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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Mar 14. 2024

2023년부터 생각했던 2024년 여행

요즘 나는 어딘가 떠나는 것을 망설인다. 호주머니가 가벼워진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동안 나를 언제나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던 마음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모두 가는 곳이니까, 남들이 예쁘다고 하니까, 거기는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니까 라는 이유로는 예전부터 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건 지금도 비슷했다.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엔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던 그 질문이 요즘 들어 나의 방향을 밖이 아닌 안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내가 어딘가를 가고 싶었던 이유는 순수하게 궁금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호기심이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궁금하면 책과 자료들을 수시로 찾아봤고, 그렇게 무척이나 공부를 해서 직접 가보면 책에는 나오지 않은 이야기가 또 하나 가득 펼쳐지는 것이 여행이었다.


그런데 그 현실에서 마주한 경험들이 티브이에서 보이는 누군가의 여행기와는 제법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고, 또 그 사이 변해버린 세상을 목격하며 요즘 나는 이런 질문이 든다.


과연 인간의 호기심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단순히 내가 궁금하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곳을 꼭 가야만 한다면, 그래서 지구촌 80억명의 사람들 모두가 각자가 궁금하기 때문에 어딘가를 가야만 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힘든 지구는 어떻게 될까?


순수한 나만의 호기심이라고만 생각했던 이동범위가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인공지능의 능력이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뉴스로 인간들에게 통보되고 있을 때, 인간이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호기심만으로 세상을 한참 떠돌아다니던 나에게 이 질문은 과학자들에게는 자신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순간과 비슷할 것 같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머리 뒤쪽으로 번개가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은 아니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나도 모르게 천천히 하지만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이 질문이 최근 들어 뚜렷해지고 있었다. 뚜렷한 답을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요즘 나는 일을 하지 않아 모아둔 자금도 없었고, 그래서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지극히 요즘에 드는 나의 고민일 뿐이었고,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듯 남편은 작년 연말 즈음 문득 내게 물었다.


“2024년엔 휴가를 어디로 가고 싶어?”


매번 자기는 전형적인 독일사람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가끔 너무 독일 사람같은 질문을 하는 남편. 당장 이번 겨울도 어떻게 보낼지 모르겠는데 그냥 통채로 2024년의 전체 휴가 계획을 2023년 11월부터 물어보면 독일 사람들은 정말로 이터너리를 만들어서 회사에 제출하는 것일까? 제출하면 그게 내년에 계획대로 이뤄지긴 하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화차이라는 것을 알긴 하지만 그래도 뜬금없이 정말 어디로 휴가를 가고싶냐는 질문을 받으니 생각을 또 해보는 나였다. 나는 마침 질문의 방향이 바뀌어 어딘가를 가도 상관없지만 한편으론 굳이 어딘가를 떠나야 하나 싶은 마음 상태였지만, 매일 출근을 하는 남편에겐 그냥 뽑아진대로만 먹기엔 단조롭기 그지 없는 가래떡 같은 직장 생활 중에서 휴가야 말로 가볍기 그지 없는 바람떡이자 가장 달콤한 꿀떡 같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정말 휴가가 필요해서, 아주 순수하게 어디를 가고 싶은지 물어본다면 여전히 나의 순수한 호기심은 AI처럼 고민없이 술술 목적지를 풀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 그 순간 내 머릿 속 현실과 이성이 호기심의 목을 잡고 흔들어댔고, 그러고나면 나의 입은 다시 이성만을 대변하는 대리인이 되버렸다.


2023년 12월에 생각하는 2024년 한 해는 어디로 떠나고 싶을까? 순수하게 이성과 현실만을 떠올려도 가야할 것 같은 곳이 한 곳 있긴 했다.


작년 남편의 한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외가와 친가 두 분의 할머니 중 친가 할머니께서 오랫동안 편찮으셨다는 소식을 결혼하기 전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가 임종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친가 할머니신 줄 알았다. 그런데 건강하시던 외가 할머니께서 갑자기 그렇게 급하게 소천하신 것이다.


2023년을 돌아보며 그렇게 갑자기 떠나신 할머니가 떠올랐고, 그래서 남편에게 나는 2024년엔 친가 할머니를 뵈러 떠나자고 말했다.


결혼한 지 5년이 다 되어 가지만, 나는 남편의 친가할머니를 뵌 적이 없었다. 그 할머니는 이탈리아에 사시기 때문이다. 코로나 직전 해에 결혼한 우리는 그다음 해 할머니를 뵐까 했지만 코로나가 시작되어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고, 작년엔 남편의 이직과 이사 때문에 또 한 해를 건너뛰었었다. 이렇게 의도치 않게 미뤄진 만남이었는데, 갑자기 작년에 외가 할머니를 떠나보내면서 이제는 더 이상 미루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렇게 남편의 친가 할머니를 뵈러 가는 것이 우리의 2024년 여행 계획이 되었다.


결혼한 지 5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가끔은 파란 눈을 가진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나의 시댁 식구들이라는 것이 꼭 영화 속 남의 이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무려 나의 시할머니라는 분이 이탈리아에 계신다 것이 또 한 번, 이게 나의 이야기인가 싶어 남편에게 재차 물어보게 만든다. 남편의 할머니는 왜 이탈리아에 계시는 걸까?


이렇게 되어 떠나게 되는 이탈리아인만큼, 할머니를 뵈러 가기 전에 내가 궁금한, 아직 가보지 않은 이탈리아와 남편이 가보고 싶은 이탈리아 도시들을 묶어 반달짜리 이탈리아 계획을 세워본다. 우리는 이탈리아 어떤 곳을 떠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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