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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Mar 03. 2018

지금 말할 수 있는 희망에 관해서.

무심코 올린 고개 위로 청명한 하늘이 스친다. 하늘은 끝을 모르고 높게 뻗어있다. 그 끝에 뭐가 걸린지도 모른 채. 그 창연한 하늘 아래서 나라는 존재는 한없이 초라하다다. 나를 억누르던 고민들은 한낱의 것으로 전락한다. 하늘은 천정을 모르고 솟구쳐 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잠시 넋을 잃는다.


하지만 그것은 곧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하늘은 순간의 위로일 뿐. 하늘은 무심하다. 하늘은 현실의 무게를 배로 돌려준다. 고개가 자꾸 아래를 향하는 건 무거워서가 아니다. 하늘이 되새기는 현실의 무게가 벅차서다. 현실은 아래에 있다. 모든 것이 허망하게 나뒹구는 너저분한 아래에. 고민은 결코 날아가는 법이 없다. 고민은 현실의 것이다.


다만, 밤하늘은 다르다. 털어낼 순 없지만 잊어낼 순 있다.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선 위도 아래도 잘 보이지 않는다. 우두커니 서있는 자신만이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달이며 가로등이며 갖은 빛들이 채근 대도, 그 빛은 미약하다. 현실의 살갗까지 닿지 않는다. 밤하늘은 모든 걸 집어삼킨다. 그곳에는 나 자신만이 있다.

이시이 유야의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는 밤하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밤하늘 아래서만 고개를 드는,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이들의 가슴 시린 이야기다.


주인공 신지(이케마츠 소스케)와 미카(사토 료)는 차가운 도시의 빈민이다. 각박한 생활고와 남들보다 한참은 못나다는 지나친 열등감에 숨죽여 살기 바쁜 현대인의 전형이다. 보통의 삶과도 확연히 대조되는 그들의 삶은 상당히 무미건조하다. 낮에는 죽도록 일할 뿐이고, 밤이 되어서야 잠시 숨을 돌린다. 낮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나긴 노동의 시간일 뿐. 그 외엔 달리 의미 없는 시간이다.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신지는 사방이 훤한 건물 위에서 앞만 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앙상한 건물 위에서 한 번쯤 탁 트인 하늘을 만끽할 법도 하지만, 그에게 보이는 건 당장 날라야 할 수많은 공구 더미와 시멘트 몇 포대가 전부다. 덩달아 한 쪽 눈까지 잘 안 보이는 그는 그 외의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다.


낮에는 간호사, 밤에는 술집에서 도우미를 하는 미카는 시종일관 웃는다. 환자를 돌보며 억지로 웃고, 취객을 상대로 더한 억지웃음을 짓는다. 그녀의 얼굴엔 기묘한 균열이 있다. 불안과 초조. 원망과 체념. 웃어보아도 표정에 스치는 감정들은 이 같은 것들로 넘친다. 숨기는 데에만 익숙해진 그녀의 얼굴은 언제부턴가 표정 다운 표정을 잃었다.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좀처럼 고개를 드는 법이 없다. 봐도 별 대단한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푹 숙인 그들의 고개 옆으로 그림자가 유난히 짙다. 낮은 그들에게 눈부신 지옥일 뿐이다. 의식하지 않고 밤이되기를 기다리는 것. 그것만이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위로와 안식이다.

그런 신지와 미카가 처음으로 만난 건 깊은 밤이었다. 온전한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던 그 찰나의 시간에 둘은 우연히 서로라는 존재를 확인했다. 하지만 밤은 짧았다. 서로의 속내를 다 훌어내기엔 밤은 희미했다. 금세 꺼져버려 동이 트는 걸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둘은 밤이 아닌 시간에도 조우한다. 하지만 서로 머쓱해한다. 점점 민낯이 되어가는 자신이 부끄러워서다. 자격지심 탓도 있다. 그래서인지 둘은 자꾸 엇갈린다. 자신 안에 들어찬 상대를 밀어내기 바쁘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과분한 상대라고 믿는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는 이시이 유야의 전작들과 사뭇 다른 면면이 보인다. 이 작품은 전작들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휴먼 드라마로 풀이하는 감독의 궤는 변함없지만 사회 고발의 의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는 신지와 미카가 아니더라도 이야기할 것들이 많다. 주변의 삶과 그들 앞에 놓인 사회의 황량한 일면 등. 꼬집어 이야기할 것들이 상당하다. 신지와 미카가 이야기의 중심이지만 결코 전체는 아닌 셈이다. 도쿄를 제목으로 적시한 건 그런 다양한 문제들을 한데 응축시켜 놓은 의지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둘만의 이야기를 좇는다. 그리고 둘의 이야기로 마침표 찍는다. 신지와 미카의 삶이야 말로 날 것의 도쿄 자체라서다.


겉으론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갖은 추악들이 득실 되는 대도시. 도쿄는 그런 대도시의 전형이다. 그리고 신지와 미카는 그곳을 대표하는 빈민이다. 관계에 서툴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확실한 내일을 살아가야만 하는 그들은 누군가가 직조한 보통의 삶과는 많이 다르다. 그들의 삶에는 행복이 없다. 목표도 없고 유희도 없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위해 악착같이 버텨야 하는 극진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관성 따위 개나 줘버린 굴곡 어린 삶이다.


둘의 삶은 분명 고꾸라지기 일보 직전의 삶이었다. 언제 죽음과 조우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위태로웠다. 그러나 둘이 된 신지와 미카는 달라졌다. 서로의 볕이 되어줬다. 둘의 삶에서 모습을 감췄던 출구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지와 미카는 그곳을 향해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비록 그 이행이 더디지만 둘은 점점 밤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는 두 집단의 삶이 있다. 홀로 악전고투를 번복하는 이들의 각박한 삶과 목표를 향해서 일방적으로 달려가는 외골수의 삶이다. 전자는 작중에 묘사되는 대다수의 삶이다. 신지와 미카 그리고 주변 인물들에 해당한다. 반면, 후자는 하나다. 그 어떤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거리 위를 지키며 노래를 부르던 이름 모를 여성 보컬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이야 말로 이 영화가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신지와 미카는 밤마다 거리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부르는 정체 모를 여자를 멍청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안도했다. 무의미한 삶을 사는 건 자신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참이 지나, 둘은 우연히 그녀의 노래를 다시 듣게 된다. 낮이었다. 평소라면 제 갈길에 바빴을 그들이지만 그 날은 왠지 모르게 달랐다. 그녀의 노래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뒤이어 그녀의 데뷔를 알리는 커다란 광고가 둘을 스쳐 지나간다. 이 순간, 신지와 미카는 이제껏 없었던 환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그들의 삶이 이전되었음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둘에게는 확신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고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정작 확신은 없었다. 짝을 얻었지만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몰랐다. 어딘가 모르게 불안했다. 초조하기도 했다. 조금은 따뜻해진 곁이 혹여 다시 시릴까 되레 겁이 났다. 하지만 꿋꿋이 외길을 가는 정체모를 보컬을 보고 깨닫는다. 삶은 생각보다 단순할지도 모른다고. 둘은 그녀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목표를 향한 삶을.


언제부턴가 세상을 송두리째 흔드는 이야기들이 실종됐다. 신데렐라는 물론, 다윗 같은 이야기는 신화 그 이상의 것이 되었다. 꿈을 논하고 이상을 바라는 건 바보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영화도 점점 현실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실보다 더한 현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는 그런 부류의 영화다. 희망을 끌어 모아도 바뀌는 건 미미한 현실의 기저에 근거한 영화다.

끝에 제시한 결말이 결코 희망적이라고 나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들이 얻은 거라곤 제 짝 하나 그리고 관성 정도다. 대단한 보상이나 변화가 아니다. 둘은 불확실한 내일과 다시 씨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 곁으로 희망이 스친다. 희미하지만 확실하다. 대단한 건 없어도, 눈부시진 못해도,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일이 둘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신지와 미카는 그것 하나만으로 더없는 행복을 느낀다. 많은 걸 바라고 더한 환영을 쫓기에 바쁜 우리들에게 그들의 소소한 깨우침을 무얼 가리킬까. 하찮은 변화? 아니면 위대한 진일보? 물론 생각하기 나름이겠다. 다만, 이상하게도 도시의 마천루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그 아래서 우리의 삶은 축쳐지기를 거듭한다. 어쩌면 지금 논할 수 있는 희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아주 작은 변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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