다. 제 아무리 힘 있는 그들일지라도 외지에선 초라할 뿐이다. 더구나 남한이니까. 철령의 경우에는 남한과의 공조 수사가 필요했다. 철우는 1호의 안전을 위해 남의 협조가 필요했다. 영화는 그런 둘에게 남쪽의 인물을 하나씩 붙여준다. 강진태(유해진) 형사와 곽철우(곽도원) 청와대 관계자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협조에 의해 남과 북은 2인 1조를 이뤘다. 하지만 남북의 헤아릴 수 없는 마찰만큼 한 쌍을 이룬 둘의 관계는 상당히 마찰이 짙다. 두 영화다 똑같다. 다만, 그 각축 속에서 <공조>와 <강철비> 각각이 그리는 두 인물 간의 유대에 대한 묘사는 일절 다르다. <공조>는 상처를 새기며 거칠게 쌓아가는 남자들의 우정을 택했다면, <강철비>는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유대를 쌓아간다.


<강철비>가 선택한 둘의 유대는 공감이다. 어설픈 감정이나 인간성에 섣불리 호소하기보다 분단된 나라의 슬픔과 비극의 살갗을 드러내며 현실을 규탄하고 공감을 이끈다. 선명한 비극들을 뒤로했을 때, 지금 서로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같이 고민한다. 철우가 철우를 믿어주고 철우가 철우에게 믿음을 증명하듯 서로 간의 신뢰를 보인 것이 그 예다. 둘은 같은 이름 그 이상으로 운명공동체다.

반면 <공조>는 공조 수사를 위해 남과 북이 결탁을 했지만 결코 공조가 아니었다. 유해진은 현빈을 쉽게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그를 공감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명의 철우와 다르다. 둘은 서로를 믿었다. 단순히 이름이 같아서도 아니고 등 뒤에 짊어진 무게가 엇비슷해서도 아니다. 둘의 목적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철우와 철우는 한반도의 평화를 바럤고 이 땅에 비극이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서로의 협조가 절실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두 명의 철우야 말로 진정한 공조에 가까웠다.


작중 철우와 철우는 허기에 져 잔치 국숫집을 찾는다. 수갑에 손이 묶여 자유롭지 못한 북쪽 철우에게 남쪽 철우는 그의 한 쪽 손의 수갑을 풀어주며 자신의 오른손에 채운다. 그리고 나란히 앉아 국수를 들이킨다. 우리는 같은 편이라면서. 북쪽 철우는 오른손잡이고 남쪽 철우는 왼손잡이다. 나란히 앉아 국수를 먹는 둘의 모습은 감독의 의도가 빤히 보이지만 결코 작위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어쩌면 그 순간 떠오르는 건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 일지 모른다. 남과 북이 서로를 맞잡고 배꼽 빠지게 웃고 떠들었던 그런 장면들이 말이다. 또한 노래를 통해 문화와 사상을 공유하는 그 모습들마저 놀랍도록 닮아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김광석의 노래가 언급됐다. <강철비>에서는 GD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두 영화의 텀과 텀. 노래의 형태는 변했지만 정작 우리는 변하지 않았다. 두 명의 철우는 분단되어 떨어진 우리를 투영한다.

<강철비>는 곳곳에 의미를 두려는 시도들로 가득하다. 철우라는 이름이 겹치는 건 물론이고 남쪽 철우가 왼손잡이라는 점 그리고 반포동의 언급이 무엇보다 그렇다. 이렇게 하나하나 의미를 포진시켜두려는 점은 양우석 감독의 전작인 <변호인>과 똑 닮았다. 놀라운 건 이 시도가 전작도 그렇고 <강철비>도 그렇고 현재에 주효하게 먹혀든다는 점이다. <변호인>은 인간 노무현이란 갈증이 심화되었을 무렵 개봉해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훔쳤다. <강철비>는 현재 남북의 대치와 정국을 미루어 볼 때, 가장 현재다운 영화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논쟁을 부를 수밖에 없다. 정치적 영화라는 뭇매를 맞는 건 당연해 보인다. 특히나 좌파 영화로 분류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강철비>가 말하려는 참 뜻을 헤아려본다면, 그러한 논쟁은 실로 무용한 것이다. <강철비>는 남북을 소재로 한 영화다. 세간에서는 남북관계를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허나 <강철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우리의 문제며. 이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직시한다. 그 결론이 영화의 마지막 선택에 묘사되어있다.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그 시작으로서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것. 이 결론은 전혀 다른 질문이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다.


작중 남쪽 철우는 북쪽 철우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는 살 좀 찌고. 나는 살 좀 빼고. 그래서 우리 반포동에 모여 살자. 가끔 소주도 한 잔 하고”. 그의 말을 들은 북쪽 철우의 눈시울이 빨갛다. <강철비>는 정치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의 관계와 영화의 제언이 이를 잘 말해준다. <강철비>는 다름아닌 우리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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