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 장준환 감독
좌시와 묵시의 사회. 그러나 그마저도 쉬이 압살 되던 멸시의 사회. 갈 곳을 잃은 진실이 부유 끝에 깊은 한숨으로 가라앉던 그런 사회. 그곳은 분명 우리나라였다. 명백히 우리의 삶이었다.
격동의 1987년으로부터 30여 년. 스크린으로 흡입되는 시간의 무게가 조금 컸던 탓일까. 마저 다 빨려 들어가지 못한 시간의 응어리를 보았다. 영화 <1987>을 뒤로하고 어김없이 마주할 마음의 소용돌이나 어떠한 엉김은 상처가 채 아물지 못했으며, 상처가 아물었더라도 그 흔적이 여전하다는 걸 암시한다. 87년은 우리에게 어떤 해였을까.
영화 <1987>의 시작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그리고 <1987>의 끝 역시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당대 최고의 권력기관 중 하나였던 남영동을 거대한 좌표로 지정한 이 영화는 대공분실에서 흘러 터진 유수를 각계 계층으로 흘려보내 서서히 잠식시킨다. 그 후, 누수를 막지 못한, 그러니까 분노가 극에 달한 시민들의 공분을 살펴 그들이 거대한 닻을 올리기 전까지의 과정을 가파르게 묘사한다.
사건의 발화는 남영동의 서울대생 고문치사 사건. 공안의 수배 대상으로 지목된 서울대생 박종운의 묘연한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참고인 자격으로 잡혀온 후배 박종철이 심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고 만다. 고문을 자행한 남영동은 이를 감추기 위해 박종철의 사인을 날조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든다. 하지만 비록 군부에 굴했더라도 저마다의 분야를 사수하며 악착같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양심만은 결코 져버리지 않은 시민들의 용기에 진실의 부표는 결코 침몰되지 않는다.
<1987>은 민감한 과거의 사안을 마주하는데 여러 인물들의 시점을 빌린다. 영화가 결국엔 누군가만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1987>의 해법은 상당히 과감한 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보호장치로서 몇 가지 기믹을 두었다. 표면상 드러나는 몇 명의 주인공들과 영화를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숨은 주인공들이다. 이 모두가 모여 하나의 군집을 형성하지만, 영화는 그걸 알릴 생각이 없다. 후자의 존재는 극적인 표출을 위한 수단이자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만들어가는 영화라 해서 모두 <1987> 당대의 시대정신을 표하는 건 아니다. <1987>은 그 각각의 정도를 달리 하여 인물들을 세공한다. 바로잡겠다는 마음이 투철한 사람이 있는가 한편, 끝끝내 몸을 사리며 나약함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그중 유달리 돋보이는 인물이 극 초반 중요인물로 등장하는 최검사(하정우)다. 자칫 수렁으로 빠질 뻔한 고문치사 사건을 들춰낸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를 족보 없는 똥개라 비유하며 권력과 시스템에 저항한다. 그러나 영화를 봤다면 알 것이다. 그가 저항하는 이유가 군부의 폭정과 남영동의 지나친 월권에 있지만, 꼭 그것만이 그를 똥개로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걸. 사실 그의 행동은 검사라는 자신의 격을 떨군 조무래기들을 향한 성에 있다. 물론 뒷부분의 최검사의 말들은 사사로운 개인감정을 깡그리 잊어낸 듯한 대사가 줄을 잇지만 어찌 됐든 발단이 그러하다. 그는 정의롭다기보다 직업 정신과 자신의 가오를 우선으로 챙긴 인물에 가깝다.
그 밖에도 진실을 이야기하는 걸 꺼리는 의사나 내부고발을 심히 고민하는 교도소장 등. <1987>엔 잘못을 시정하려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만 있지 않다. 힘 앞에서 무력해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부터 더없이 야비한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또한 영화는 그들 모두 저마다 합리가 있고 정의가 있다는 걸 적극 피력한다.
하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을 쥐고 있는 박처장(김윤석)까지 시대를 표하는 인물로서 끌어안은 점은 의외다. 그는 <1987>의 명실한 악역이자 이 영화의 보스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자의 악행이 비극을 좌초하는데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사람마저 시대의 부산물로 포섭한다. 남처장이 빨갱이란 빨갱이를 죄다 잡아들이고 고문하고 유린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밝힌다. 소리와 조명으로 점철된 플래시백을 열차처럼 쏟아내며 못되먹은 그에게도 나름의 정의가 있었다는 사실들을 나열한다. 그리고 그에게 겨누어졌던 모든 총구를 그보다 더 뒤에 있는 인물에게 겨누도록 만든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인물이다.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산산이 부서진 파편들을 하나 둘 맞춰가며 급속도로 혁명의 닻을 올린다. 임계에 달한 분노가 단번에 끓어오르듯 시민들의 외침은 곧 성화를 이룬다. 미력한 부표가 등대가 되는 순간이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막을 내린다.
<1987>의 메시지는 확실하다. 장르와 사안만 봐도 그러하다. 때문에 영화를 뒤로하고 우리에게 스치는 감정들은 사실 이와 비슷한 류의 작품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것은 분명 분노와 회한 그리고 경각심일 것이다. 다만, 뜨거움에 관해서라면 조금 다르다. <1987>은 여타 영화들이 가지지 못한 뜨거움이 있다. 억지로 만들어낸 뜨거움이 아니다. 누군가만의 뜨거움도 아니다. 이 뜨거움은 마치 잔상과도 같다. 식어서도 열기를 남긴다.
<1987>은 미열들의 영화다. 달랑 작은 촛불 하나 피우는 것이 고작인 나약한 시민들이 어떠한 이유와 울분으로 뭉쳐 큰 불을 지펴내는 과정을 이야기한 영화다. 그리고 그것은 알다시피 현재 우리의 이야기와 같다. 불과 1년 전의 우리의 서사다. 광장에 나가 뜨겁도록 맞붙었던 그 날의 재현인 것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과거를 연출하지만, 관객인 우리가 보는 광경은 어디까지나 현실과 포개진다. 더구나 역사의 허무한 반복과 그것의 지루한 되풀이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점점 배가 된다.
연희(김태리)가 시위의 물결 속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소스라칠 정도로 심장이 고동치는 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그 주체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서. 서사를 바짝 당기고 내면을 뜨겁게 달구는 이 장면을 나는 당분간 잊지 못할 것 같다.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장면이지만 그 순간은 분명한 나 자신의 경험이었고 우리 모두의 경험이었다. 1987년의 격동. 2016년의 재현. 하지만 여전히 끊어지지 않은 연쇄의 작용. 그 속에 우리가 있었다. <1987>은 과거를 들춘다. 하지만 <1987>이 열어젖히는 건 과거 그 너머의 것이다. 미래다. 잊지 말아야 할 순간은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