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uruvuru Jul 31. 2018

뭉개진 한 마디, <만비키 가족>

영화 <만비키 가족> / 고레에다 히로카즈



- 주의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을 재정의 할 수 있는 단어를 꼽는다면 그건 필시 ‘가족’ 임에 틀림없다. 그의 작품엔 늘 가족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중심이라 그런 것도 있다. 다만 가족이란 집합 아래 그의 영화는 늘 다른 형태의 가족을 보여왔다. 이혼으로 부서진 가족을 그렸던 <태풍이 지나가도>, 배 다른 자매들이 모인 어설픈 가족 <바닷마을 다이어리>, 알고 보니 남이 끼어있던 가족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 그의 이야기엔 언제나 가족이 숨 쉬고 가족으로 가득했다. 이만큼이나 가족을 확장해본 감독이 있을까? 이쯤이면 그에게 가족이란 장르 그 자체다. 물론 예외를 꼽는다면 배두나가 주연했던 <공기인형>이나 미스터리 장르 <세 번째 살인>이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계를 맺는 지점에서 가족이란 교집합이 생긴다. 해석 여하에 따라 그럴듯한 가족 영화로 둔갑시켜 볼 수 있다.

<만비키 가족>은 대놓고 가족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뻔해 보였다. 장르의 전환을 꾄 전작 <세 번째 살인>과 같은 파격이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늘 그렇듯 그의 영화에는 아쉬움을 달래는 만족감이 있는데, <만비키 가족> 역시 그랬다.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다. <만비키 가족>은 근래 만들어진 휴먼 드라마 중에 가히라 부를만한 작품이다. 작위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현실에 강박을 두지도 않았다. 그 지점이 탁월했다. 이창동의 <버닝>이 과잉을 상징했다면, <만비키 가족>은 균형 그 자체였다. <버닝>의 수상 불발은 어쩌면 이 지점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보여줄 것이 명확한 영화는 대개 주제의식에 사로잡혀있다. 목표가 뚜렷한 만큼 주변은 좀처럼 환기되는 법이 없고 굳이 환기하려 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영화가 끝나면 인장이 남지만, 너무 선명한 것이 흠이다. 필름이 제 아무리 두툼해도 기억 속 필름은 몇 바퀴 둘레에 지나지 않는다. 중심만이 고스란히 각인되기 때문이다.


<만비키 가족>은 전체적으로 흐릿한 영화다. 멀쩡한 가족이 될 수 없는 6명이 모여 그런 것도 있다. 각자의 균열을 쫓다 보면 시선은 분산되기 마련이니까. 더구나 한정된 시간 안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인지 <만비키 가족>은 흐릿한 인상을 더 흐리게 만들려는 의지가 보인다. 가장 단적인 예는 결말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깨나 어수룩하다. 보통의 관객이 바라는 염원의 정반대에 있다.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 마치 안개 같다.

이 같은 태도는 작중 인물들의 이면에서 기인한다. 생판 남인 노파의 연금에 기생하는 수상쩍은 부부. 유리방에서 몸을 흔드는 손녀(배다른)와 동거하는 할머니. 육아 방치로 주워진 아이 둘. 사연이 모여 가족을 이루니 말로 다하지 못하고 하기가 좀 그런 장면들이 곳곳에 있다. 만일 이 모든 걸 일일이 펼쳐낸다면 관객의 이해를 도울지도 모르겠지만 <만비키 가족>은 그러질 않는다. 그럴 생각이 없다. 각자의 짤막한 대사를 통해 슬며시 비극의 운을 띄울 뿐이다. 과거의 재현에 무게를 두지 않는 고레에다 감독의 습관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때문에 영화엔 현재의 모습이 전부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의 주변은 어떤지. 현재를 살피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자꾸만 등장하는 씬이 있다. 도둑질(만비키) 장면이다. 위태로운 이 가족이 삶을 영위하는 가장 극적인 방법이자 이들의 상징이라서다.


물건을 슬쩍하는 것과 이에 대해 별 다른 죄책감이 없다는 것. 또 그걸 그럴 수 있다는 듯 웃어넘기는 이 가족의 의식은 상당히 비정상적이다. 어떻게 더 능숙하게 훔칠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걸 보면 더 가관이다. 하지만 일련의 범죄를 일일이 지적하고 규탄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 가족을 연민한다. 이 가족의 도둑질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도둑질은 실패한다. 거짓말처럼 성공하다 거짓말처럼 실패한다. 아니, 정확히는 그만둔다. 도둑질을.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훔치지 않는다. 훔쳐야만 살아갈 수 있음에도.

도둑질 종결에 방아쇠를 당긴 건 다름 아닌 주인공인 날치기 소년 쇼타(죠 카이리)다. 쇼타는 의문이 있었다. 전과는 사뭇 다른 의문이었다. 도둑질은 뭘까? 그간 훔치는 것에 별 다른 생각을 갖지 않던 쇼타지만 가족을 보다 확실히 인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여동생이 생기고나서부터다. 여동생 유리의 존재는 쇼타의 곁을 채워주는 ‘벗’인 동시에 ‘책임’이었다. 가족에게 끝끝내 벽 하나를 세우는 쇼타였지만, 유리 앞에서는 벽을 허물었다. 쇼타를 오빠라 부르는 유리의 부름에 대번 응하는 쇼타의 모습에서 이 같은 모습이 스친다. 쇼타는 오빠였다.


“가르쳐 줄 게 그것밖에 없었어요” 쇼타의 아버지 오사무(릴리 프랭키)가 취조 당시 했던 말이다. 쇼타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준 지혜가 도둑질(만비키)뿐이었다는 말이다. 쇼타는 오사무의 가르침을 훌륭히 건네받았고 훔치는 족족 성공했다. 하지만 쇼타의 마지막 선택은 도둑질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쇼타의 결정이 와 닿는 지점은 이 영화의 해변 씬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오사무는 쇼타와 바닷가에서 남자의 성징에 관해 짤막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때 보이는 부자의 모습은 보통의 부자와 다를 게 없었다. 오사무는 어엿한 아버지였다. 그리고 쇼타는 그의 엄연한 아들이었다. 문득 영화 <문라이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진정한 아버지가 무엇인지를 곱씹어보게 만들었던 장면. 후안과 샤이론의 모습을 말이다. 쇼타가 바란 가족이란 그리고 아버지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쇼타의 선택. 그 한 순간의 균열로 와해된 가족은 훔치는 걸 멈추고 훔친 걸 되돌려 줄 일만 남는다. 엄마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쇼타가 본래 있어야 할 곳을 알려준다. 오사무는 쇼타의 아버지가 되는 걸 그만두기로 한다. 쇼타는 오사무에게 도둑질을 부러 실패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살기 위해 훔친 것만이 아니라 살고 싶어 훔쳤던 것들, 그들의 무른 관계까지 헌납하며 어렴풋이 가족의 종결을 알린다. 그리고 그것은 그 어떤 말로도 행동으로도 표현되지 않는다. 말을 내뱉지만 결코 들리지 않는다. 어설픈 관계의 가족이 진정한 가족으로  마스터피스를 맞추려는 순간은 눈 깜짝할 만한 일순이었고 그것은 곧 와해를 상징했다. 쇼타의 나지막한 아버지란 무언은 누군가에게 소리를 빼앗긴 마냥 적막하고 조용했다.


<만비키 가족>은 이들 가족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정’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그것이 나쁜가?라는 다소 비판 조의 시각을 보태기도 한다. 이 영화에 짤막하게 등장하는 경찰 둘은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이들의 말은 거짓 투성에 틀림없는 위장이라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 이들 가족은 비정상적이고 몰상식한 개념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장면을 되짚어 온 우리의 눈에는 이들 가족의 올망졸망한 모습들이 구슬프게 맺혀있다. 그리고 이들의 마지막이 너무나 흐릿하게 번져있다. 적색의 비관적인 결말과는 또 다른 이 영화의 마지막에 어딘가가 뭉개진 기분을 좀처럼 지워낼 수 없었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4등>, 준호가 꼰대를 대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