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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Jan 28. 2018

일상의 '말'들

영화 <패터슨> / 짐 자무쉬

우리의 일상은 무수한 낱말들로 산개되어 있다. 사소한 물건부터 보잘것없는 행동까지. 이 모든 것엔 어김없이 이름표가 끊어진다. ‘~다’로 시작해 또 다른 ‘~다’로 끝맺는 장황한 문장조차 실상은 낱말로 뭉쳐진 덩어리에 불과하다. 현실은 객관화의 장이다.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걸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그래야 의미가 온전해진다. 요컨대, 말이 아닌 낱말로. 이야기가 아닌 경험으로. 또 그것들의 나열로 정렬해야 한다. 보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그렇기에 우리의 일상은 보잘것없다. 일상을 대체할 만한 언어가 마땅히 없어서다. 간혹 있더라도 그건 의미 없는 텍스트들 뿐이다. 하루를 담아내는 애틋한 문장. 관찰기가 아닌 느낌적인 서사. 이 모든 것이 무력하고 결코 다채롭지 않기에. 일상의 기억은 자꾸만 어렴풋한 잔상으로만 번진다. 이미지만이 유일하게 기억을 온존하고 우리를 다독이는 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게 일상을 빗댈 언어 다운 언어가 없어서. 


여기 한 남자의 일상이 있다. 겉보기에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고 절로 맥이 빠지는 꺼져버린 풍선 같은 일상이다. 한마디로, 지루하다. 그러나 이 남자의 일상. 왠지 모르게 남 다른 면이 있다. 챗바퀴를 돌리듯 하루를 규칙적으로 살아갈 뿐이지만 그의 일상엔 온종일 새로운 것들로 가득하다. 금방이라도 팽창할 것만 같은 힘이 그의 일상을 맴돈다. 

짐 자무쉬의 영화 <패터슨>은 한 소도시에 사는 평범한 남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의 이름은 패터슨(아담 드라이버). 주인공이 사는 도시의 이름도 패터슨이다. 영화의 제목이 <패터슨> 인건 그런 말장난이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중요한 건 따로 있다. 패터슨은 태어나서부터 어엿한 어른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터슨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이름이 개인에게 채워진 족쇄인 것처럼 그는 자신의 이름과 지역에까지 발목을 잡혀있다. 그러나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새다. 패터슨은 패터슨을 지루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을 속박하고 있다고도 느끼지 않는다. 그에게 패터슨이란 그저 이름일 뿐이고 고향일 뿐이다. 


그의 직업은 버스기사다. 버스로 동네 이곳저곳을 돌며 사람들을 나르는 게 그의 일이다. 기사라는 직업 특성상 그의 일에는 지루함이 다분하다. 지나간 곳을 또 지나가고 봤던 걸 또 보며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패터슨 역시 장사는 아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에겐 나름의 지혜가 있다. 지루할 때면 귀를 쫑긋이거나 자그마한 노트를 한 권 꺼내 드는 것. 그의 취미는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이다. 생판 모르는 남의 이야기를 훔치며 이를 소재삼아 시를 쓴다. 

<패터슨>에는 패터슨의 시로 가득하다. 화면 안에 촘촘히 담긴 그의 시를 스윽 훑어 읽어 내려가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화면 속 장면 장면이 한 껏 빛을 품은 듯 형형해지는 건, 그가 매워 넣은 행간 속 언어들이 유독 빛을 내기 때문이다. 무심히 스쳐갈 만한, 스쳐도 그만인 일상 속 순간들이 그의 한 줄에 지루를 박차고 기지개를 켠다. 숨죽이던 공기가 힘차게 상승하고 또다시 이어질 일상은 또 다른 환상을 품을 채비를 한다.


패터슨의 일상은 수많은 말들과 감정들로 수북하다. 그에겐 거대한 서사만이 기록을 남기는 유산이 아니다. 숨을 쉬고 내달리는 바로 그 순간순간이 삶이 격동하는 순간이자 찬미다. 그가 자꾸만 습관적으로 시를 써내려 가는 건 일상을 대하는 그의 관습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시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아내가 제안하는 솔깃한 유혹에도 자신의 시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부끄러워서? 아니면 보잘것없어서? 그렇지 않다. 그에게 있어 시는 일상이고 기록이다. 삶을 세차게 굴리는 거대한 공전이다. 


그렇다. 그에게 시는 동력이다. 목적이 아니다. 시인은 시를 쓴다. 하지만 그건 곧 시가 아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기검열과 결과물을 향한 일말의 기대는 일상에서 도저히 채워낼 수 없는 거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패터슨이 시인이 되는 걸 거부하고 시를 세상에 내보이는 걸 꺼리는 건 언젠가 자신의 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는 일상일 뿐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패터슨은 평화롭다. 크고 작은 일들이 빈번하지만 결코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내일이면 모든 게 제자리다. 그렇기에 패터슨에는 기대가 없다. 낙관만이 있을 뿐이다. 패터슨은 오늘도 내일도 패터슨이다. 패터슨 역시 오늘도 버스를 몰고 아내와 같이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매일 가는 바에서 맥주를 한잔한다. 주말이 오면 조금 더 눈을 붙이고 기지개를 늦게 켤 뿐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하루가 데자뷰처럼 끝을 모르고 포개어져도 그의 시는 결코 지루해지지 않는다. 매일이 새롭고 다채롭다. 그에게는 언어가 있다. 삶을 다각도로 주시하고 그 안에 산개된 낱말들을 하나 둘 주워가며 완성한 정교한 탑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 폭의 마천루처럼 높고 굳건하다. 매일이 같더라도 그가 부감하는 필치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오늘을 살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아간다. 

그가 일순 시를 잃었던 영화의 한 순간. 패터슨은 우연히 마주친 행인의 은으로 다시 시를 써내려 갈 결심을 세운다. 하지만 그것은 계기일 뿐. 다시 시를 써내려 가는 건 결국 패터슨 자신이다. 텅 빈 공책 위로 기록될 수만 가지의 자모들은 다름 아닌 패터슨의 언어다. 그리고 다시 쓰일 그의 시 역시 여느 때처럼 새로울 것임에 분명하다. 적막한 일상은 그의 거대한 세계니까. 숨죽인 듯 조용해도 그곳에는 고동이 있으니까. 패터슨이 살아온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심심해도 언어로 가득한 일상. 매 순간이 의미가 되어 나부끼던 절대적인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패터슨은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다. 지평선은 여전히 수평을 그리고 패터슨은 언제나 패터슨이다. 


<패터슨>은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의 일상은 ‘그’라는 거대한 행성 주위로 공전한다. 우리 모두의 일상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뜻은 거기에 있다. 다만, 우리는 패터슨만큼은 잘 모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벅차오를 매 순간순간이 우리 주위에 숨죽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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